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이불 위에 대자로 뻗은 아진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넋이 빠졌다는 게 맞겠다. 대체 몇 번이나 쌌지. 셀 수가 없다.
남세스러운 액체로 범벅된 몸을 씻다가 다시 흥분한 석주가 엉덩이에다 좆을 비비며 자위했었는데, 그 순간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까지 했다.
아진이 헛웃음을 흘리는데. 그런 아진의 입가로 빨대 하나가 슬쩍 다가왔다. 아진이 그쪽으로 눈만 돌렸다. 호리호리한 콜라병에 꽂힌 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석주의 얼굴도 보였다.
얄미웠다. 볼이 아주 새빨개질 때까지 꼬집어 비틀고 싶었다.
그러나 콜라는 강력했다. 아진은 목도 말랐고, 속도 허했다. 저 달고 시원한 것을 마시면 만병통치약을 먹은 것처럼 기력이 돌아올 것 같았다.
아진이 빨대를 물려 고개를 들썩였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콜라를 내려놓은 석주가 아진을 이불로 둘둘 싸맸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양반다리를 한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듯한 자세가 됐다.
그러든 말든 아진은 축 늘어져서 눈만 끔뻑였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입에 젖병을 물리듯 콜라를 갖다 주었다. 아진이 입술만 새 부리처럼 내밀어 빨대를 쪽쪽 빨았다.
석주가 그런 아진을 흐뭇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아진은 야금야금 천천히 콜라를 비워 갔다. 그러다 병이 반쯤 비었을 때쯤, 석주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원래 떡 치는 건 다 이런 거예요?”
“응?”
“원래 이렇게 오래, 여러 번 힘들게 하는 거냐고요.”
“어……. 글쎄…….”
석주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진이 볼을 씰룩거렸다.
“남이랑 떡을 쳐 봤어야 알지…….”
그가 빨대로 콜라를 휘저으며 웅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남이랑 안 해 봤다고요.”
“그래서. 남이랑 하겠다는 뜻이야?”
아진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나. 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받아치려던 그는 입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파랗게 질린 석주의 낯이 꽤 통쾌했기 때문이다.
“음……. 글쎄요.”
“…….”
“뭐, 훗날은 모르는 거니까요. 제가 어여쁜 처자랑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사장님보다 고추 작은 사내가 저를 좋다고 따라다닐 수도 있고. 그럼 혹하지 않겠어요?”
아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맞게 빨대를 다시 입에 물었다.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혼을 하겠다고. 저보다 고추가 작은 사내와 떡을 치겠다고.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같잖은 도발인 걸 아는데 뒤통수가 후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석주가 아진을 고쳐 안았다. 아진의 등과 다리를 감싼 손을 모아 단단히 깍지를 끼기도 했다.
행여 어디서 나타난 고추 작은 사내가 아진을 채 갈까 봐.
석주는 아진이 콜라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그렇게 굳은 얼굴로 있었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흘끔흘끔 보며 킥킥 웃어 댔다. 제가 한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워서.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온 게 맞겠다. 절름발이를 누가 좋아해 주겠나.
물론 사내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아진이 ‘관심’ 혹은 ‘흥미’라 칭할 걸 보인 이는 평생 석주가 다였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인데 그것에 동요하는 석주가 참 재미있었다. 몇 분 전만 해도 향후 일주일은 그의 방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새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아진이 빈 콜라병을 쓰다듬는데. 그의 발을 조물거리던 석주가 감미로운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아진아.”
“네?”
“나랑 평생 이렇게 살자.”
갑작스러운 말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눈가에 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나보다 고추 작은 애가 와도, 예쁜 처자가 와도, 그냥 나랑 살아. 내가 내일 종로 병원에 가서 고추 크기를 어떻게 해야 줄일 수 있는지 물어보마.”
아진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고추 크기를 어떻게 줄이나. 아무리 죽을병도 고치는 세상이라지만, 고추 크기를 늘리면 늘렸지 줄인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고개까지 젖히며 웃던 아진이 눈가로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았다.
“뭘 고추까지 줄여요. 그냥 떡을 안 치면 되잖아요.”
“그건 안 돼. 네가 너무 예쁘잖니.”
석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타구니가 얼얼할 정도로 떡을 쳤음에도 이불 사이로 드러난 아진의 목선이나, 그의 맑은 군청색 눈동자나, 도드라진 분홍빛 복사뼈에 또 성기가 꺼떡거리고 있었다.
근데 떡을 치지 말라니. 고추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아진이 코웃음을 치며 빨대를 물었다. 그리고 바닥난 병을 쓸며 후우웁, 후우웁 단맛이 나는 공기를 빨아 당겼다. 그 작태가 매우 여유로웠다. 석주의 말을 시답잖게 생각하는 듯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발목을 꾹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 아니니 새겨들어.”
“…….”
“네가 나 버리고 간다고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미리 말해 놔야 나쁜 짓 할 명분이 생길 것 같아서 말하는 거다.”
“나쁜 짓요? 사장님이요? 저한테요?”
아진이 또 비실비실 웃으며 되물었다. 장난기 가득한 낯이 어이없으면서도 깜찍했다. 석주는 ‘내가 처음에 너를 어떻게 안았는지, 어떻게 짓밟고 뭉갰는지 기억이 나지 않냐’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걸 상기시켜 봐야 제게 하등 좋을 게 없는 듯해서.
그리고 제가 아진에게 좋은 사람으로 포장돼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석주가 아진을 고쳐 안았다. 그리고 아진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은 채 말했다.
“아진아. 나는 너 안 버려.”
그 말에 콜라병 안을 휘젓던 빨대가 우뚝 멈췄다. 웃음기가 스며 있던 아진의 눈매가 차분해졌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네 부모처럼 널 잃어버리지도 않을 거야. 행여 잃어버린다 해도, 반드시 찾아낼 거다.”
“…….”
“외롭게 하지 않으마. 항상 네 곁에 있으마.”
“…….”
“그러니 나랑 이렇게 살자.”
아진이 석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석주가 그 시선을 우직이 마주했다. 마치 약속하는 것처럼.
흔들림 없이 곧은 눈동자를 보던 아진이 석주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진이 지금껏 경험한 타인의 체온 중에 가장 따뜻한 체온이었다.
그것을 느끼던 아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
“가고 싶은 곳도 없어요.”
“…….”
“여기가, 사장님 집이 제일 좋아요.”
아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평생 미래, 훗날, 그런 것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별거 없을 게 뻔해서 상상할 맛이 안 났다. 비좁고 편협하고 건조하고 딱딱하고 불편한, 그런 삶일 게 분명한데 뭐 하러 시간 들여 상상하겠나.
도박장에서 일하던 아진에게는, 잘하는 거라곤 설거지뿐이던 아진에게는, 제 이름도 쓸 줄 모르던 아진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근데 석주가 자꾸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 예뻐해 주고, 글도 가르쳐 주고, 좋아한다 말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 주면서 연신 분에 맞지 않는 행복을 깨우치게 한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아주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에서 깨지만 않으면, 그 꿈이 현실이 되어 펼쳐질 것 같았다.
떨어진 불씨
이불 속에 있던 아진이 시계를 확인했다. 밤 여섯 시. 곧 석주가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불 속에서 나온 그가 무릎걸음으로 창호지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문을 탁 쳐 열었다. 늦가을 바람이 휑- 하고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쳤다.
부르르 몸을 떤 아진이 얼른 다시 이불 속으로 돌아갔다. 석주가 오기 전에 방 열기를 날리는 거였다. 더위를 많이 타는 그를 위한 아진의 작은 배려였다.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왜 이렇게 춥게 있냐고 걱정할 게 뻔했다.
엎드린 아진이 이불을 어깨까지 당겨 덮었다. 그리고 잠시 놓았던 연필을 쥐었다.
부지런히 공부한 아진은 한 달도 안 돼서 4학년 국어로 올라왔다. 손바닥만 하던 글씨가 콩알만큼 작아졌는데, 가끔 눈앞이 빙글빙글 돌긴 하나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석주가 읽는 책의 글씨 크기와 비슷해져서 그저 뿌듯하기만 했다.
[옛날부터, 웃는 사람에겐 행복이 온다고 했다. 또, 웃는 얼굴만큼 예쁜 얼굴은 없다고도 한다. 오늘은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를 연구해 보기로 하자.]
문단 아래에는 큼지막한 표가 있었다. 아진이 그것을 열심히 따라 썼다. 방글방글, 방실방실, 빙긋, 싱글싱글, 싱긋, 싱글벙글, 해죽해죽……. 익숙한 단어도 있고 낯선 단어도 있었다.
아진은 미간까지 구긴 채 꾹꾹 연필을 눌러 썼다. 그가 막 해죽을 헤죽으로 썼다가 지우고 고쳐 쓸 무렵이었다.
댕, 댕, 댕!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루에 한 번 이맘때 울리는 소리였다. 석주가 도착했다는 소리. 아진은 그 소리를 뻔히 듣고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됐다. 아진이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한 건. 이 주쯤 됐나. 그날. 석주의 구렁이 같은 성기에 오래 시달렸던 다음 날. 아진은 늘 그랬듯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하늘이 노-랗고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이 뱅글뱅글 돈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다른 종이 마당에 고꾸라져 있던 아진을 발견했고, 꽃님을 비롯한 이들이 병원에 가야 한다, 약을 먹여야 한다, 죽을병이다 아니다, 등으로 야단을 떨 무렵 아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큰일은 아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피곤해서 잠깐 쓰러진 거였다. 도박장에서도 손님이 많아 며칠 제대로 못 먹고 못 잤을 때 흔히 그랬다.
아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날 밤 그 소식을 들은 석주는 눈이 뒤집힐 만큼 놀랐다. 그리고 떡을 친 다음 날은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렸다. 사실 그 일을 계기 삼아 아진이 종노릇을 하는 걸 그만두게 하려 했는데 아진이 거절했다.
아무튼 어제도 거나하게 떡을 쳤고, 그 덕에 아진은 오늘 반강제로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