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5화 (4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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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 년 전. 당시의 진걸은 도박장에서 망보는 일을 했었다. 혹 경찰이 들이닥치진 않는지, 경찰이 위장하고 잠입하진 않았는지 따위를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얼굴을 잘 외우고 눈썰미가 좋아서 사장이 퍽 편애를 했었다. 그 편애로 받은 돈이나 음식을 동생인 진수와 나누며 웃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진수가 죽은 후, 몇 년 내내 아진을 죽일 것처럼 괴롭히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근데 여기서 만나다니. 그가 여기 있다니. 그가 석주의 방에서 나오다니.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무릎이 지끈거리고, 뼈가 아렸다. 그에게 밟히던 당시의 고통이 다시 아진을 집어삼키려 했다.

    “…….”

    진걸 역시 아진을 알아본 건지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새치름히 찢어진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아진은 그 눈빛이 잘 벼려진 칼처럼 명치를 쑤욱- 하고 파고드는 걸 느꼈다. 몸이 덜덜 경련했다.

    진수가 교통사고로 죽은 건 아진의 잘못이 아니었다. 달리는 차 앞으로 진수를 밀지도 않았고, 그를 향해 내달리는 차를 방관하지도 않았으니까.

    따지고 보면 아진이 피해자였다. 제 일도 아닌데 진수의 손에 짐꾼으로 끌려갔다가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게 됐지 않나.

    허나 진걸은 진심으로 진수가 아진 때문에 죽었다고, 아진이 진수를 죽였다고 믿었다.

    그 후 진걸의 집요한 혐오와 원망, 그리고 폭력이 수년간 지속됐다. 그래 봐야 그도 열여섯이었으나, 때론 어른보다 아이가 잔인한 법이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아진은 이따금 내가 정말 잘못한 게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렇게 맞닥트린 진걸이 불편했다. 남모르게 숨겨 두었던 자신의 비린내 나는 죄와 마주한 기분이어서.

    아진과 진걸이 서로만 응시하고 있으니 명진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뭐고. 둘이 아는 사이가?”

    “…….”

    아진이 우물쭈물했다. 아는 사이인가. 우리가 그렇게 보통의, 상투적인 관계로 설명될 수 있는가.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진걸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예전에 서울서 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일한 곳이 골드 호텔이었습니다. 그땐 그냥 도박장이었지만.”

    “그-으래? 도박장에서 일을 했었단 말야?”

    “예. 태회물산이 거길 먹었다기에 도박장 사람들이 어디로 갔나, 궁금했는데. 여기 있었나 봅니다.”

    “…….”

    “오랜만이다, 아진아.”

    “…….”

    “많이 컸네. 그땐 조그마했는데.”

    진걸의 말에 명진이 쯧쯧 혀를 찼다.

    “야가 크긴 뭐가 크노. 땅딸막한 게 아직 아 같구만.”

    진걸이 설핏 웃었다. 그러더니 슥 아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옛날에 내가 많이 괴롭혔던 것 같은데. 귀여워서 그랬던 거야. 알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 보자.”

    아진이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벌써 오래전 일인데. 진걸의 손이 참 익숙했다. 얼굴만큼이나 익숙한 손이라니.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면 손이 익숙하다니. 남들은 이 익숙함이 어떠한 건지 감히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아진은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헌데 명진의 시선이 느껴져서, 그가 의아해하는 게 보여서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걸이 석주의 집에 왔다. 명진과 함께 석주의 방에 들렀다. 며칠 전 잠자리에서 석주가 식구가 하나 늘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아니길 바라지만, 진걸이 그 식구인 것 같았다.

    그럼 여기서 저는 어찌해야 하나. 답은 하나였다.

    아진이 천천히 그의 손을 잡았다.

    “……네.”

    손바닥이 겹쳐지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귀여워서 그랬던 거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 보자.

    잘 지내 보자.

    잘 지내 보자.

    잘 지내 보자.

    진걸의 목소리가 웅웅 메아리쳤다.

    * * *

    “진걸이 새끼 너무 싫어서 죽을 것 같아.”

    젓가락을 든 아진이 뿌득 이를 갈며 말했다. 그가 집고 있던 고기가 상 위로 투둑 떨어졌다. 아진이 그것을 다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웃고 있는 진걸을 씹듯 질겅질겅 꽉꽉 씹어 댔다.

    오늘은 진걸의 ‘환영회’가 있는 날이었다. 조직원이고 종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앞마당에 나와 고기를 구워 먹었다. 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 사람들의 웃음소리, 식기 소리, 술잔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등으로 마당이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큼지막한 나무 식탁이 곳곳에 놓여 있고 시뻘건 숯이 든 불판 역시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식탁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서서 고기를 먹었다.

    아무나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웠으며, 누구는 텃밭에서 상추와 깻잎을 한 아름 따 왔고, 또 누구는 술 궤짝을 한 번에 세 개씩 나르며 웃었다.

    아진은 마당 끝자락에 놓인 식탁에서 꽃님과 이순을 비롯한 여자 종들과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누나들은 오랜만의 술자리에 신이 나서 연신 술잔을 부딪쳤다. 아진도 그들과 함께 간간이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모두가 웃고 있는데, 아진만 침통했다. 볼거리라도 난 것처럼 양 볼에 심술을 가득 물고는 한곳을 노려보았다.

    그가 보는 곳은 대청마루 앞, 가장 널찍한 식탁이 놓인 석주의 자리였다. 그의 곁에는 늘 그랬듯 명진이 서 있었고, 그 밖에 조직 안에서 급이 높은 이들도 있었다. 딱 거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환영회의 ‘주인공’인 진걸 역시 그곳에 껴 있었다.

    아진은 그것이 매우, 몹시, 아주, 치가 떨릴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귀한 고기를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수 있는 기회인데 고기 맛이 안 느껴질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서 있는 게 버거워 끙, 소리를 내며 무릎을 털었다. 걷는 건 차라리 낫지. 가만히 서 있으면 체중이 한쪽으로 물려서 다리고 허리고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그에 곁에 서 있던 꽃님이 삼겹살 한 점을 기름장에 쿡쿡 찍어 아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저 새끼가 싫은데 네가 왜 죽어.”

    “그냥 보는 것도 싫어.”

    아진이 파르르 고개를 떨었다. 웃고 있는 진걸의 얼굴을 벌건 숯에다 쑤셔 박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명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목울대가 꿀렁거리고 상체가 뒤로 넘어갈 만큼 껄껄거리며 웃었다. 석주 역시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고, 진걸은 미소 띤 낯으로 무어라 말했다.

    “…….”

    그것을 보던 아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최진걸 진짜 나쁜 새낀데. 그걸 저만 아는 것 같아서, 아니, 다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하물며 석주까지 그를 좋아하는 듯해 씁쓸했다.

    어쩌면 도박장에 있을 때처럼, 제가 또 못된 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아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는데. 꽃님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러냐. 네 잘못 아니라며.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며.”

    “……거짓말 아니야.”

    “누가 거짓말이래? 너 거짓말 안 하는 거 잘 안다. 그러니까 자꾸 죄인처럼 고개 숙이지 말란 말이야, 이놈아.”

    꽃님이 바싹하게 익은 삼겹살을 아진의 앞에 내려놓으며 잔소리했다. 아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쌈장에 쿡 찍어 먹었다. 꽃님이 새파란 상추의 물기를 탈탈 털어 아진의 입에 마저 욱여넣었다.

    “기죽으면 순식간에 죄인 된다. 세상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다고. 그러니까 당당하게 굴어.”

    “…….”

    “진걸이 저 새끼가 뭐라고 하면, 네 동생이 칠레 팔레 쏘다니다 혼자 뒤진 거라고, 정신 차리라고 떽떽 쏴 버려. 그렇게 말한다고 쥐어팬다? 그럼 사장한테 냅다 가서 일러. 쟤한테 맞았다고.”

    “사, 사앙니안테?”

    사장님한테? 아진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입 안 가득한 쌈 탓에 발음이 줄줄 샜다. 꽃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사장이 눈 뒤집혀서 진걸이 저놈 목을 따 주지 않겠냐.”

    그 말에 아진이 턱을 바쁘게 놀려 음식을 씹어 삼켰다. 소주로 입까지 헹군 그가 꽃님의 곁으로 찰싹 붙으며 은밀히 속삭였다.

    “진걸이 새끼가…… 사장님 대신 칼 맞았다는데? 내 말을 믿어 줄까?”

    “믿지, 그럼. 사장한테는 네가 최곤데. 지금도 봐라. 어디 모자란 등신처럼 흘끔흘끔 너만 쳐다보잖냐.”

    꽃님이 집게 뒤축으로 슬쩍 석주 쪽을 가리켰다. 아진이 곁눈질로 석주를 훔쳐봤다. 꽃님의 말과 달리 석주는 진걸을 보고 있었다. 아진의 눈썹 위로 못마땅한 홈이 파였다. 그가 젓가락으로 고기에 붙은 오돌뼈를 쿡쿡 찌르며 웅얼거렸다.

    “보긴 뭘 봐. 내가 여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사장님이 나를 최고로 여기는지 진걸이 새끼를 최고로 여기는지 아줌마가 어떻게 알아?”

    “나는 알지, 이놈아.”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냐. 꽃님이 집게 뒤축으로 아진의 볼을 쿡 찔렀다. 아진이 파닥파닥 손을 휘저으며 그녀의 손을 밀어 냈다. 그 우스꽝스러운 작태에 꽃님이 끌끌 웃었다. 심통 내던 아진도 그녀를 따라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래. 꽃님이 모르는 게 없긴 하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다른 이는 다 저를 나쁜 놈으로 오해해도 상관없다. 석주만 오해하지 않으면 된다. 그에게는 진걸보다 제가 더 소중한 이가 되었으면 했다.

    아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고기 세 점을 한 번에 집어 입에 넣었다. 젓가락 끝으로 쌈장을 푹 떠먹고, 꽃님과 키득거리며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다.

    오랜만에 먹는 술이라 그런가, 원체 술을 잘 못 마셔서 그런가 얼굴이 금세 불그죽죽해졌다. 반 잔씩 홀짝홀짝 꺾어 마시는데도 그랬다.

    술기운이 오르니 감정이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 술이라는 게 원체 그렇다. 극과 극의 감정을 더욱 도드라지게, 더욱 크게 만들지 않나.

    아진은 시시때때로 석주와 진걸을 훔쳐보며 욕을 해 댔다.

    “사장님은 왜 자꾸 진걸이 새끼 보고 웃는 거야?”

    “사장님이 진걸이 새끼한테 술 따라 줬어.”

    “방금 사장님이 진걸이 새끼 어깨 두드렸어.”

    “어, 진걸이 새끼가 사장님 담뱃불 붙여 줬어. 개새끼…… 나대네…….”

    아진의 눈매가 사납게 추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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