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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거기 있지. 그래도 밥은 갖다 주래서 내가 끼니마다 밥상도 갖다 바치잖아.”
“어때? 걔가 한 짓 같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약 없어진 날 종로 회사에 있다가 갑자기 몇 시간 휙 사라졌다더니만?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고.”
“그거는 진짜 그날 종로 구둣방이 문을 닫았었다며?”
“에이, 그래도 이상하잖아.”
“나는…….”
“응.”
“걔가 한 거 아닌 것 같어.”
“왜?”
“애가 겁에 질린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밥 주면 꾸벅 인사하고는 열심히 퍼먹어. 아주 닥닥 긁어 먹고는 그릇 찾으러 가면 감사하다고 또 인사한다니까. 죄가 있으면 그렇게 못 처먹을 텐데 말이야.”
“당장 내치기엔 뭐가 애매-하니까 사장이 내버려 두는 거겠지?”
“그렇겠지. 아까 나간 깡패 놈이 늦어도 내일 밤에, 이르면 오늘 다 같이 돌아올 것 같다고 하니 곧 알 수 있지 않겠어?”
“궁금하네…….”
거기까지 듣던 아진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한산했다. 조직원들이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아서 그랬다. 식욕이 왕성한 조직원들에 비해 종들이 먹는 건 아이들 도시락 수준이라 금세 뚝딱뚝딱해서 먹어 치우곤 했다.
아진은 구석에 앉은 꽃님의 곁에 가 앉았다. 꽃님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싸구려 원두에 설탕을 탄 것이었다.
“밥은 안 먹고 왜 커피만 마시고 있어?”
아진이 그녀의 커피를 빼앗아 한 모금 홀짝이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점심 먹었잖아. 수저질하기도 귀찮아. 오랜만에 쉬는 건데 제대로 쉬어야지.”
“어떻게 밥 먹기가 귀찮을 수가 있어. 아줌마 저번부터 이상하다? 자꾸 밥 거르고?”
“너도 쉰까지 주방일 해 봐라. 그릇만 봐도 아주 진절머리가 나. 근데 밥 생각이 나겠냐.”
꽃님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진이 그런 꽃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낯빛이 안 좋은데. 부엌이 어두워서 그런가. 새치름한 눈으로 한참 꽃님을 보던 그가 쩝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아줌마는 어떻게 생각해?”
“뭘?”
“약 훔친 거 말이야. 진걸이 새끼가 그런 걸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아줌마는 모르는 거 없잖아.”
“…….”
“그때. 막 사장님이랑 진걸이 새끼랑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잖아. 뭘 봐서 그런 거 아니야?”
아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사흘 전, 진걸이 두들겨 맞던 날, 그녀가 석주와 진걸을 번갈아 보던 걸 흉내 내는 거였다. 꽃님이 그런 아진과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너도 같이 봤어.”
“응?”
“사장이랑, 진걸이 새끼랑, 너랑 셋이 봤다고.”
“무슨 말이야?”
“너희 셋. 이상해.”
“…….”
“셋이 같이 있으니까 안 보이던 게 보이더라고. 아주 이상한 게 말이야. 썩은 개울 같은 게 너희 주변을 맴돌아.”
“안, 안 좋은 거지?”
“그렇지.”
아진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미끄러졌다. 그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손가락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뼈가 도드라진 무릎을 긁었다가 꼬였다가 부산을 떨었다. 그러다 돌연 눈을 치켜떴다.
“진걸이 새끼 때문이지? 원래 그런 거 없었잖아. 나랑 사장님이랑 둘이 있을 땐 그런 거 보인다고 안 했잖아.”
“내가 말했잖냐. 너희 둘 사이에 둘만 있는 게 아니라고.”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꽃님이 말이 절대적이진 않다. 그녀는 묘한 신기가 있는 거지 신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불안했다. 아진이 알기로 꽃님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걸 때문인가. 그럼 진걸이 없어지면 되지 않나. 그러면 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석주에게 말해 볼까. 진걸이 약을 들고 나가는 걸 봤다고 거짓말이라도 할까.
아진은 두렵고 초조했다. 지금 이 행복과 안정이 깨질까 봐. 평생 가져 본 적 없는,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행복인데. 타인 때문에 깨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진이 다리를 덜덜 떠는데, 꽃님이 그의 고장 난 무릎을 쓰다듬어 왔다.
“아진아.”
“어?”
“너 여기서 안 나갈래?”
“……무슨 말이야?”
“이 집에서 나가라고. 느낌이 안 좋아.”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우중충하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순간, 집채만큼 커다란 자동차가 마구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제 모습이 상상됐다. 다 허물어져 가는 판잣집에 오들오들 떨며 홀로 늙어 가는 제 모습도 보였다.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시시각각 죽어 가는 아진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꽃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됐다. 애새끼인 네가 어떻게 나가 사냐. 내가 좀 더 지켜보다 말해 주마.”
그에 아진이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가 자신의 무릎을 쥔 꽃님의 손등을 감쌌다.
“……못 살 건 없지. 아줌마도 같이 가 줄 거잖아.”
“내가?”
“응. 아줌마랑 같이 살 건데. 여기서든, 바깥에서든. 그러니까 나가야 하면 말해. 나 돈도 많아. 아줌마 손에 물 안 묻힐게.”
“지랄. 누가 같이 살아 준대냐? 그리고 뭔 색시한테 할 말을 나한테 하고 있어. 남사스럽게.”
꽃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진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꽃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진짜야. 아줌마만 있으면 돼.”
근데 나가려면 일찍 나가야 해. 더 있으면 차라리 사장님 품에서 죽고 싶을 것 같거든.
* * *
해가 떠도 날씨가 어둑하다 싶더니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왔다. 그와 동시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으슬으슬한 추위에 아진은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석주가 없어 며칠 잠을 자지 못했더니 피부가 푸석하고 눈알도 따끔따끔했다.
그래도 오늘은 돌아온다니까. 오늘 밤엔 그와 같이 잘 수 있으니까. 그 생각을 하며 참았다. 부엌에 가 채소도 다듬고, 장작도 옮겼다.
그렇게 날이 어둑해졌을 무렵.
댕, 댕, 댕!
종소리가 울렸다. 아진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석주가 돌아왔다.
비가 오는 날은 종들이 대문으로 석주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 굳이 비까지 맞아 가며 인사할 필요가 없다는 석주의 말 덕분이었다. 종들은 종소리에 허리를 폈다가, 다시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이어 갔다.
그들 사이에 섬처럼 덩그러니 떠 있던 아진은 눈치를 보며 부엌을 벗어났다. 석주의 얼굴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진은 다실과 이어진 샛문을 통해 나와 복도를 절뚝절뚝 가로질렀다. 때마침 현관으로 들어오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아진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올라갔다. 턱을 추켜들고는 석주의 흔적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석주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190이라는 엄청난 키를 가지고 있어 덩치 좋은 사내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석주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늘 무심한 낯이었는데. 오늘은 눈썹 끝이 약간 위로 올라가고, 미간은 좁혀져 있었으며, 어금니를 꽉꽉 물었다가 놓아 관자놀이가 들썩이고 있었다. 넥타이는 보이지 않았고, 두루마기도 한 손에 아무렇게나 구겨 쥔 채였다.
그 얼굴에서 새카만 냉기가 철철 뿜어지는데. 아진은 다가가려던 발걸음조차 멈추어야 했다.
석주는 그대로 대청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널찍한 복도를 웅웅 울리는 소리에 집 지붕이 다 흔들리는 듯했다.
조직원들은 석주의 방문 앞에다 대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우중충한 낯으로 해산했다.
“…….”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쭈뼛쭈뼛 석주의 방으로 다가갔다. 맨들맨들한 문고리를 보며 입술을 말아 물던 그가 힘찬 콧김을 내뿜으며 손을 뻗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꿈치를 뒤로 휙 당겼다.
그렇게 센 힘도 아니었거늘,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아진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아진이 놀란 토끼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명진이 서 있었다.
“들어가지 마라.”
“……네?”
“사장님 원래 빡치면 혼자 푸신다 아이가. 화내는 거 식구들한테 보여 봐야 좋을 거 없다고. 나름대로 배려하시는 거니까 들어가지 말그레이.”
“어, 얼마나 혼자 계시는데요?”
“때마다 다르시지.”
아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보고 싶었는데. 혹여 제가 위로하거나 화를 달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는데. 모르는 척하고 들어가 볼까 했으나 명진의 말이라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저보다 석주를 훨씬 잘 아는 사람이니까.
“그럼 나중에 오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아진이 한숨을 거듭하며 뒤를 돌 때였다. 명진이 다시 그를 잡았다.
“아진이 니 담배 태우나?”
어색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광대가 불그스름해지고, 이마가 불그죽죽해졌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콜록콜록 기침하며 희뿌연 연기를 토해 냈다.
곁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던 명진이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아진과 명진은 한적한 처마 아래에 서 있었다. 오목한 기와를 타고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신발코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는 세차고 시렸다. 비에 흠뻑 젖은 나무와 흙이 쿰쿰하면서도 청량한 냄새를 지천에 흩뿌렸다.
그 사이로 매캐한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흘러갔다.
아진이 팔로 입을 감싸고 콜록콜록 연신 기침하자 명진이 탕탕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 우악스러운 힘에 하마터면 아진은 마당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틴 아진이 코를 훌쩍이며 팔을 내렸다.
입 한쪽으로 담배를 문 명진이 킬킬 웃으며 물었다.
“닌 도박장 맨치 험한 곳에 있었는데도 담배를 안 배았노?”
“담배도 돈이 있어야 사죠. 도박장에 있을 땐 일당이 20원이었거든요.”
“허……. 20원? 부산도 일당을 그마이 짜게 주진 않는데…….”
“금 사장 개새끼가 그렇죠, 뭐.”
아진이 담배를 휘휘 흔들며 말했다. 맛도 모르겠고, 목은 따끔한 게 영 별로다만. 그래도 야금야금 타는 걸 보는 건 좋았다. 솔솔 피어오르는 연기도 좋은 눈요깃거리였고.
갑작스러운 비속어에 명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또 껄껄거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