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석주는 명진과 함께 나갔다. 방에 혼자 남은 아진은 잠깐 석주를 걱정하다가 이내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뒷집이라면 약 만드는 공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다 한들, 이곳은 태회파의 본거지이고 사방에 조직원이 득실거리는데 석주가 다칠 일은 없지 않겠나.
뭐 약 만드는 일에 문제가 생겼겠지. 환풍기가 먹통이 됐다거나, 기계가 고장 났다거나, 재료가 부족하다거나. 뭐가 됐든 아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진은 소파 아래로 늘어트린 발을 까딱이며 사진을 구경했다. 제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뜯어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했다.
“그렇게 못 봐 줄 생김새는 아니네, 뭐. 병신 티도 안 나고.”
아진이 입술을 실쭉거렸다. 꽃님이 맨날 바보 등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아주 엉망으로 생긴 줄 알았는데. 석주보다 사내답지 못해서 그렇지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한동안 사진을 뜯어보던 아진은 석주가 내려놓고 간 단체 사진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의 큼지막한 눈이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했다. 맑은 눈동자가 사진 속 자신과 진걸을 번갈아 봤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그가 별안간 눈을 번뜩였다. 무슨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아진이 석주의 서재로 향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그득히 쌓인 서류를 한쪽으로 조심히 밀고, 단체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연필꽂이에 꽂혀 있던 봉투 칼을 빼 들었다.
아진은 사진 한쪽을 공들여 잘라 냈다. 눈에 거슬리던 또 다른 쪽도 잘랐다. 그리고 그것의 위치를 바꾸어 풀로 붙이고, 잘 마르라고 후후 불었다. 그렇게 완성된 사진은 퍽 마음에 들었다.
사진을 든 아진이 석주의 방을 크게 둘러보았다. 그러다 큼지막한 서랍장을 발견했다. 석주가 시계와 넥타이 등을 모아 두는 서랍장이었다. 위에는 도자기와 탁상용 시계, 수북이 쌓인 라이터, 낮은 조명등 같은 게 올라가 있었다.
아진은 그곳에다 사진을 곱게 세워 두었다. 석주와 단둘이 찍은 사진도 한쪽에 곱게 뒀다. 근데 자꾸 넘어져서 라이터 하나로 고정도 시켜 놓았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아진이 사진을 쳐다봤다. 이내 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아진은 깜빡 잠이 들었다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불이 훤히 켜진 방엔 아진 혼자였다. 시계는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진이 그 시계를 희한하다는 듯 바라봤다.
뒷집에 일이 생겼다는 명진의 말에 석주가 나간 게 여섯 시 조금 넘어서다. 그 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진은 그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고. 그러다 열 시가 훌쩍 넘은 이제야 눈을 뜬 것이다.
“밥 먹어야 하는데…….”
아진이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저만 빼고 식사한 건가. 석주도? 아니 왜 깨우지도 않고…….
섭섭한 마음에 아진이 비죽 입술을 내밀며 눈을 비비는데.
쿠당탕!
바깥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아진이 움찔 어깨를 튕겼다. 아진은 그제야 자신이 소음에 깼음을 상기했다.
욕실로 간 아진이 창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대청마루도, 대청마루 앞마당도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욕실을 나온 아진이 이번엔 창호지 문을 열었다. 왼쪽 마당이 보였다. 그곳도 텅 비어 있었다. 드문드문 켜진 조명이 다였다.
“음…….”
아진이 목으로 신음했다. 그때, 또 콰당탕!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소리치는 누군가의 고함도 들렸다. 아진은 보통 일이 난 게 아님을 짐작했다. 어쩌면 석주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진이 다급하게 석주의 방을 나섰다.
소음의 시발지는 오른쪽 마당이었다. 드문 일이었다. 집의 오른쪽 열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직원들의 방만 있었다. 헌데 그곳에서 소란이라니.
아진은 마루를 돌아 큼지막한 나무 뒤로 숨어서 마당으로 내려왔다. 사람들과 조직원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어 무슨 일이 있는지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씨발놈아! 사실대로 말 안 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누구 목소린가 했더니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명진이었다.
아진은 가뜩이나 마른 몸을 더욱 웅크리며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곧 사건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진걸이었다. 코피가 터지고, 눈 한쪽이 띵띵 부은 게 된통 얻어맞은 낯짝이었다.
그는 무릎 위에 주먹을 올린 채 정면에 서 있는 명진과 석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슷한 모양새로 잡혀 왔던 돼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겁을 먹지도 않았고, 살려 달라고 우짖지도, 그렇다고 잘못했다고 빌지도 않았다. 주변의 조직원들이 제각각 회칼과 각목 따위를 들고 있는데도 그랬다.
진걸이 손등으로 피가 흐르는 입술을 벅벅 닦았다. 그리고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뒷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거기서 뭘 하는지, 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
“안 알려 주셨으니까요.”
“…….”
“제가 태회파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곤 식구들 이름 외우기, 회사로 국밥 나르기, 회사 2층에 고장 난 전등 갈기, 구둣방에 형님들 구두 맡기기, 그리고 오늘 사진점에 가서 사진 찾아오기가 답니다.”
“…….”
“오후에 잠깐 사라졌던 건, 구둣방에 구두 맡기러 간 거였습니다. 원래 가던 종로 구둣방 사장이 문을 안 열어서 다른 곳에 갔다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던 거고요.”
“…….”
“하지만 의심받는 거, 이해합니다. 제가 가장 늦게 들어왔고, 온 지 2주 만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진걸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주가 그런 진걸을 무표정한 낯으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반면 명진은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가 분하다는 듯 씩씩거리며 눈알을 부라렸다.
“저 새끼가 지금 잡일 시켰다고 짜증 내는 거 아입니까, 형님?”
“…….”
“씨발놈이, 거두고 입히고 먹여 줬더니……. 오만방자한 새끼. 낯짝에 철판 깐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팔부터 자를까요? 이번 건 큰 건이니까 팔만 잘라선 안 될 것 같지예?”
석주는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그저 뚫어지라 진걸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명진은 답답한 듯했으나 석주를 재촉하진 않았다.
아진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진걸이 두들겨 맞은 건 환영할 일인데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석주와 진걸을 번갈아 보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손목을 쥐고 당겼다. 아진이 휙 뒤를 돌아봤다.
꽃님이었다.
“어디 있었어?”
“사장님 방에 있었지.”
“계속?”
“응.”
“사장도 그걸 알아?”
“알지.”
아진이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쥐며 몸을 붙였다. 꽃님이 투박한 손으로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진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약이 없어졌대.”
“약? 무슨 약? 필로폰?”
“그래. 그거. 너 아는 거 없어?”
“내가 뭘 알아? 나 종일 방에서 싱글벙글만 썼는데.”
“뭔 소리야?”
“아이참, 글공부했다고.”
아진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또 콰지직! 소리가 났다. 훤히 열린 창호지 문을 통해 가구가 던져졌다. 아진보다도 큰 농이었다. 그게 마당으로 엎어지자 곁에 있던 조직원들이 그것을 마구 도끼로 깨부쉈다.
서랍장이 부서지고 진걸의 짐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흙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조직원들은 도끼로 옷을 헤치며 약을 찾았다. 진걸은 그것을 남 일인 듯 무심히 보고 있었다.
“……그걸 진걸이 새끼가 훔쳤다고?”
아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개새끼인 건 알고 있었지만, 겁도 없는 상 등신이었단 말이야? 그가 다시 진걸을 바라보는데. 주변에 있던 종들이 쑥덕거리는 게 들렸다.
“약이 얼마나 없어졌다고?”
“5kg이라던데?”
“애걔, 고작? 그것 가지고 저렇게 쩨쩨하게 사람을 잡는겨? 환영회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애걔라니. 팔 땐 1g씩, 아니면 3g씩 아주 쥐똥만큼 떼서 판다더니만? 근데 5kg이 사라졌으니…….”
“1g씩 팔든, 3g씩 팔든, 어쨌거나 5kg이면 적지 않어?”
“이 사람아. 뽕 5kg이 쌀 5kg 값일까 봐? 아까 조직원들이 하는 말 들었는데 5천만 원이래.”
“5천 원? 아이고야, 비싸네, 비싸.”
“아니, 5천만 원!”
“……5, 5천만 원? 세상에 그런 돈이 어디 있어? 난 그런 돈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약값이 5천-만 원이라고? 5만 원도 기함할 판에? 5천만 원?”
“그러니까! 분위기가 심상찮은 이유가 있다니까. 5kg이면 만 명도 넘게 약을 빨 수 있는 양이라더니만?”
“허……. 만 명? 약쟁이가 그렇게 많아? 그 많은 인간이 약 빨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텐데, 그게 홀라당 사라졌으니 난리가 날 만도 하네…….”
아진이 입을 떡 벌렸다. 주변에 있던 다른 종들도 입을 벌렸다. 5천만 원이라니. 그런 돈이 실제로 존재하는 돈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석주에게 받았던 5천 원도 아진의 인생에서 가장 큰돈이었는데. 그에 곱절에 곱절에 곱절에 곱절……, 아무튼 그런 돈이라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만도 했다.
아진이 꽃님의 손을 꾹 잡는데, 또 우당탕!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종들이 다 같이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다시 쑥덕거렸다.
“나 같으면 저렇게 사람 잡고 있는 동안 다시 만들겠다.”
“당장 다음 주에 해외로 보내야 하는 약이었대나 봐. 근데 그게 없어져서 사장이 아주 난감한 거지.”
“난감해? 저 양반이 난감할 일도 있어? 씁, 많이 큰일인가?”
“암. 큰일이지. 그냥 방직 공장이라도 납품 날짜 못 맞추면 계약이 어그러진다고. 근데 한두 푼도 아니고 5천만 원치가 빵구 났으니……. 사장이 미치고 팔짝 뛸 만도 하지…….”
“그러게. 얼굴이 영 시궁창이네. 돼지 놈 팔 자를 때도 아무렇지 않던 양반이. 지금은 꼭 악귀라도 쓰인 얼굴이구먼…….”
“무서운데. 만약 진걸이 저놈이 범인이면 또 팔 자르는 거 아냐? 아이고, 끔찍해.”
“그러게. 들어갈까? 괜히 불똥 튀면 어째?”
“그래. 들어갑세.”
나불거리던 종들이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다른 종들도 꾸물꾸물하다가 하나둘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