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7화 (4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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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사진이요?”

아진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뭐 그렇게 놀라운 일이라고 어깨까지 바짝 세웠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앞머리를 살살 옆으로 밀어 정리해 주었다. 보고 싶던 눈망울이 훤히 드러났다.

“그래. 우리 둘이서만 하나 찍자.”

“왜요?”

“네 사진이 갖고 싶으니까.”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석주는 도무지 돌려 말할 줄을 모른다. 그럴 필요가 없는 위치이니 이해는 한다만, 듣는 아진은 매번 심장이 철렁했다.

제 사진이 갖고 싶다니. 한집에 살고, 매일 밤을 같이 자는데 굳이? 라는 생각을 했으나 입꼬리는 꿈틀꿈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사진사가 부지런히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그동안 석주는 아진을 아래위로 뜯어보더니 돌연 입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아진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커다란 두루마기에 아진이 온통 둘러싸였다. 도무지 옷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이불을 둘러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든 말든, 석주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루마기를 정리하고, 팔을 동동 걷어 주었다.

아진이 두루마기 아래를 손으로 접어 쥐었다. 흙바닥에 끌리는 비단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두루마기가 땅에 닿아요.”

“괜찮아. 다리 안 나오게 찍으면 돼.”

“아니, 그게 아니고요. 흙이 묻잖아요. 이런 건 빨래하면 금세 천이 상한다고요. 비싼 건데…….”

“안 비싸.”

천이 이렇게 보드랍고 매끈한데 안 비싸다니. 석주가 재단사를 협박해서 공짜로 뜯어낸 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진의 낯이 묘하게 뒤틀리는데, 석주는 마냥 신나 했다. 아진 가꾸기를 마친 그가 자신의 정장 재킷도 정리했다. 아진이 손을 뻗어 그의 셔츠 칼라를 곱게 펴 주었다. 석주가 빙긋 웃을 때였다.

번쩍!

갑자기 플래시가 터졌다. 화들짝 놀란 아진이 사진사를 쳐다봤다. 석주도 그를 바라봤다. 사진사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잘못 눌러서……. 거참, 필름 아까워서 어쩌나……. 다시 찍을게요. 잠시만요.”

사진사가 다시 사진기를 점검하는 사이, 석주가 아진의 곁에 나란히 섰다. 아진의 어깨가 석주의 팔뚝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준비 다 됐는데. 이, 이제 찍을까요?”

사진사가 전과 달리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석주가 혼이라도 낼까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허나 석주는 너그러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진사의 낯이 한결 밝아졌다.

“자, 찍습니다. 눈 감지 마시고, 턱 약간 내리시고, 좋습니다. 하나- 둘- 셋.”

석주가 빙긋 웃었다. 아진이 그를 따라 힘껏 입꼬리를 올렸다.

번쩍. 또 한 번 세상이 환해졌다.

아진은 사진만 찍고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두루마기를 곱게 접어 석주에게 돌려주고 뒤를 도는데. 석주가 매우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왔다.

“산책이나 할까?”

“네?”

“배부르다며.”

“어…….”

산책. 그것이 무엇인 줄은 안다만, 아진은 그런 걸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도박장에 갇혀 있다시피 해서 해도 몇 번 못 봤는데 산책을 해 봤겠나. 더군다나 저는 절름발이인데. 그래서 석주의 제안이 매우 어색하고 어려웠다. 혹 저를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 뒤로 가면 조용히 산책할 수 있을 거야.”

“…….”

“아, 차는 없어. 차가 다닐 길도 아니고. 걱정 안 해도 돼.”

석주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아진은 석주가 정말 순전히 저와 산책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진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는 아진을 뒷집으로 끌고 갔다. 단(丹) 모양으로 된 집의 오른쪽 모서리 너머에 있는 곳이었는데, 종들이 항상 뭐 하는 데냐고 궁금해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석주의 키만큼이나 높은 담장이 둘러 있고, 쪽문이 하나 있었다. 쪽문엔 아진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자물쇠 두 개가 칭칭 감긴 채였다. 석주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그 자물쇠들을 열었다.

곧 문이 열렸다. 안은 좁은 길이 나 있었고, 밤에도 환한 집 마당과 달리 어둑했다. 그리고 풀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났다. 흙냄새와 나무 냄새도 났다.

석주가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쪽문은 작았다. 석주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접어야 할 정도였다. 먼저 들어간 그가 멀뚱히 선 아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었다.

“저…… 여기 들어가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조직원들이 여긴 절대 발 들이지 말라고 했어요.”

“사장인 내가 된다고 했으니까 돼.”

석주가 얼른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종들은 발 들여보지 못한 곳. 석주가 저만 허락해준 곳. 그 특별함을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내 아진의 발이 문턱을 넘었다. 바닥은 평범한 흙바닥이었다. 근데 사람들이 수시로 오가는 마당 바닥과 달리 조금 푹신했다. 덜 다져져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진이 들어오고, 석주가 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안에서 잠금쇠를 채웠다. 그 후 달빛을 따라 몇 걸음 걷는데. 커다란 나무 사이로 누군가가 꾸벅 허리를 숙여 왔다.

“오셨습니까, 형님.”

총을 든 조직원이었다.

“응. 금태 수고한다.”

석주가 익숙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수고는요, 형님. 아닙니다.”

조직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석주는 그에게 짧게 웃어 주고는 아진을 이끌었다.

멀지 않은 곳에 환한 빛이 보였다. 가로등 몇 개가 박혀 있고, 그 너머엔 큼지막한 건물이 우직이 서 있었다. 한옥인 석주의 집과 달리 3층짜리 양옥이었다. 도박장에 있을 때 신문에서 본 종로 경찰서만큼이나 큰 것 같았다.

아진이 멍하니 커다란 건물을 쳐다봤다. 집 뒤에 이런 걸 지어 놨다니. 아무도 모르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바로 뒤엔 산이, 앞으로는 석주의 집이 있어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진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석주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건물 쪽이 아니라 울창한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이었다. 드문드문 전기 등이 놓여서 은근히 밝았다.

“이리 와.”

아진은 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봤다. 도박장도 양옥이었는데 어쩐지 저 건물은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걸 왜 만들어 놨는지. 저기서 뭘 하는지. 약을 만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저렇게까지 커다란 건물이 필요한 건지.

“……저긴 뭐가 있어요?”

석주를 따라 걷던 아진이 물었다. 그렇게 뱉어 놓고는 헛숨을 들이켰다. 석주가 어디 감히 그런 걸 묻냐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허나 석주는 심드렁하게 대답해 주었다.

“약 공장이야.”

“약이요?”

“그래. 필로폰. 내가 외국에다 파는 거.”

“그거 만드는 데 저렇게 큰 건물이 필요해요?”

“응. 냄새가 많이 나서 환기구를 잔뜩 돌려야 해. 그리고 재료가 많이 드는데, 그걸 쌓아 둘 공간도 필요하지. 종로에 쌓아 둬도 되긴 하지만 멀어. 멀면 관리가 어려워지고.”

“그럼 약을 저 건물 크기만큼이나 많이 만드는 거예요?”

아진이 입을 쩍 벌렸다. 제가 약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만, 대충 산만큼이나 가득 쌓인 밀가루가 상상됐다. 그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가까이에 있던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밑동이 두툼한 게 수십 년은 너끈히 살아온 듯한 나무였다.

“재료가 이 나무만큼 있으면, 필로폰은 요만큼 나와.”

석주가 아진의 손을 쥐지 않은 다른 손으로 주먹을 말아 보였다. 아진이 미간을 구겼다.

“애걔……. 고작요?”

“그래. 그래서 비싼 거야.”

아진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재료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많은 재료를 들여서 요-만큼 나오는 거면 비쌀 만도 했다. 아진이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데, 그 얼굴이 괜히 귀여운 석주가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진이 시선을 마주하며 배시시 웃었다. 석주가 참지 못하고 아진의 입술을 통째로 쭙 빨았다가 놨다.

“그냥 돌아갈까? 방 가서 떡이나 치자. 그럼 소화 금방 될 거야.”

“아이, 싫어요.”

아진이 고개를 팩 돌렸다.

“왜 싫어?”

“싫으니까 싫죠.”

“이유를 대야 납득을 하지.”

석주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진이 멈춰 섰다. 그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걷던 석주 역시 멈춰 섰다. 아진이 석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러다 덥석, 난데없이 석주의 아래를 쥐었다. 뭐 했다고 그새 발기한 좆은 아진의 손에 다 잡히지도 않았다.

“이걸 반으로 줄여 오시면 할게요.”

“……그냥 하기 싫다고 해.”

“그래서 그냥 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방금.”

“…….”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진이 다시 앞을 보며 걷기 시작했다. 석주가 움직이지 않아 손을 질질 잡아끌기도 했다. 석주가 마지 못해 발을 뗐다.

아진이 흘끔 석주를 바라봤다. 나뭇잎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치는 그의 낯은 뾰로통했다. 석주가 뾰로통하다니. 그와는 하등 어울리지 않는 말이나 실로 그래서 다른 표현을 고를 수가 없었다.

비죽 튀어나온 아랫입술이며, 못마땅하게 구겨진 잘생긴 눈썹이며, 고집스레 앞만 응시하고 있는 게 분명 삐진 게 맞았다.

앞니 뒤쪽을 핥으며 무언갈 고민하던 아진이 석주의 곁으로 한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춥다.”

“…….”

석주가 제 옆구리에 찰싹 붙은 아진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며 아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굳어 있던 입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본 아진이 소리 죽여 웃었다. 이건 꽃님에게도 먹히는 거였다. 이상하게 어른들은 몸을 비비는 걸 좋아했다.

두 사람은 느릿하게 걸었다. 아진이 지끈거리는 무릎 탓에 발목을 털 때마다 석주는 한없이 진지한 낯으로,

“업어 줄까?”

혹은,

“안아 줄까?”

따위의 말을 하곤 했다.

아진은 그럴 때마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무리 다리가 이 모양이더라도 남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석주는 제가 남자건 여자건 간에 그저 어린아이, 혹은 강아지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말았다.

석주와 아진은 숲을 빙빙 돌아 뒷집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환하게 불이 켜진 건물을 바라보던 아진이 물었다.

“약 만드는 건 어디서 배우셨어요?”

“아버지한테.”

예상치 못한 답에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한테 아버지가 있어요?”

“그래.”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하긴 그가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랫도리에 구렁이를 달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인데 분명 부모가 있을 것이다. 헌데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거라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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