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4화 (4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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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가 눈썹을 올렸다. 아진이 ‘우리 집’이라고 했다. 그게 못내 기분이 좋았다. 섣부른 생각이긴 하나 아진과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았다. 우리 집이라는 한 단어에 결혼까지 생각하다니. 제가 단단히 미친 모양이다.

자꾸 솟구치는 광대를 꾹 눌러 내린 석주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적을 알아야 하니까.”

“네?”

“당장에 중호파와 부딪치기엔 우리가 몸집이 작아. 온갖 방법을 써서 간신히 이긴다고 해도 많은 식구를 잃어야 할 거다. 줄줄이 상을 치러야겠지.”

“…….”

“지금은 공생하는 방법을 찾는 게 이득이야. 치밀한 놈들이니 가까이에 두고 대비해야 해.”

석주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넙데데한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푹 꺼졌다. 아진이 단단한 석주의 가슴을 살살 쓰다듬었다. 석주가 그 손을 앗아 뺨을 묻었다.

“인천 공장에서 일이 있었어.”

“알아요. 그때 사장님 식구가 둘이나…….”

“그래. 근데 그게 중호파 짓이라는 걸 알게 됐다.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을 꾀어내 약을 빼돌리고, 그걸 부두 가까이에 있던 집창촌에 공짜로 뿌린 거야. 그러다 일순 약을 끊었고, 정신 나간 약쟁이들이 광분하자 우리 공장 위치를 알려 줬던 거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거기서 일하던 다른 직원이 알려 줬다.”

“알려 줬다는 그, 그 직원은 믿을 만한 거예요?”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을 빼돌리다니. 겁도 없지. 누구라도 석주를 실제로 본 이라면 그런 짓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석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진걸을 떠올렸다. 중호파가 한 짓이라면서 줄줄 불기에, 명진이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 분기탱천을 했었다. 그러자 더할 나위 없이 무심한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었지.

‘제가 그걸 왜 알려 드려야 합니까. 저는 공장에서 일하던 일개 직원인데요. 하루 일하고 그날 일당 받아서 나가면 끝입니다. 괜히 나불거렸다가 중호파한테 걸려서 목이라도 따이면요? 사장님은 이렇게 두둑하니 돈을 주시지만 그 개잡놈들은 아닙니다. 말하자마자 목부터 썰 놈들이라고요. 저도 예전엔 서울에서 살아서 알아요.’

괘씸하긴 하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석주가 쯧 혀를 찼다.

“뭐……. 거짓말 같진 않았어.”

“그래도 확인하고 또 확인하세요. 조심해야 해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요.”

그 말에 석주가 푸흐,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나쁜 사람들이라니. 그런 단어를 제 앞에서 운운하는 아진이 참 깜찍했다. 그가 아진의 통통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아는 이들 중에 내가 제일 나쁠걸.”

“……사장님은 도박장에서, 풍속점에서 일 안 해 봐서 모르는 거예요. 사장님은 신사라고요.”

아진이 석주의 가슴에 콩 이마를 들이박았다. 그에 웃음을 흘리던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제가 신사라니. 아진은 그새 잊은 모양이다. 제가 그를 어떻게 깔아뭉개고, 어떻게 헤집고, 어떻게 들쑤셨었는지. 얼마나 함부로 매만지고 억세게 움켜쥐었었는지.

오롯이 가해자인 석주를 이리 후하게 판단해 주니 잘된 일이나 어쩐지 씁쓸했다. 아진이 그걸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만큼 험한 걸 보며 살아왔구나, 싶어서.

석주가 아진의 이마에 촉촉 입을 맞췄다 뗐다.

“어찌 됐건, 죽고 다친 식구들을 위해서도, 널 위해서도 복수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지금 있는 식구들까지 피를 흘리게 할 순 없어. 그러니 일단은 알아야지.”

“중호파에 대해서요?”

“그래. 그들이 몇 명인지. 얼마나 힘이 센지. 돈은 어디서 굴러오는지. 사업은 어떻게 진행하는지. 그런 거.”

“…….”

“그래야 하나하나 빼서 무너트리기 쉬워. 시간은 걸리더라도 흘릴 피는 줄지.”

“…….”

“나는 우두머리고, 내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다. 분노와 복수로 또 다른 식구들을 아프게 하는 건 틀린 행동이야.”

아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주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알 수는 있었다. 그가 식구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석주가 아진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련.”

“…….”

“추후에 내가 힘을 더 갖게 되면, 널 함부로 대했던 새끼를 도륙 내 주마.”

섬뜩한 말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잊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도둑질하던 돼지의 팔뚝이 썰리던 장면 말이다. 비닐 위로 질펀하게 흩뿌려지던 피를 상기한 아진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안, 안 그러셔도 돼요. 이제 괜찮아요.”

“왜? 초콜릿 먹었더니 마음이 좀 풀렸어?”

석주가 옅게 웃었다. 아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석주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니요. 사장님이 저한테 사과하셨잖아요.”

“…….”

“제가 화, 화가 난 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사장님한테…… 섭섭해서 그랬던 거니까…….”

“…….”

“몇 대 맞고, 병신이라고 욕 듣고 그런 건 괜찮아요. 그 사람은 저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

“사장님만…… 안 그러면 돼요.”

“…….”

“저한테는 사장님만 중요하니까…….”

아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뒤늦게 자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광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목은 아래로 수그러들었고, 시선도 내리깔렸다. 촘촘히 박힌 속눈썹이 바쁘게 팔랑거렸다.

“…….”

석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갈비뼈가 지끈거렸다. 심장이 옥죄는 듯한 느낌이 났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아진이 가득 차올랐다.

너는 정말 어지러울 만큼 아름답다.

눈앞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어여쁘고.

정신이 혼미할 만큼 사랑스럽다.

석주가 아진의 턱을 추켜올렸다. 아진이 싫다는 듯 고개를 뒤틀었으나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아진은 얼굴을 들게 됐다.

“아진아.”

석주가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아진을 불렀다.

“……네.”

아진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대답했다.

“좋아해.”

갑작스러운 석주의 말에 그러잖아도 붉었던 아진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그가 목을 움츠리며 다시 고개를 떨어트리려 할 때. 석주가 입술을 맞붙였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입술에 아진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목구멍까지 홧홧해질 정도로 뜨거운 숨결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아진이 꼴깍꼴깍 그것을 받아 삼켰다. 며칠 석주의 체온에 닿지 못해 서늘했던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석주가 아진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당기며 천천히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묶여 있던 머리끈을 대충 끌어 던져 버렸다.

이내, 아진의 흑발이 하얀 이불 위로 흩어졌다.

* * *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된 지 어언 한 달.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졌다. 종들은 딱 좋은 날씨라며 콧노래를 불렀으나 아진은 몸을 움츠린 채 옷을 여미고 또 여며야 했다. 석주가 솜이 가득한 잠바를 사 주어 그래도 버틸 만했다.

벌써 이런데 겨울은 어떻게 나나, 걱정이 가득이다.

아진은 종들의 방에 누워 한숨을 폭폭 쉬고 있었다. 어찌나 으슬으슬하고 추운지. 숨을 쉴 때마다 뽀얀 입김이 뿜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불을 덮어써 봤으나 체온 자체가 낮으니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아진이 벌떡 일어났다. 석주의 방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날이 차가워지면서 아진이 석주를 찾는 시간이 일러졌다. 석주는 좋아했으나 아진은 침통했다. 석주가 아예 본인의 방에서 살라고도 했는데, 벌써 몇 번째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의 방에서 사는 게 안 될 건 없다. 어차피 한 지붕 아래인데. 그래도 남세스럽고 부끄럽지 않나. 석주와 온갖 음란한 짓을 다 한다만, 어쨌거나 저는 사내이고, 석주는 이 집의 최고 어른인데.

‘사장님이 더럽게 남자랑 붙어먹는다.’

‘다리 병신인 아진이 몸 파는 남창이다.’

그런 소문이 돌아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미 날 대로 난 것 같지만 그래도.

근데 더 추워지면 정말 종일 석주의 방에, 그의 품에 딱 붙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뼈가 오들오들 떨리는 추위가 너무 괴로워서.

푹푹 찌는 여름엔 석주가 아진에게 애걸복걸했으나, 겨울엔 아진이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그래서 요즘, 뽀뽀를 해 주지 않으면 안아 주지 않을 거라고 놀려 대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헌데 석주가 그 크고 따뜻한 손으로 차게 식은 발을 조물조물 만져 주는 게 좋아서 매번 입술을 갖다 바치곤 했다.

“여름만 와 봐라……. 나도 안 안아 줄 거야…….”

아진이 코를 훌쩍이며 복도를 걸었다. 중정을 지나 석주의 방으로 향하는데. 석주의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오는 게 보였다. 명진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 집에서 석주의 방에 가장 많이 드나드는 건 저, 방을 청소하는 이순, 그리고 명진인지라 종종 이렇게 맞닥트리곤 했다.

그 잦은 만남 덕에 전만큼 그가 무섭지 않았다. 명진이 제게 시비를 걸거나, 손찌검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석주의 반의반 정도로만 잘생겼으면 신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어, 아진이냐.”

명진이 알은체를 했다.

“형님 안에 계신다.”

명진은 친절하게도 커다란 몸체를 옆으로 돌려 아진이 지나가기 쉽도록 길을 만들었다. 아진이 감사합니다, 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지나가는데. 뒤늦게 명진의 뒤에 다른 이가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진은 무심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목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뭘 잘못 삼킨 것처럼 숨통이 꽉 막혔다. 숨은 못 쉬는데, 심장은 쿵쾅쿵쾅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세차게 펌프질된 피가 핏줄을 팽팽 빠르게 돌았으나 몸은 시시각각 차게 식어 갔다. 술을 잔뜩 마신 것처럼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최진걸. 최진걸이었다.

아진이 세상에서 ‘아는 이’라곤 도박장에서 만난 이, 그리고 여기 석주의 집에서 만난 이가 다였다. 그러니 진걸을 안다는 뜻은, 그가 도박장에 있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진걸은 그의 형이었다. 열 살. 아진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그 일로 세상을 떠났던 진수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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