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57화 (5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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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욕도 할 줄 아나? 말갛게 생겨가 완전히 안 줄 알았는데.”

“‘아’요?”

“애 말이다. 애.”

“아…….”

아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도 스무 살인데, 불만을 하려다가도 명진의 곁에 있는 이들에 비하면 애가 맞을 것 같아 말았다.

아진이 담배를 뻑뻑 태우는 명진을 흘끔거렸다. 그와 오가며 마주친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대화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무서운 사람인데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장대비 틈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멍하니 보던 아진이 슬쩍 물었다.

“사장님이 화나신 거 보면…… 일이 잘 안 됐나 봐요.”

“응. 큰 거래처였는데, 아예 틀어져 뿟어. 이제 다시는 우리랑 계약 안 한다 카더라.”

“왜요? 고작 한 번 어긴 건데요?”

“그래. 고작 한 번인데. 근데 어쩌겠노. 우리 잘못이라 할 말이 없지. 삼 일 밤낮을 사정하고 타일러도 들어 먹지도 않고……. 씨발놈들이 뭔 생각인지 약을 더 얹어 주겠다고 해도 싫다 카이 어쩔 수가 있나…….”

명진이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 듯 뿌득 이를 갈았다. 그의 잇새에 껴 있던 담배가 옆으로 한 바퀴 굴러갔다. 아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래처가 거기 한 군데예요?”

“아니지. 열댓 군데 된다.”

아진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었다. 기업이니 경영이니 회사니 거래처니 그런 건 잘 모르지만, 그래도 도박장에서 굴러온 게 몇 년인데.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다.

도박장에 술을 배달해 오던 아저씨도, 담배를 대던 할아버지도 거래처가 여러 개였다. 도박장을 들렀다가 건너편의 극장도 갔다가, 사거리에 있는 큰 술집도 간다고 했다.

거래처가 열댓 군데인데 개중 하나가 없어진다고 회사가 쫄딱 망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물론 5천만 원은 기함할 정도로 큰돈이다만, 석주가 저리 화를 내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럼 하나 정도 잃은 건 괜찮지 않아요?”

“아깝잖아. 거래처가 하나 트기는 억수로 어려운데, 잃는 건 졸라 쉽거든. 소문도 금방 나고.”

“…….”

“세상에 약을 우리만 만드는 것도 아이고. 다른 나라에도 약 파는 새끼들이 천지삐까리야. 그래 선택지가 많으니까 시일 못 지키면 대번에 안면 몰수해 버린다. 약쟁이들은 약을 한 시간이라도 늦게 맞으면 아주 눈깔이 돌아삐거든. 그러다 다른 약에 맛 들이고 그럼 우리 약을 다시 안 찾아.”

“하지만…… 태회파가 만든 약 맛이 제일 좋댔는데…….”

혼잣말처럼 나온 아진의 말에 명진이 푸하하 웃었다. 그가 꽁초만 남은 담배를 대충 바닥에 내던졌다. 오목하게 고인 물에 떨어진 꽁초가 대번에 식었다. 아진이 쪼그려 앉아 그것을 주웠다. 그러고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재떨이 겸 쓰레기통에다 넣고 왔다.

명진이 새 담배를 꺼내 물며 물었다.

“누가 그라드노? 설마 니 담배는 안 하면서 약은 빠나?”

“아니요, 아니요. 그냥…… 사람들이 그래서…….”

“뭐, 그렇지. 우리 게 맛이 좋긴 하지. 그래가 해외 아들도 사족을 못 쓴다 아이가. 근데 그렇다고 약속을 안 지키는 건 안 될 말이거든.”

아진이 눈을 깜빡였다. 약속 그거 한 번쯤은 어길 수도 있지. 거래처 하나쯤은 잃을 수도 있지.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돈 받고 물건을 안 준 것도 아니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됐다.

모호한 아진의 낯에 명진이 고개를 숙이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잇새로 담배 연기를 흩뿌리며 속삭였다.

“뭐든 한번 시작했으면 짱을 먹어야 돼.”

“짱이요?”

“그래. 일등. 왕. 최고 말이다.”

명진은 ‘일등’에서 검지를 들었다가, ‘왕’에서 엄지를 들었다가, 또 ‘최고’ 엄지를 흔들었다. 아진이 그의 손가락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짱을 먹으려면 완벽해야 되고. 그 짱이 될 때까지는 거래처 하나하나가 중요해.”

“꼭 짱이 되어야 해요?”

“암. 짱이 되야 다른 놈들이 감히 우리를 못 치지.”

“…….”

“석주 형님이 다 우리 지킬라고 아득바득 거래처 유지하고, 약 만들어 팔고, 나라님들한테 돈 바치고, 식구들 모아서 힘 키우는 거 아이가. 애매-한 조직이면 순식간에 잡아먹히거든.”

명진이 후우읍, 세게 담배를 빨아 당겼다. 기다란 담배가 순식간에 짧아졌다.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잡아먹혀요?”

“그래. 지금이야 돈도 있고 식구도 많아서 이렇게 서울에 떡하니 집도 짓고 사는데, 몇 년 전만 해도 여기저기서 쳐들어와가 맨날 쑤셔졌었다. 아주, 씨부랄, 배때기가 남아나는 날이 없었다 아이가.”

명진이 당시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의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때, 우리 석주 형님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밤에 쳐들어오고 새벽에 쳐들어오고 대낮에 쳐들어오고. 맨날천날 들쑤셔서 집 문이 아예 넝마짝이 됐었다니까.”

“…….”

“그래도 석주 형님이 계셔서 버텼지. 아니었으면 우리 조직 진작 끝났어.”

명진이 끌끌 웃었다. 조소가 아니라 진정 웃음이었다. 집 문이 넝마가 됐다면서……. 아, 중요한 건 집 문이 아니라 석주였나. 아진이 손등에 튄 빗물을 바지춤에 슥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사장님이 싸움을 엄청 잘하나 봐요.”

“암. 우리 형님이 내를 몇 번이나 살려 줬는데. 다 세지도 못해.”

“살려 줘요?”

“엉. 내가 어릴 때는 싸움을 영 못했거든. 근데 혼도 안 내고, 내치지도 않고, 그 잘생긴 얼굴로 웃으면서 ‘개안타, 명진아.’ 맨날 이래 말해 줬다 아이가.”

“…….”

“형님 이십 대 때는 진-짜, 어? 진-짜 잘생겼었거든. 꽃 같았어, 꽃.”

“지금도 잘생기셨는데…….”

“아,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무튼 그 얼굴로 씩- 이렇게 웃으면 적들도 당황했다이까. 형님 얼굴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가 눈이 다 부시잖냐. 내가 배때지가 찔려도 형님이 웃어 주면 안 아팠다.”

“…….”

아진의 입가가 해괴하게 뒤틀렸다. 무슨 깡패가 형님 얼굴 가지고 주접을 떠나. 칼에 배가 찔렸는데도 석주가 웃어 주면 안 아팠다니.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아니, 뭐. 믿지 못할 것도 없지. 실로 석주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잘생겼으니까.

허나 주접도 정도가 있지 이건 좀……. 이렇게까지 좋다고 따라다니니 석주가 명진을 귀엽다고 하는 건가, 싶었다.

과거 이야기에 신난 명진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이 쏟아 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담배도 태우지 않았다. 그저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쳐 놓은 채 입을 놀리느라 바빴다.

“니 형님 옆구리 이쪽에 흉터 있는 거 아나?”

“어…… 네.”

아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가 폈다. 석주의 온몸에 크고 작은 흉터가 흩뿌려져 있어서 또렷이 기억은 안 난다만. 옆구리에 뭐가 있었던 것 같긴 했다.

“그것도 내 때문에 생긴 기라. 청태파 새끼들 치다가 내가 턱, 여기, 씨발 여기부터 여까지 북 찢어져 갖고 완전 까무러쳤었거든. 내가 원래 겁이 없는데 얼굴 가죽이 덜렁거리니까 쫌 무섭더라고.”

명진이 자신의 오른쪽 귓불 아래부터 턱을 따라 죽 손가락을 움직였다. 흉한 흉터가 있는 길이었다.

“그때 형님이 내 들쳐 메고 싸우다가 찔리셨다 아이가. 형님 아니었으면 내 아구창 다 날아갔을 거다. 완전 병신- 아니 야차 꼴 아니었겠나.”

명진은 ‘병신’에서 아진을 봤다가 말을 고쳤다. 아진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었다.

“사장님이 명진 형님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암, 암! 형님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무도 형님한테 기미를 안 줬어, 기미를. 끈 떨어진 뒤웅박이다, 이거지. 복수하겠다고 청태파를 박차고 나오긴 했는데, 처음엔 힘들었다. 형님이랑 둘이 같이 밥도 굶고, 아무 데서나 자고 그랬었지.”

“…….”

“암튼 그런 날들이 있었던 덕분에 지금은 칼도 좀 휘두르고, 총도 좀 안 쏘나. 그리고 이렇게 멋진 조직에서 형님도 모시고 있고. 나는 언젠가 뒤질 일 있으면 꼭 형님을 위해서 뒤질 거데이.”

명진은 본인이 말해 놓고도 멋쩍은 듯 아진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그의 귓바퀴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주접을 떨어 놓고 이제 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 과격한 수줍음의 표현에 아진이 앞으로 훌러덩 밀려났다. 마른 몸이 흙탕물로 질퍽한 마당을 나뒹굴려 했다. 놀란 아진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팔을 퍼덕이는데. 명진이 그의 목덜미를 쥐어 다시 원래 자리에 두었다. 그러곤 쯧쯧 혀를 찼다.

“머씨마야. 허벅지 좀 키아라. 살도 찌우고. 어?”

“……네.”

아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누군가가 창호지 문을 열고 슬쩍 상체를 빼냈다. 말단 조직원이었다.

“명진이 형님. 저녁 준비 다 됐답니다.”

“어. 그래. 가마.”

“석주 형님 식사는 우짤까예?”

“밥상 따로 빼가 문 앞에 놔둬라. 안 드실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예.”

조직원이 꾸벅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명진이 들고 있던 담배를 마당에 던지려 했다. 그러다 아진을 흘끔 보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재떨이에다 버렸다. 아진이 씩 웃었다. 그 말간 웃음을 보던 명진이 정장 바지 주머니에다 손을 끼웠다.

“니도 밥 무러 가야지.”

“네.”

아진이 그만 가 보겠다며 허리를 숙였다. 어서 가서 방석도 깔아야 하고 반찬도 날라야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석주의 밥상도 제가 나르고 싶었다. 문을 두들기며 ‘저 아진인데요, 밥 놓고 갈게요.’라는 말이라도 해 보게.

그가 막 뒤를 도는데. 명진이 걸걸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아진아.”

“네?”

“……고맙데이.”

“……네?”

아진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고마워? 갑자기? 뭐가? 아진의 군청색 눈동자가 좌우로 혼란스레 움직였다. 그에 명진이 흉 진 턱 아래를 북북 긁으며 말했다.

“형님이 아버지 돌아가시고 잠을 영 못 주무셨거든. 벌써 십 년도 훌쩍 넘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여기, 어? 가슴에 열이 채여서 못 주무셨으니 오죽 괴로우셨겠냐.”

“…….”

“그래서 술도 많이 드시고, 가끔은 약도 하시고……. 내가 그거 진짜 싫어했다. 약 파는 인간이 약하면 단명하거든.”

“아…….”

“근데 니 만나고 형님이 잠을 잘 주무신다 아이가. 얼굴도 막 번쩍번쩍 빛나고, 밥도 잘 드시고. 내가 요즘 마음이 참-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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