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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진걸이 밉더라도 그의 팔이 잘리는 걸 두 눈으로 목도하고 싶진 않았다. 상황을 보아 팔만 잘리면 다행이지, 어쩌면 목이 썰릴지도 모르는데. 그 징그러운 걸 어떻게 보나.
부르르 몸을 떤 아진이 꽃님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줌마. 우리도 들어갈까? 나 아줌마한테 줄 거 있는데.”
“…….”
“실은 사장님이 약과 줬거든. 엄청 맛있어. 아줌마 것도 빼놨어. 가자.”
“…….”
“……아줌마?”
대답 없는 꽃님에 아진이 연신 그를 불렀다. 꽃님은 입을 꾹 다문 채 석주와 진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현실을 넘어서 또 다른 것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아진에겐 익숙한 눈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 아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석주의 미래를 보는 걸까. 아니면 진걸의 미래를 보는 걸까. 그도 아니면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는 걸까.
그때, 조직원 다섯이 저 멀리서부터 뛰어왔다. 그들의 손엔 손전등이 들려 있었으며, 하나같이 머리가 땀에 폭삭 젖어 있었다. 그들은 곧장 석주와 명진의 앞으로 가 상황을 보고했다.
“뒷산 주변에도 없습니다.”
“쥐새끼 하나 없습니다. 발자국이나 흔적도 못 찾았습니다.”
“금태가 마지막으로 약을 확인한 게 오후 다섯 시랍니다. 없어진 걸 안 게 여섯 시 반이고. 그 후로 집 밖으로 나간 사람도, 사라진 사람도 없다 카이까 분명 집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5kg이 암만 적어도 사람 대가리보다 큰데. 숨기 놨다면 분명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진걸을 한 번 보고, 땀에 젖은 조직원들의 얼굴을 한 번 본 그가 마지막으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종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찾아. 집 어디를 뒤져도 좋으니까.”
석주의 검은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수색은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이어졌다. 조직원들은 부엌과 다실, 대청마루와 마루 아래, 그리고 본인들의 방까지 뒤졌다. 석주가 그렇게 명령했다. 조직원들의 방부터 뒤지고, 그 후에 종들의 방을 뒤지라고.
종들에게 명분과 신의를 주는 거였다. 너희들 것만 뒤지는 게 아니라는, 너희들만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신의 말이다. 그 때문에 종들은 불만조차 삐죽이지 못했다.
조직원들은 종들의 방을 뒤지며 진걸의 짐을 뒤질 때만큼 험상궂게 굴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무언갈 찾아 헤집는 건데 방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옷가지며 남세스러운 속옷에 은근히 꿍쳐 둔 육포나 돌돌 말아 둔 돈, 납작하게 눌린 담배 같은, 죄는 아니지만 남에게 보여 주기 부끄러운 것들이 한가득 나왔다.
수치심을 삼키지 못한 종들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덩치 좋은 조직원들이 그들 사이를 나돌며 약을 본 적이 있는지 혹 수상한 자를 봤는지 캐물었다.
종들은 입을 딱 다문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알아도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가 나돌았다. 불쾌함을 느낀 것이다.
그에 조직원 하나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아, 글고 오늘 일로 상처 난 옷이나 패물이 있으면 사장님이 두 배 가격으로 물어 준다 하시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요. 어질러 놓은 거 정리하는 것도 일이라고 인당 오십 원씩 일당도 더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그 말에 종들의 얼굴이 대번 폈다. 곁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아진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었다. 도박장에서 사람들을 죄 빼 왔을 때부터 느끼는 거지만, 석주는 사람 다루는 법을 안다.
종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우물쭈물 한두 마디씩 내놓았다.
“뭐…… 딱히 본 건 없는데…….”
“수상한 사람도 못 봤어요. 여기로 옮겨 온 지가 벌써 몇 달인데. 우리끼리도 그렇고, 깡패, 아니 거기 형님들도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아는데. 수상한 사람이 있었으면 대번에 티가 나지.”
“맞아. 별다른 일도 없……, 아! 그래! 불 날 뻔했잖아. 아까 사장님 퇴근하기 전에.”
“어, 어어! 맞어. 저기 부엌 옆에 창고 있잖아요? 거기에 세상에, 불이 붙었지 뭐야.”
“불이요?”
“그래요. 사장님 오기 한 삼사십 분 전이었으니까 다섯 시 반이나, 뭐 그 비슷한 시간이었을 거야.”
“응. 근데 큰불은 아니었어. 꽃님이 아줌마가 일찍 발견했거든. 화르륵 하면서 대번에 시뻘겋게 불이 올라오길래 아줌마가 불이야!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설거지하던 대야를 냅다 갖다 엎었어.”
“그 소란에 놀라서 우리가 다 뛰어나갔지.”
“창고 뒤쪽으로는 다니는 사람도 없고, 녹슨 쟁기 같은 것만 있어서 거기는 잘 안 쓸 거든요? 그래서 마른 낙엽이 잔뜩 쌓여 있어요. 거기에 불씨가 옮은 모양이야.”
“누가 부러 불을 지른 건 아이고요?”
“아, 언 미친놈이 불을 질러, 지르긴. 못된 심보였으면 창고가 아니라 집에 불을 질렀어야지.”
“맞아요. 바깥 가마솥에서 된장찌개 끓이고 있었는데 거기 불씨가 옮은 게 아닌가 싶은데. 원래 가을엔 산불이 많이 나잖아요. 습기도 없고, 낙엽은 많고, 바람은 많이 불어서.”
“그렇지, 그렇지.”
술술 나온 의심스러운 상황에 조직원이 굳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런저런 탐문을 더 하다가 석주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들은 것을 소상히 일러바쳤다.
아진은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석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직원을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온 문이 활짝 열린 종들의 방을 바라봤다. 아진이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진이 묵는 사내종들의 방이 풍비박산이 나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여기저기를 들쑤셔 댔다. 서랍장을 엎고, 농을 뒤지고, 이불을 펼쳐 퍼덕거리고, 먼지가 뭉쳐 있는 농 뒤쪽도 꼼꼼히 확인했다.
그때, 조직원 하나가 꽉 닫힌 서랍장 문고리를 쥐었다. 순간 석주의 눈살이 잔뜩 구겨졌다. 아진의 서랍장이었다.
조직원이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데, 곁에 있던 다른 조직원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무어라 숙덕거렸다. 그러자 조직원이 냉큼 서랍장에서 손을 떼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구겨졌던 석주의 낯이 펴졌다.
“…….”
그것을 본 아진이 아랫입술을 꾹 짓씹었다. 잠시 무언갈 고민하던 그가 절뚝절뚝 사람들을 헤치고 나갔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다, 그가 댓돌 위로 올라서는 순간에야 모두 그를 바라봤다.
아진은 신발을 툭툭 대충 벗어 던지고는 마루 위로 올라갔다. 그의 낡은 신발 한 짝이 댓돌 아래로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아진은 그것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덩치들 사이를 배회하는 마른 몸이 더욱 작고 왜소해 보였다.
아진은 혼자만 멀쩡한 자신의 서랍장 앞에 섰다. 그리고 서랍을 드르륵 빼더니 망설임 없이 휙, 뒤집었다.
볼품없는 옷가지들이 와르르 떨어졌다. 하나같이 낡고 꾀죄죄한 것들이었다. 봐 줄 만한 거라곤 석주가 사 준 잠바가 다였다. 삐뚤빼뚤 글씨가 적힌 공책과 연필, 쟁여 두었던 초콜릿 따위가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서랍장도 고작 한 칸이 다인 아진은 떨어진 옷가지 중에 가장 희고 빳빳한 옷 하나만 주워 방을 나왔다. 먼 옛날. 석주와 처음으로 밤을 보냈던 그날. 석주가 제게 입혀 주었던 그의 셔츠였다. 언젠가 다시 줘야지, 했는데 여태 갖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 아진을 바라봤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마루에 철퍼덕 앉아 신발을 신으려 했다. 그때. 기다란 그림자가 아진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석주였다.
아진의 앞에 쪼그려 앉은 석주가 굴러간 신발을 주워 왔다. 그러곤 댓돌 위에 곱게 올려 두고, 신발 입구를 벌려 주기까지 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진이 그곳에다 발을 끼워 넣었다.
“넌 의심 안 해. 그러니 안 그래도 된다, 아진아.”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아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저도 같은 종인걸요. 여지 남겨 두고 싶지 않아요. 괜히 뛰어넘었다가 나중에 사장님이 혹시, 하고 잠깐이라도 저 의심하면 어떡해요.”
“안 그래.”
“사장님이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그럴지도 몰라요. 저 다리 병신 놈이 훔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서랍을 뒤져 봐야 했는데. 그렇게 쑥덕거린다고요.”
“하……. 별생각을 다 한다.”
“분명 그럴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원대로 뒤엎었으니 인제 그만 방에 들어가 있어. 추워.”
석주가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설핏 웃었다.
“사장님은요?”
“더 찾아보고. 먼저 자도 돼. 아, 저녁. 저녁 안 먹었겠구나. 부엌 가서 먹고 가. 꽃님이 아줌마랑 약과도 먹고.”
“……네.”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이거, 셔츠는 사장님 방에 갖다 둘게요.”
“그래.”
아진은 석주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절뚝절뚝 마당을 가로질러 멀어졌다. 종들이 그런 아진과 석주를 흘끔흘끔 번갈아 봤다. 그들은 입이 근질거리는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용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진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석주는 고개를 돌렸다. 때를 기다리던 명진이 얼른 다가왔다.
“형님. 아무래도 집 안에는 없는 것 같은데 우짜요……. 아, 열불이 나 속이 터질 것 같습니다. 언 겁대가리 없는 새끼가 이런 짓을 합니까?”
“그러게.”
“저번에 왔던 중호파 짓일까요? 불 질러 놓고 그 난리 통에 이미 갖고 나른 거 아입니까?”
그 말에 석주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간만의 분노와 짜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근에는 아진과 붙어먹느라, 그를 껴안고 자느라, 그에게 먹을 걸 사다 바치느라 그저 행복했거늘. 갑작스레 닥친 사건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행복을 강탈당한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아진은 여전히 제 방에 있고, 언제든 그를 안고 잘 수 있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