소설리스트

쌍피-59화 (5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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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어디를요?”

    “방에. 춥잖아.”

    “이것만 하고 갈게요. 다 해 가요. 먼저 가 계세요.”

    “싫어. 지금 가.”

    “…….”

    아니, 이 미친 사장 놈이 또……. 아진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거품이 가득한 물을 첨벙거리며 그릇을 닦았다.

    “제 할 일이에요. 제가 저번에 말했죠. 제가 일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제 일을 해야 한다고. 가서 기다려요. 귀찮게 하지 말고.”

    다 큰 어른이 그걸 못 기다려서……. 아진의 중얼거림에 종들이 입을 떡 벌렸다. 기함할 말이었다. 윗사람이 오라면 냉큼 가야지. 버티고 앉은 거로 모자라 저 무서운 석주에게 핀잔까지 주다니. 아진이 단단히 돌아 버린 게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석주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웃음을 그리고 있던 입꼬리가 한일자를 그렸고, 가뜩이나 검은 눈동자는 빛 비침도 없이 새까매졌다.

    “…….”

    석주가 아진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바지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총이나 칼 같은 걸 꺼내려는 것 같았다. 질겁한 여자 종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이순은 작은 의자 뒤로 벌러덩 넘어지기까지 했다.

    헌데 예상외로, 석주의 가슴팍에서 나온 건 검은색 가죽 지갑이었다.

    그가 지갑 속에서 오백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종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열흘 치 일당이었다. 종들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을 새도 없이 얼른 그것을 받았다.

    “얘 데리고 가고 되겠습니까? 힘들겠지만 얘 일도 좀 대신 해 주고.”

    “아이, 그럼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냉큼 튀어나온 긍정에 석주가 빙긋 웃었다. 여자 종들이 그 멋들어진 미소에 광대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석주가 아진의 팔꿈치를 잡고 일으켰다. 거센 힘에 아진은 번쩍 들리듯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질질 끌려갔다.

    “누나! 누나!”

    아진이 팔을 마구 퍼덕이며 종들을 불렀다. 그러자 이순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진아, 잘 가!”

    “설거지는 괘념치 말고!”

    그에 아진이 허공에다 발길질을 했다. 나쁜 것들! 고작 오백 원에 사람을 팔아!, 라는 말이 혀끝에서 달랑거렸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씩씩거리는 아진의 분통 어린 숨결에 석주가 킥킥 웃었다.

    석주는 방문을 닫자마자 곧장 아진의 옷을 풀어 헤쳤다. 잠바를 지퍼도 열지 않고 그대로 위로 훌러덩 벗기고, 저고리도 대충 고름을 풀어 옆으로 끌어 내렸다. 그 후 자신의 셔츠도 단추 두 개만 풀더니 훌러덩 벗어 던졌다.

    기겁한 아진이 방문을 열고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석주에게 허리가 잡혔다. 아진이 퍼덕퍼덕 다리를 흔들었다.

    “으아아, 사장님! 미쳤어요?”

    “안고만 있을게, 안고만.”

    “개소리!”

    “진짜야. 사흘 동안 네가 너무 고팠어.”

    석주가 아진의 허리와 등을 꽉 껴안았다. 판판한 가슴팍에 뜨겁게 열이 오른 제 가슴팍을 붙이고, 아직 찬 바람이 그득한 아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마에 언뜻언뜻 스치는 아진의 가느다란 머리칼이 사무치게 좋았다.

    “…….”

    아진은 그에게 인형처럼 안긴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당한 게 좀 많아야 말이지. 갑자기 엎어져서 바지가 내려갈지도 모르고, 가랑이 사이로 좆이 문질러질지도 모르고, 입술을 비롯해 온몸이 빨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긴장한 몇 분이 흐르고서야 몸에 힘이 빠졌다. 잠깐 망설이던 아진이 석주의 등을 안았다. 어찌나 넓은지 팔에 다 감싸지지도 않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석주의 두툼한 어깨에 뺨을 묻은 아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그의 따뜻한 품이 느껴졌다. 흉터가 많지만 맨들맨들한 피부와 단단한 근육도 만져졌다. 은근히 스며 오는 심장 박동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진은 손을 석주의 옆구리에다 문질렀다. 설거지를 하느라 꽁꽁 얼었던 손을 녹이는 거였다.

    마치 이불 아래에 손을 넣고 녹이는 듯한 행색에 석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진이 저를 인간이 아니라 난로 정도로 생각하는 게 우스웠다. 추위를 많이 타는 다람쥐 같기도 하고.

    귀여워라. 아예 등에다 붙이고 다닐까 보다. 그럼 열이 확 뻗쳐도 아진이 그 열을 야금야금 삼켜 주겠지. 그래 놓고 정작 저는 좋다고 녹진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색색 소담한 숨결로 제 귓불을 간질이며 잠을 잘지도 모른다.

    석주가 혼자 흐뭇한 상상을 하며 미소 짓는데. 아진이 고개를 들고는 석주를 쳐다봤다.

    “왜 웃어요?”

    “네가 좋아서.”

    “…….”

    “보고 싶었어, 아진아.”

    석주가 아진을 더욱 꽉 껴안았다. 그 힘에 아진이 윽, 하고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허나 석주는 팔을 옥죈 힘을 풀지 않았다. 그의 품을 벗어나려던 아진은 이내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안아 이불로 갔다.

    그는 이불 위로 쭉 미끄러지듯 눕더니 아진을 자신의 몸 위로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후끈한 숨을 토해 냈다.

    석주의 가슴팍에 턱을 댄 아진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더워요?”

    “응.”

    “그럼 사장님만 벗으면 되지. 제 옷은 왜 벗기는 거예요.”

    “기분 좋잖아. 너랑 살 맞대고 있는 게 좋아.”

    석주가 아진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앞머리를 묶어 주고 싶은데. 머리끈이 저 멀리 있어 가지러 가기가 귀찮았다.

    아진의 낯이 해괴하게 뒤틀렸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뭐 어때, 요즘 세상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사장님 진짜 상 또라이 같아요.”

    “그새 미친놈에서 상 또라이로 진화했네. 그래도 오늘은 좆 안 들이밀잖아. 착한 또라이 정도로 해 줘.”

    “예…… 뭐…….”

    아진이 말을 말겠다는 듯 고개를 스르륵 돌렸다. 그러든 말든 석주는 그저 좋다고 아진을 안고 주무르고 뺨과 입술을 양껏 비벼 댔다. 아진은 싫은 척하면서도 그에게 안겨 있었다. 뜨끈뜨끈한 품이 참 좋았다.

    “일은 어떻게 됐어요? 잘 됐어요?”

    석주의 두툼한 팔뚝을 조물조물 매만지던 아진이 물었다. 이미 명진에게 다 들었지만, 저녁 식사 전 조직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해결이 된 걸까.

    “아니. 좆 됐어.”

    석주가 코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고는 담벼락 아래에 숨겨져 있던 약을 발견한 것과 진걸에게 불을 지르라 일을 시킨 것까지 알려 주었다.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상황에 덜컥 겁이 났다. 험하게 살아오긴 했지만 이런 일에는 영 면역이 없었다.

    “그렇게 불 다 지르고 돌아오면…… 다시 거두실 거예요?”

    그 말에 석주가 아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낮게 가라앉은 아진의 음성에 은근히 스민 감정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왜? 싫어?”

    “……네.”

    “왜 싫어?”

    “그냥…… 싫어요. 그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아진이 으응, 소리를 내며 석주의 목젖에 이마를 비볐다. 곰살맞은 애교에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의외였다. 가끔 심사가 뒤틀릴 때마다 투덜거리는 거나, 가감 없이 미친놈이라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거나, 제가 처음 그를 안고 돈을 건넸을 때 남창 취급하지 말라며 돈을 던지는 것에 보통 성깔이 아닌 걸 진즉 알았다만. 두부처럼 생겨 먹어서 그런가. 그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신기했다.

    석주가 아진의 등을 도닥이며 그를 달랬다. 진걸이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그를 의심하는 건 온통 가설뿐이지만 이미 석주의 마음에서 떠난 이였다. 저를 살려 준 값은 진즉 돈으로 치렀으니 버려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가 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받아 주긴 하겠지만, 식구가 되진 못할 것이다.

    “말단으로 부릴 거야. 만약 중호파와 연결되어 있다면 이래저래 써먹을 수 있어.”

    “써먹어요?”

    “그래. 거짓 정보를 흘려서 중호파를 혼란스럽게 한다든가, 그놈을 족쳐서 정보를 빼낸다거나.”

    아진이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프락치, 이중 첩자 뭐 그런 거로 써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석주가 알아서 잘하겠지. 5천만 원 치의 마약을 잃어버렸다가 찾았는데도 평온한 낯을 보아 뭐든 못 하겠나 싶었다.

    아진이 어느새 제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는 석주의 손을 떼어 내며 물었다.

    “불 지른 건요? 중호파가 복수하러 쳐들어오면 어째요?”

    “안 그럴 거야. 우리를 칠 수 있었으면 진즉 쳤을 놈들이거든. 쳐들어올 거면 뭐 하러 약을 숨겼겠냐. 그냥 빼앗으면 되는걸. 지금 우리를 쳐서 이겨 봐야, 그게 개운한 승리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거지.”

    “승리면 승리지, 개운한 승리는 또 뭐예요?”

    “우리도 중호파도 대면적으로는 회사를 차리고 기업 행세를 하지만 어쨌거나 근본은 깡패야.”

    “…….”

    “깡패는 힘으로, 주먹으로 그 세력을 유지해.”

    “…….”

    “지금 태회파와 중호파가 전쟁을 하면 분명 승리하는 쪽이 있긴 하겠지만, 아주 많은 것을 잃을 거다. 깡패의 주 원동력인 사람들이 잔뜩 죽어 나갈 테니까.”

    “…….”

    “그럼 그 힘을 회복할 때까지 몸을 사려야 하는데. 그 틈에 또 누가 쳐들어오지 말란 법이 없거든. 서울 주변 도시에도 조직들이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제법 커.”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이야 석주의 집에서만 사니 바깥일을 모르지만, 도박장에 있을 땐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손님이 다녀가니 이런저런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어떤 조직이랑 어떤 조직이 어디서 붙었다더라, 몇 명이 죽었다더라, 길바닥에 손가락이 굴러다닌다, 따위의 소문을 하루가 멀다고 들었다.

    중호파가 서울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는 그런 일이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조직들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터였다.

    “어렵네요. 사장님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닌가 봐요.”

    아진이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에 석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푸흐……. 뭐?”

    “아니, 요즘 서울 바닥에 사장이 워낙 많으니까……. 서울에서 김 사장 찾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나 사장 하는 줄 알았거든요.”

    “김 사장 말고 김 서방.”

    “……그거나 그거나.”

    “그렇지. 그거나 그거나지. 그거나 그거나인 김에 뽀뽀나 할까.”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일하는 건 참으로 이성적인 사람이 밤만 되면 등신처럼 군다. 맥락도 없고 이유도 없고 일단 입술과 좆부터 들이미는 게 짐승 같았다.

    아진이 못 들은 척하며 석주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꾸물꾸물 등을 돌리는데. 석주가 그런 아진의 위로 팔굽혀펴기하듯 타고 올라갔다. 아진의 얼굴 양옆으로 떡하니 버티고 선 팔뚝이 몹시 단단하고 두꺼웠다.

    “싫어?”

    석주가 속삭이듯 물었다.

    “…….”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눈만 슬쩍 감았다. 그에 석주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이내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뜨거운 혀에 아진이 으응, 하고 신음했다. 석주가 그의 입술을 촙촙 빨았다가 놓았다. 혀로 말랑한 볼 안쪽이나 자그마한 치아를 훑기도 했다.

    달콤한 입맞춤이었으나 아진은 도통 석주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리 한편에 진걸이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중호파에 불을 지르러 간 그가 냅다 내빼서 돌아오지 않았길 바랐다. 그럼 모든 게 정리될 테니까. 꽃님이 말한, 우리 사이를 나돌고 있다던 그 검은 아지랑이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부재로 모든 게 해결될 테니까.

    아진은 석주의 목을 껴안으며 이름 모를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다시는 진걸이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허나 늦은 새벽. 진걸은 조직원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중호파의 건물 두 채를 홀라당 태웠다는 소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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