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3화 (43/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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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기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푹 숙였다.

“저, 저는 이만…….”

아진은 석주가 허락하기도 전에 팩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절뚝절뚝 부엌을 돌아 종들의 방으로 향했다.

기헌이 멀어지는 아진을 바라봤다. 얼굴을 보고 난 후라 그런가. 품이 큰 저고리 너머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몸이 낭창했다. 역겨운 다리 병신이라 생각했던 걸음걸이도 괜히 입맛을 돋우고 말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기헌은 한동안 아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는데.

“…….”

석주 역시 아진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여태 봐 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검은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게, 눈치로 이 자리까지 온 기헌이 단박에 낚아챌 수밖에 없는 시선이었다.

이내 아진이 사라지고. 석주의 시선이 기헌에게로 돌아왔다. 기헌이 때맞춰 슬쩍 눈을 피했다. 그런 기헌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떠 있었다.

* * *

아진은 사흘째, 석주의 방에 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사흘 내내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석주의 방에서 잔 지 얼마나 됐다고 떼거리로 모여 자는 게 말도 못 하게 불편하고 시끄러웠다.

거기다 초가을 주제에 밤이 어찌나 추운지. 하필 창호지 문에 딱 붙은 자리라 문틈으로 찬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코가 다 시렸다. 언젠가 석주가 사 준 솜이불을 둘둘 말아 덮고 있어도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그래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창호지로 파랗게 새벽이 스며 오면 간신히 눈을 붙이곤 했다.

그러다 일어나서는 온종일 한숨을 폭폭 쉬며 일을 한다. 수면 부족으로 기운이 없었고, 사흘 동안 석주가 저를 찾지 않은 것도 섭섭하고,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며칠 내내 저녁도 바깥에서 해결하고 와서 그의 얼굴조차 구경을 못 했다는 것도 신경질이 났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석주가 잠을 잘 자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사흘 내내 제대로 못 잤으면 얼마나 피곤하겠나. 근데 잘 자도 문제였다. 이제 저 같은 거 없어도 혼자 잘 잔다는 거니까.

혹시 몰라서 늦은 밤 은근히 염탐을 해 봤는데, 여자를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등신 같은 생각을 반복하다 또 하루가 갔다. 종들끼리의 소담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진은 설거짓거리를 몇 시간이나 잡고 있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쿰쿰한 냄새가 나는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얼어 죽을 것 같아도 바깥에서 최대한 버티는 게 나았다.

허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조직원들이 식사를 하지 않아 그릇이 몇 없었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마친 아진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탁해진 물을 쫄쫄 버리고 있을 때였다.

자박. 머리 위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아.”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순간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진이 다급하게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석주를 보지도 않은 채 숙이고 있던 허리를 더 깊게 접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진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대야를 휙 뒤엎었다. 물이 크게 엎어졌다. 일렁이며 땅속으로 스며드는 게 마치 파도 같았다. 그걸 멀뚱히 보던 아진이 쪼그려 앉아 대야를 수세미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주 역시 아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 덩치가 어찌나 큰지. 그의 그림자에 아진이 죄 잡아먹혔다. 머리통 반절만 빼꼼히 달빛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진이 짜증스레 입술을 뒤틀었다. 석주가 빛을 죄 가려 버려서 제가 대야를 닦고 있는 건지 솥을 닦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왜 안 와.”

“…….”

“기다리는데.”

석주가 낮게 말했다. 그에 바쁘게 움직이던 아진의 손이 우뚝 굳었다. 눈물이 찡, 하고 났다.

반칙이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기다렸다고 말하는 거. 정말 반칙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도 반칙이다. 실로 아무 일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무감할 줄이야.

“기다리지 마세요.”

아진이 뿌득뿌득 대야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딴에는 차갑게 쳐 낸다고 한 건데 말꼬리가 길어졌다. 항상 얻어맞기만 했지 누구와 싸워 봤어야 말이지.

아진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무는데. 석주가 앞으로 쏟긴 아진의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 넘겼다. 며칠 못 봤던 아진의 커다란 눈매가 나타났다. 보석처럼 반질반질한 청색 눈동자도 보였다. 석주가 그 예쁜 눈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왜. 나 너 없으면 못 자는 거 알잖아.”

“…….”

“사흘 내내 한숨도 못 잤어. 죽을 것 같아. 나 좀 살려 줘라, 아진아.”

석주가 엄지로 아진의 뺨을 슥 쓰다듬었다. 아진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석주의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석주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그가 아진이 쥐고 있던 대야를 슬쩍 잡아당겼다.

“추워. 들어가자.”

허나 아진이 대야를 놓지 않았다. 석주가 설핏 인상을 썼다. 혹 아진이 거절할까, 싶어서 겁이 났다. 그러나 아진은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질지도, 단단하지도 않았다. 정과 온기에 나약한 소년일 뿐이었다.

“이거……, 이것만 마저 하고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한 아진이 찬물로 대야를 헹궜다. 그 후 물기를 탁탁 털어 내고, 대야를 뒤집어엎었다. 그리고 옷자락에 손을 닦는데. 어느새 다가온 석주가 슬쩍 손을 채 갔다. 차게 언 손을 조물조물 만지기도 했다.

“…….”

아진이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못 이기는 척 그 손을 쥐었다.

늘 그랬듯, 석주의 손은 참 따뜻했다.

아진은 석주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얼굴을 온통 빨려야 했다. 말 그대로 빨렸다. 입술부터 시작해서 뺨, 코끝, 턱 아래, 이마, 눈가까지 석주의 입술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대체 광대는 왜 혀를 내어 핥는 건지…….

그 후 석주는 아진을 온몸으로 안고 있었다. 아진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가, 뺨을 비볐다가, 아진의 덥수룩한 앞머리를 손수 묶어 주기도 했다.

그동안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따금 석주가 은근히 허벅지와 엉덩이에 좆을 비비면 눈을 세모꼴로 뜨기만 했다.

“자.”

석주가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앞머리를 묶은 값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던 아진이 그것을 받아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석주는 아진의 코앞에 앉아 우물거리는 볼과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말랑말랑하고 하얀 떡 같던 볼이 며칠 새 홀쭉해졌다. 그것을 새치름히 노려보던 그가 두 손바닥으로 아진의 뺨을 쥐었다.

“며칠이나 안 봤다고 살이 빠졌어. 내가 어떻게 찌운 살인데.”

“…….”

아진이 입술을 씰룩였다. 잠을 못 잤으니 빠졌지. 밤마다 먹던 과자도 못 먹었고,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꽃님이 뒤질 병에 걸린 게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다.

허나 아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종의 시위였다. 나 화났다. 성이 났다. 삐졌다. 섭섭하다. 그것을 토로하는 시위.

석주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아진의 엉덩이를 쥐고 자신 쪽으로 쭉 당겨 왔다. 아진이 그의 다리 사이로 짜 넣은 붙박이장처럼 쏙 들어갔다.

“화났지?”

석주가 아진의 귓바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제가 왜 화가 나요.”

쭙쭙 빨던 초콜릿을 반대쪽 볼로 옮긴 아진이 웅얼거렸다.

“화난 표정인데.”

“안 났어요.”

아진은 단호했다. 쓸데없이 깜찍한 단호함이었다.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달콤한 냄새를 뿜어내는 것도, 초콜릿이 혀에 뭉개질 때마다 맛있다는 듯 속눈썹을 팔랑거리는 것도, 입을 우물거리느라 아랫입술이 평소보다 도드라진 것도, 다 귀여웠다.

옅게 웃은 석주가 아진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마른 등을 슥슥 아래로 쓰다듬어 주며 특유의 저음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

“미안해, 아진아.”

“…….”

“그 자리에서 그 새끼 목을 썰어 버렸어야 했는데. 누가 널 괴롭히면 복수해 주겠다고 말해 놓고. 내 사람이라고 말해 놓고. 널 쫓아내서 미안하다.”

석주는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아진이 섭섭했을 것을 정확히 집어냈다.

‘아진아.’

‘나가.’

당시의 차가운 음성을 떠올린 아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주책맞게도 눈물이 올라왔다. 그런데 전처럼 석주가 밉진 않았다.

아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가 사과에 약하다는 걸. 평생 사과를 받는 건 석주가 처음이라 미안해, 그 한마디면 마음이 절로 말랑해지곤 했다.

아진이 석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석주가 그의 작은 뒤통수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어.”

“…….”

“네게 피라도 튈까 무서웠다.”

“…….”

“그게 남의 피든, 네 피든 싫어서 참았다. 결국엔 네 분만 샀지만…….”

석주가 아진의 관자놀이에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 그 간질간질한 입맞춤에 아진이 슬쩍 목을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

마치 겁먹은 고양이 같은 몸짓에 석주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생전 동물을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아진 같은 고양이나 강아지면 열 마리씩 떼로 풀어 놓고 집 안을 헤집는 걸 구경해도 하루가 모자라겠다 싶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몸을 붙이고 있었다. 아진은 석주의 품에 안겨 야금야금 초콜릿 하나를 다 먹어 치웠다. 석주가 그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로 훔쳐 자신이 빨아 먹었다. 그러자 아진이 석주의 손이 닿았던 입술을 혀로 살살 핥았다.

빼꼼 나왔다 사라지는 붉은 혀를 보는 석주의 눈빛이 진득했다.

그 음험한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진은 초콜릿으로 기분이 한결 맑게 갰다. 그가 석주의 두루마기를 꼼지락꼼지락 구기며 물었다.

“그때 온 사람들 중호파 사람들이잖아요.”

“응.”

“그 사람들 사장님 적 아니에요? 되게 나쁜 사람들인데. 도박장에 있을 때도 행패를 엄청 부렸었어요.”

“질 낮다는 소문은 들었어.”

“근데 왜 집까지 초대한 거예요? 우리 집에 불이라도 지르면 어쩌려구…….”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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