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55화 (5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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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새끼들이 뒷집에서 뭘 만드는지, 약이 어디 있는지 어찌 알고?”

    석주가 자신의 앞머리를 마구 쓸어 올리며 반론했다.

    “그야-”

    “약이 매일 몇 kg씩 있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서 나오는 날이 정해져 있는데. 한 번 왔던 중호파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우리 중에 프락치가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입니까?”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오지 않았어야 하는 말이었다. 배신. 석주는 그것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 가설에 무게를 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명진아. 식구들 의심하면 한도 끝도 없다. 지금 여기 있는 애들이 어디 하루 이틀 같이한 애들이냐. 내가 암만 애들 방까지 뒤졌기로서니, 그게 진짜 의심돼서 한 일이겠냐 이 말이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근데 그카면 아무리 생각해도 진걸이 그놈밖에 없는디요.”

    석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목을 꽉 옥죈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밖에 없는데…….”

    “그럼 당장 처리하시죠?”

    “처리한다고 사라진 약이 나타나겠냐.”

    “그래도, 시팔, 일케 거나하게 엿을 멕였으면 혼은 나야지예.”

    석주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다. 진걸의 몸을 난도질하고 토막 내어도 약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분은 좀 풀릴 것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석주의 머리로는 진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석주가 푼 넥타이를 돌돌 말며 명진을 불렀다.

    “명진아.”

    “예.”

    “만약에 내가 너를 중호파에 프락치로 심었다고 치자.”

    “예?”

    “예를 들어 말이야.”

    “아, 예.”

    “그럼 네가 그들의 신임을 얻을 때까지, 큰일을 도모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으라 하겠냐. 아니면 들어가자마자 약을 빼 와라, 장부를 훔쳐 와라, 두목 목을 따 와라, 하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을 시키겠냐?”

    “어…….”

    명진이 까만 하늘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러더니 턱 아래에 난 흉터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썼다. 석주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한 모양이었다.

    석주가 그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의문을 이어 갔다.

    “진걸이는 나 대신 칼까지 맞아 가면서 들어왔다. 병원에 몇 달이나 혼수로 누워 있었지.”

    “예. 그랬지요.”

    “오장육부를 질질 흘리면서까지 태회파에 들어오려 한 게 미친놈 같다만, 어쨌거나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의심은 하고 또 해서 나쁠 게 없지.”

    “…….”

    “근데 그렇게 아득바득 들어와서 한 게 약 훔치기였을까? 약이라면, 돈이라면 중호파도 이미 넘치게 있는데 말이다.”

    “…….”

    “설사 그렇다 한들, 훔쳐서 중호파 갖다 줬으면 냅다 도망쳐야지. 굳이 여기까지 다시 기어들어 왔을까?”

    “…….”

    “여기로 돌아오면 뒤질 게 뻔한데?”

    석주가 먼 거리에 보이는 창고를 바라봤다.

    부엌과 정반대 편에는 주차장이 있다. 그곳 끄트머리엔 창고 두 개가 붙어 있는데 하나는 총과 칼을 비롯한 무기들이 수납되어 있었고, 또 한 곳은 임시로 비워 두었다.

    지금 진걸은 곤죽이 되어 그곳에 갇혀 있었다. 총을 든 조직원 하나가 그 앞에 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지키고 있었고.

    명진이 석주를 따라 창고를 바라봤다.

    “우리가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걸 노리고 한 거면 어쩝니까?”

    “글쎄. 박기헌이 얼마만큼이나 똑똑한지 알 수가 없네. 그래도 프락치를 심어 놓자마자 일을 시킬 만큼 빡통처럼 보이진 않았단 말이지…….”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답을 찾는 게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석주와 명진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진은 창호지로 새벽이 파랗게 스며 올 때까지 자다 깨길 반복했다. 도무지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분명 바닥이 뜨끈뜨끈한데, 이불도 도톰하니 잠을 자기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인데. 한 시간 꾸역꾸역 자다 깨고, 또 자다 깨길 반복했다.

    너무 춥다. 뺨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발도 시렸고, 코끝도 차가워져서 손으로 감싸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가을이라지만 겨울은 아직 멀었거늘. 뭐가 이렇게 춥고 으슬으슬한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한참 뒤척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석주가 없어서 그렇다는 걸.

    저를 껴안고 자던 뜨거운 품이 없어 잠이 오지 않는 거였다. 목덜미와 귓가를 스치는 그의 잔잔하고 후끈한 숨결과 배와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커다란 손이 그리웠다. 오죽하면 그가 좆을 끼우고 자던 허벅지 사이가 허전할 정도였다.

    아진이 손을 내려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끼웠다. 그제야 조금 안정감이 들었다. 그마저도 석주의 고추에 비하면 홀쭉했지만.

    잠자기를 포기한 아진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허공을 응시했다. 석주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집 어디에 있는지, 아니면 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또 진걸은 어떻게 된 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궁금했다.

    “5천만 원이 없어진 거면 진짜 큰일인데…….”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아진은 석주가 화를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웠다. 돼지의 팔을 자를 때나 중호파가 왔을 때나 얼굴이 굳어 있긴 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이번엔 정말 화가 났을 것이다.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아진이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올리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삐걱삐걱, 마루 밟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이 빼꼼 얼굴을 쳐들었다. 설마 석주인가. 아니면 어수선한 틈을 타 잠입한 괴한인가.

    그의 커다란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가는데. 방문이 열렸다. 조명이 꺼져 어둑한 복도를 등진 석주가 서 있었다. 아진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사장님?”

    “어, 깼어? 미안해. 더 자.”

    석주가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셔츠를 풀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 탁, 하고 욕실 문이 닫히더니 세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

    눈을 끔뻑이던 아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 안에 환히 불을 밝혔다. 농을 뒤져 새 셔츠를 꺼내고, 양말과 타이도 꺼냈다. 정장 재킷도 곱게 빼내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가지런히 걸린 두루마기도 탁탁 펼쳐 널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절로 몸이 움직였다. 평생 윗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온지라 이런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아진이 석주의 옷가지 준비를 마쳤을 때쯤, 석주가 욕실에서 나왔다. 이 추위에 찬물로 씻은 건지, 한기가 훅 들이닥쳤다. 단단하고 굴곡진 나신이 온통 축축했다. 검은 머리칼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진이 얼른 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빤히 보던 석주가 손을 뻗어 받았다.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스몄다.

    “고마워.”

    “바로 출근하세요?”

    “응.”

    “약은…… 못 찾았나 보네요.”

    “……그래.”

    석주가 머리를 마구 털며 농으로 향하는데. 아진이 미리 빼놓았던 셔츠를 가리켰다. 석주가 그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진은 내내 그의 곁을 서성거리며 시중을 들었다. 젖은 수건을 받고, 셔츠 깃을 정리해 주었다.

    평소의 석주라면 왜 이렇게 살갑게 구냐, 예쁘다, 아침부터 좆이 먹고 싶은 거냐, 출근 못 하면 명진이가 짜증 낸다, 입술 좀 빨자, 하며 치근덕거렸을 텐데. 오늘은 굳은 표정으로 출근 준비만 했다.

    덕분에 아진의 기분도 함께 가라앉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약…… 다시 만드는 데 오래 걸려요?”

    “5kg 채우려면 이 주쯤.”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 정도면 약 사기로 한 사람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그에 석주가 피식 웃었다. 아진이 그의 눈치를 봤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나 싶어서.

    손목시계를 찬 석주가 아진이 들고 있던 정장 재킷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아진의 머리를 크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으면 좋겠네.”

    “그럴 거예요.”

    석주가 고개를 숙여 아진의 입술 전체를 빨았다가 놨다. 그리고 반걸음 물러났다가, 아쉬워서 다시 다가갔다. 그가 아진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지그시 눈을 맞췄다.

    “오늘 안 들어올지도 몰라.”

    “왜, 왜요?”

    “만날 사람들이 많아서.”

    아진의 얼굴 위로 우중충한 먹구름이 드리웠다. 또 혼자 자야 한다니. 밤새 홀로 오들오들 떨 걸 생각했더니 벌써부터 밤이 두려웠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데, 석주가 그의 뺨을 검지 뒤쪽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무서우면 꽃님이 아줌마 불러다 같이 자.”

    “뭐, 뭐가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아진이 눈을 홉뜨며 말했다. 석주가 킥킥 웃었다. 담배와 라이터를 한 손에 모아쥐고 팔에 두루마기를 걸친 그가 문으로 향했다.

    “간다. 식사 거르지 말고.”

    “……사장님도요.”

    “그래. 나오지 마. 추워.”

    석주는 따라 나오려는 아진을 만류했다. 그러고는 잘 다녀오라, 인사할 틈도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정장에 두루마기를 걸친 조직원들이 보였다. 석주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진이 뚜벅뚜벅 멀어지는 석주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는데.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 * *

    석주는 사흘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명진과 조직원들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금 말단 조직원이 집에 들러 양말과 속옷을 비롯한 옷가지들을 챙겨 나갔다. 그럼 종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르르 몰려가 주먹밥이나 김밥 같은 걸 바리바리 싸 주었다.

    조직원이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집을 나섰다. 종들은 멀어지는 그를 쓸데없이 아련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진은 그들을 따라 나와 기웃거렸다. 혹 석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허나 조직원은 별다른 말 없이 떠나갔다. 대문 밖으로 사라진 자동차를 보던 종들이 쑥덕거렸다.

    “태회파 망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고작 약 좀 없어진 것 가지고…….”

    “그게 어째 고작이야. 5천만 원이 없어졌다고 하잖어. 그럼 망하는 거지!”

    “씁……. 그런가? 아, 망하면 안 되는데. 여기가 좋은데.”

    “그치? 여기만큼 일당 잘 쳐 주는 곳이 없어. 일이 힘든 것도 아니고…….”

    “깡패 놈들이 생긴 게 험상궂어서 그렇지, 우리한테 욕을 하나 손을 올리나. 아주 양아치는 아니잖어?”

    “그렇지. 중호파 놈들에 비하면 점잖은 수준이지. 어휴……. 난리 난 게 얼른 수습이 돼야 할 텐데.”

    “아, 근데 진걸이 그놈은 아직도 창고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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