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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방에 있으려니 몸이 비비 꼬였다. 식사 때마다 쫄래쫄래 부엌에 가 밥만 먹고 오는 것도 영 눈치가 보였다.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종들이 냉큼 꺼지라고 했다. 제 손에 물을 묻히면 사장님에게 혼쭐이 난다나.
“그냥 떡을 좀 적당히 치면 될 텐데. 그 소리는 죽어도 안 하지…….”
하여튼 이상한 사장님이야……. 걱정하는 척은 엄청 하면서 좆질만 하면 짐승처럼 군다.
아진이 아직도 지끈거리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입술을 삐죽이는데. 문 너머로 끼이익, 하고 묵직한 무게가 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발소리도 이어졌다.
아진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서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펄럭거리는 두루마기 자락이 나타나고, 칼주름이 선 정장 바지가 보였다. 아진은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꾸벅 허리부터 숙였다.
“사장님, 오셨어요.”
“응.”
석주가 빙긋, 그러니까 국어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리 없이 입만 닁큼 벌려’ 웃었다. 아진이 그를 따라 싱글싱글 웃었다. ‘천연스러운 태도로 귀엽게 눈웃음을 치며’ 웃는 모습이었다.
아진이 오늘 배운 단어를 머릿속으로 복습하는데. 두루마기를 벗어 던진 석주가 그의 허리를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제 로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집에 오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피곤해서요?”
“아니. 너 보고 싶어서.”
“…….”
“요즘 종일 네 생각밖에 안 나. 약도 안 빨았는데 약 빤 것 같다니까.”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아진의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손을 내려 엉덩이를 꽉꽉 쥐었다가 놓기도 했다. 이제 엉덩이가 주물러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아진은 태평한 낯으로 그에게 안겨 있었다.
“또 공부하고 있었어?”
“네.”
“오늘은 뭐 배웠는데?”
“<우리말의 아름다움>이요.”
석주가 기특하다는 듯 아진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이거 원. 남이 보면 진짜 아들이라고 오해할 만도 하겠다. 근데 기특한 걸 어쩌나.
잠깐 아진을 떼어 낸 석주가 품에서 무언갈 꺼냈다. 그러고는 퇴근한 아빠가 자식의 품에 통닭이라도 안겨 주듯, 아진에게 내밀었다. 하얀 종이봉투였다. 봉투가 빵빵하고 기름 자국이 스며 있는 게 먹을 것 같았다.
아진이 냉큼 그것을 받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윤기가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꽃 모양 약과가 들어 있었다. 아진의 얼굴이 환하게 갰다. 광대가 볼록 올라오고 입은 크게 벌어졌다.
“우와…….”
“종로 거리에 유명한 한과집이 있는데, 명진이가 아주 맛있다더라. 그래서 사 왔어. 약과 좋아하냐? 별로면 내일은 한과를 사다 주마. 엿이랑 강정도 팔더라.”
“약과 좋아요! 저는 초콜릿보다 약과가 더 좋아요.”
아진이 종이봉투 안으로 손을 넣으며 웃었다. 석주가 덩달아 웃었다.
“그래? 초콜릿이 더 달지 않냐?”
“초콜릿은 다 먹고 나면 속이 허한데 약과는 배가 부르잖아요.”
“푸흐…….”
“물론 약과 먹고 초콜릿도 먹으면 금상천화겠지만…….”
“금상첨화.”
“네. 금상첨화.”
“이제 어려운 단어도 아네.”
“쓸 줄은 몰라요.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거지.”
“그래도. 기특해.”
석주가 선 채로 약과를 먹으려는 아진을 당겨 소파에 앉혔다. “문은 왜 열어 뒀어. 춥게.”라고 하며 창호지 문을 꼭꼭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진은 종이봉투에 얼굴을 박았다. 다 똑같이 생겼는데 뭘 먹을까 고민하다 개중 가장 반짝반짝한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석주의 입으로 먼저 가져갔다. 그의 곁에 앉은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베어 물었다. 아진은 석주의 잇자국이 난 부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크게 물었다.
달큼한 맛이 났다. 겉은 끈적하면서 딱딱한데, 안은 쫀득하면서도 퍼석한 게 일품이었다. 아진의 어깨가 행복으로 올라갔다. 그는 야금야금 부지런히 약과를 먹어 치웠다. 앉은 자리에서 세 개를 먹는 데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석주는 간간이 아진이 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씰룩씰룩 움직이는 그의 볼을 구경하고 있었다. 약과를 먹고 있는 저 하얀 볼을 빨아 먹으면 약과 맛이 나지 않을까, 하는 등신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내 봉투가 가벼워졌다. 아진이 심각한 낯으로 봉투 안을 들여다봤다. 약과가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아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쭙 빨았다가 놓으며 석주의 눈치를 봤다.
“이거…….”
“꽃님이 아줌마 갖다 줘도 돼.”
“감사합니다.”
아진이 히히, 웃으며 종이봉투를 돌돌 말아 싸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귓불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예쁘기는…….
그때, 아진이 소파에서 일어나려 엉덩이를 들썩였다. 석주가 얼른 그를 잡아 자신의 옆으로 끌어왔다.
“어디 가?”
“부엌에요.”
“왜?”
“꽃님이 아줌마한테 갖다 주러…….”
“나중에 가, 나중에.”
석주가 아진의 손에 들린 약과 봉투를 집어 소파 옆에 있던 협탁에 올려 두었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당장 가져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볼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나 방금 왔잖아. 너 보고 싶어서 일찍 온 건데. 약과만 받아먹고 홀랑 가면 나 서운해.”
“이것만 갖다 주고…….”
“서운해.”
“금방 올 건데…….”
“서운해.”
“…….”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석주가 씩 웃으며 아진의 허리와 팔뚝을 주물렀다. 그러다 아, 하며 바닥에 늘어트려 놓은 정장 재킷에서 무언갈 꺼냈다. 아진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또 뭐 맛있는 걸 주려나, 싶어서.
근데 이번에 나타난 건 납작한 황색 봉투였다. 아진의 낯에 실망이 스쳐 갔다. 금세 흥미를 잃은 그가 고개를 돌리는데, 석주가 그의 앞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사진 나왔어. 볼래?”
그에 아진의 고개가 다시 석주 쪽으로 홱 돌아왔다.
“환영회 때 찍은 사진이요?”
“응.”
석주가 봉투를 열어 사진을 꺼냈다. 아진이 석주의 허벅지 위로 반쯤 올라가다시피 하는데, 석주가 그의 손에 사진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아진을 들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혔다.
아진이 호오, 소리를 내며 사진을 구경했다. 색 하나 없이 검고 희기만 한 사진 속엔 익숙한 얼굴이 가득 들어 있었다. 뒤로 널찍하게 보이는 석주의 집 아래로 줄줄이 선 사람들이 제가 아는 그 사람들이라니. 신기했다.
아진은 가장 먼저 석주를 찾았다. 한가운데에 널찍한 어깨를 자랑하며 서 있는 석주는 지금 저를 안고 있는 석주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분명 가늘게 미소 짓고 있는데도 딱딱한 유리 인형처럼 느껴졌다. 플래시가 터지면서 높다란 콧대와 또렷한 눈매가 모호하게 뭉그러져서 그런 것 같았다.
“사장님은 사진으로 봐도 잘생겼네요.”
아진이 손끝으로 석주를 톡톡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석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그의 입꼬리가 한껏 위로 솟구쳐 있었다.
“네. 그래도 실물이 훨씬 나아요.”
그 말에 석주는 히죽 웃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체통 없이 잘생겼다는 소리에 히죽거릴 순 없었다.
아진은 뒤늦게 사진 속에서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헌데 너무나도 시선을 끄는 이가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비죽 내민 명진이었다. 아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아, 명진이 형님 눈 감았어요!”
“안 그래도 그거 보고 다시 찍어야 한다고 방방 뛰었어.”
아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명진 아래에 서 있는 진걸도 보였으나 필사적으로 못 본 척했다. 처웃고 지랄이야, 하고 속으로 생각하긴 했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을 발견했다. 걱정했던 것만큼 이상하진 않았다. 몸도 똑바로 서 있었고, 눈도 뜨고 있었다. 어색하긴 하나 웃고 있긴 했다. 근데 어쩐지 영…… 인간 같지가 않았다. 눈코입이 희미하고 얼굴색도 어두운 게 집에 우환 있는 애 같았다. 끄트머리에 서 있어서 더 그랬다. 무슨 귀신이라도 찍힌 것처럼.
아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전 잘 안 보이네요…….”
“거리가 멀어서 플래시가 덜 닿았다고 사진사가 그러더라. 그리고 네 얼굴이 너무 작아서 그래.”
“그래도…….”
“크게 뽑은 것도 있는데 거기선 잘 보여. 명진이가 액자에 넣어서 집 여기저기에 걸어 둘 거야. 이따 저녁 먹으러 가면서 봐 봐.”
석주가 단체 사진을 휙 앗아 갔다. 몇 장이나 뽑은 건지 같은 사진이 두툼할 정도로 많았다. 석주는 이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거라고 했다. 비싼 사진인데도 아진은 시큰둥했다. 딱히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주가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또 다른 사진을 꺼냈다. 전 사진은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이번 건 손바닥 하나만 했다.
사진 속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석주와 아진이었다. 아진이 입으로 숨을 담뿍 들이마시며 사진을 두 손으로 잡았다.
사진은 멋졌다. 석주도 저도 눈코입이 또렷하게 나왔다.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도 한 올 한 올 보일 정도였다. 둘 다 정면을 지그시 응시하며 웃고 있는 게 사진에 익숙한 배우 같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석주도, 값비싼 두루마기를 입은 저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아진이 넋 놓고 사진을 보는데, 석주가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것도 열 장이나 뽑았어. 갖고 싶은 만큼 가져. 필요하면 더 뽑으면 되니까.”
아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신난 그가 그렇게 물으려 입을 떼는데. 똑똑똑. 누군가가 석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석주가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형님. 저 명진입니다.”
명진이 큰 목소리로 자신을 밝혔다. 석주가 슬쩍 아진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행여 제가 저도 모르는 새 아진의 옷을 끌었거나 바지를 내렸나, 싶어서. 다행히 아진의 옷차림은 멀쩡했다.
“어, 들어와.”
석주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명진이 술이라도 마신 듯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타났다. 그 얼굴에 석주와 아진이 동시에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뒷집에 문제가 생겼지 말입니다.”
명진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물씬 풍겼다.
“…….”
석주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