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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58화 (5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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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진이 아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가 잠시 방황하더니 마른 어깨를 쥐었다. 그의 손이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고추 달린 것들끼리 붙어먹니 마니, 다리 병신이니 마니, 누가 뭐라 하믄 내한테 일러. 대가리를 따 버릴 테니까. 알았재?”

    “……네.”

    “그래. 가 봐라.”

    “네.”

    아진이 재차 허리를 숙였다. 그 후 종종걸음으로 처마 아래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모퉁이를 돌기 전에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명진이 저를 빤히 보며 서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진이 재차 꾸벅 묵례했다. 그러자 명진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산만 한 덩치에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우스웠다. 아진이 킥킥 웃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어쩐지, 명진과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라진 아진의 공백을 보던 명진이 목을 크게 뒤틀었다. 뼈에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났다. 저 멀리 석주의 방이 있는 곳을 한 번 본 그가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형님! 명지이 형님!”

    대찬 빗소리를 뚫고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명진이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비에 흠뻑 젖은 조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약 찾았습니다!”

    그 말에 명진의 눈이 부릅뜨였다.

    명진이 우글우글 모여선 조직원들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본가와 뒷집을 가로지르는 담벼락 아래. 1kg씩 나뉜 약봉지가 나뭇잎과 흙 사이에 아무렇게나 파묻혀 있었다. 원래 낙엽으로 덮어 둔 것인데, 비바람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것을 조직원이 발견했고.

    참 성의 없는 눈속임이었다. 이따위 수작에 속았다는 게 분통이 터졌다.

    명진이 자조 섞인 헛웃음을 흘리는데, 별안간 조직원들이 흠칫흠칫 어깨를 떨며 인사했다.

    “석주 형님. 오셨습니까.”

    석주였다. 조직원의 부름으로 방에서 나온 그는 정장 바지에 와이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아 곁에 서 있던 조직원이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형님. 이것 좀 보십쇼.”

    명진이 몸을 옆으로 옮겨 석주의 자리를 만들었다. 석주가 널브러진 약봉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계속 여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고에 불을 냈는데, 불이 금방 사그라드니까 급하게 도망치다 여기 대충 숨겨 둔 긴지, 아니면 처음부터 여 숨길라 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이 새끼는 약을 들고 튈 생각이 없었다는 거네. 나흘이나 여기 처박아 둔 거 보면.”

    “예?”

    석주의 말에 명진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석주가 비에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목적이 약을 훔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럼…….”

    “우리가 거래처를 잃길 바랐던 거지.”

    “…….”

    명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석주가 뒤를 돌아 담배를 물었다. 곁에 서 있던 조직원이 얼른 라이터를 갖다 댔다. 담배 끝에 금세 새빨간 불씨가 옮겨붙었다.

    “중호파가 한 짓이야.”

    석주가 후우,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명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석주가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종이 그랬다면 당장 갖다 팔았겠지. 돈이 목적이었을 테니까. 중호파에게 사주를 받았대도 약값이 5천만 원이라는 소문이 다 났는데, 계속 여기 뒀을 리가 없어.”

    “…….”

    “돈에 관심 없는 놈이 한 짓이다.”

    “……진걸이 놈일까요?”

    명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석주는 대답 없이 담배를 크게 빨았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를 내뿜으며 휙 몸을 돌렸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진걸의 앞에 촤르륵 지도가 펼쳐졌다. 다섯 뼘쯤 되는 크기의 서울 지도였다. 곳곳엔 빨간 사인펜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전부 중호파와 관련한 건물들이었다. 기헌의 집, 술집, 사채, 회사, 도박장, 풍속점, 간부들의 집, 창고 등. 태회파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부터 공들여 만들어 온 지도였다.

    피떡이 된 진걸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도를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겁은 물론 의문조차 없었다.

    석주가 그런 진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쪼그려 앉았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둑하고, 꿉꿉한 곰팡내가 나는 창고가 영 불쾌했다. 과거엔 이런 집에서 산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찰나라도 있기가 싫었다. 사람 변하는 거 한순간이라더니…….

    석주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냈다. 그리고 느리게 연기를 내뿜으며 누군가를 불렀다.

    “금태야. 이리 와 봐라.”

    “예, 형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장정이 헐레벌떡 석주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석주가 턱짓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하나 찍어 봐라.”

    “예?”

    “동그라미 중에 아무거나 하나 찍어.”

    “어……. 전 빡대가리라 뭐가 뭔지 잘 모르지 말입니다, 형님.”

    “괜찮아. 아무거나 찍어 봐.”

    금태가 우물쭈물했다. 그가 명진의 눈치를 봤다. 명진이 얼른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태가 손을 뻗었다. 지도 위를 방황하던 손이 이내 동그라미 하나를 찍었다.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큰 동그라미였다.

    그것을 본 석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폈다.

    “잘했다. 가 봐.”

    “예, 형님.”

    금태가 꾸벅 인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석주가 검지로 금태가 찍어 주고 간 동그라미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가서 불을 질러.”

    “…….”

    “건물이 다 타서 폭삭 주저앉으면, 중호파 새끼들 수십이 그 불구덩이에서 뒤지면, 내 너를 다시 식구로 받아 주마.”

    석주가 씩 웃었다. 언뜻 보기는 자비로운 미소였으나 그를 코앞에서 보고 있는 진걸은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석주가 그런 진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기대할게.”

    말을 마친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가려는데. 진걸이 걸걸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장님.”

    “…….”

    석주가 우뚝 발을 멈췄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진걸이 그런 석주의 등에다 대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수리가 땅에 처박힐 정도로 깊은 인사였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

    석주는 대답 없이 담배 연기를 한 번 내뿜곤 창고를 나왔다. 창고 문이 끼이익-하며 닫혔다.

    “진짜 보내실 겁니까? 갔다가 도망치면 우짭니까?”

    명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석주가 그의 넓적한 뒤통수를 마구 쓰다듬었다. 짧은 머리칼이 손바닥을 긁는 느낌이 좋았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다니까. 금태랑 명철이, 그리고 기택이. 일로 와 봐라.”

    석주가 덩치 좋은 장정 몇을 불러 모았다.

    “예!”

    그들이 우르르 석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걸이 풀어 주고, 차에 기름이랑 라이터 넉넉하게 실어 줘라. 그리고 나가면 조용히 따라붙어라. 중간에 누굴 만나는지, 수상한 낌새는 없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진 찍듯이 살뜰히 보고 와라.”

    “예, 형님.”

    “불 지르고 돌아오면, 그때 나가서 수고했다고 해 줘. 그리고 오는 길에 한 군데 더 불을 지르라고 해. 저놈이 선택하게 하지 말고, 명철이 네가 아무 데나 찍어서 거기다 지르라 해.”

    “예.”

    “싫다거나, 변명하거나, 나중에 하겠다거나, 개소리를 나불거리면 그 자리에서 죽여. 시체는 집으로 가져오고.”

    “예, 형님.”

    “총 들고 가라. 혹시나 중호파가 진걸이 감싸면서 너희들한테 해코지하려고 하면, 싸우지 말고 곧장 돌아오고. 차 헤드라이트는 끄고 다니고. 어두우니까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세 사람이 꾸벅 인사하고는 창고로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잠시 보던 석주가 꽁초만 남은 담배를 창고 벽에 비벼 껐다. 그리고 뚜벅뚜벅 집으로 향했다.

    “명진아.”

    “예.”

    “밥 먹자. 배고프다.”

    “……예, 형님.”

    명진이 얼른 석주의 뒤로 따라붙었다.

    * * *

    아진은 장독대 옆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할퀴는 찬물이 괴로웠다. 비가 그친 후 더 거세진 찬 바람 역시 괴로웠고.

    손끝이 빨갛게 얼어서 이따금 무릎 아래에 끼우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차디찬 가을의 밤바람이 휑- 하고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면 움찔움찔 몸도 떨었다.

    반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이순과 여자 종은 춥지도 않은지, 종알종알 수다를 떨어 댔다.

    “도은이가 시집을 간다고?”

    “그렇다니까! 아, 무슨 회사였는데. 아, 어, 그래. 염색약 만드는 회사 사장이라나. 그 사람이랑 결혼한대.”

    “도은 누나가요?”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도은이라면 도박장에 있던 창녀였다. 태회파가 도박장을 습격했던 그날, 넘어진 저를 일으켜 주고 달래 주었던 그녀. 석주가 창녀들을 모두 보내고 종들만 끌고 온 탓에 그 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응. 잘됐지. 몹쓸 애비가 빚을 한 바가지나 지는 바람에 금 사장한테 끌려와서 몸 팔던 거 아니냐. 이제 겨우 제 인생 찾았지.”

    “그렇지. 걔가 예쁜 건 둘째치고 똑똑하고 눈치도 빨랐잖아.”

    “남편은요? 남편 될 사람은 착하대요?”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돈 많다니까 잘해 주겠지 뭐.”

    “에이, 돈 많은 개새끼가 얼마나 많은데…….”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도박장에 여자를 사러 오는 손님들은 대개 뭣도 없는 놈들이었지만 이따금 돈 많은 놈도 있긴 했다. 그런 놈들이라고 다 착했냐? 결코 아니다. 쥐어패 놓고 돈으로 입막음하는 새끼들이 천지였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결혼.”

    이순이 중얼거렸다. 그러든 말든, 도은의 걱정에 미간을 구긴 아진이 벅벅 그릇을 닦는데. 바쁘게 재잘거리던 종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서늘한 정적에 아진이 빼꼼 고개를 들었다.

    “아진이, 안녕.”

    석주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방에서 한동안 안 나올 것처럼 굴더니, 저녁 먹으러 나왔기에 기뻐했었다. 얼른 설거지하고 석주의 방에 가야지, 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어……. 안녕하세요…….”

    아진이 앉은 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장님.” 굳어 있던 이순과 여종이 덩달아 인사했다. 그 인사를 대충 받은 석주가 아진의 설거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오랜만에 보는 잘생긴 얼굴에 아진이 찰나, 멍하니 넋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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