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2화 (4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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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이 쭈뼛쭈뼛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얼른 허리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씨발, 술맛 다 떨어졌잖아. 좆같이 집에 병신을 두고 지랄이야…….”

남자가 짜증이 난다는 듯 상을 쾅! 내리쳤다. 상 위의 접시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젓가락 하나는 바닥으로 덜그럭 떨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듣는 원색적인 비속어에 아진의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가 재차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수, 술이 조금 남았……길래…….”

작아지던 아진의 목소리가 이내 묵음이 됐다. 그러나 남자의 씩씩거리는 콧바람은 점점 더 세졌다.

“뭐라는 거야, 이 더러운 새끼가!”

남자가 금방이라도 아진의 뺨을 후려칠 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진의 만면이 파랗게 질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얼굴이 좌우로 흔들리듯 경련했다. 그가 술병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아진아.”

낮은 목소리가 아진을 불렀다. 아진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석주가 저를 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의 그가 낯설었다. 돼지의 팔이 썰리던 그때의 석주를 보고 있는 듯했다.

“네, 네?”

“나가.”

“아……. 네.”

아진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하고 재차 사과했다. 그러고는 묵직해진 술 상자를 챙겨 절뚝절뚝 대청마루를 나왔다. 그가 한 손으로 문을 닫는데. 기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절름발이가 있다는 건 들었는데……. 비위도 좋으시네. 병신을 집에 두고. 강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착해.”

“다 같은 사람인데, 뭐 어떻습니까.”

“그래도 좀 그렇잖아.”

“…….”

“근데…… 강 사장은 종놈들 이름까지 외우시나 봅니다.”

“조직원이든, 종이든 한집에 살면 식구라 생각합니다.”

“이야, 젊어서 그런가. 나 같은 노땅이랑은 생각이 다르네, 생각이. 나도 배워야겠어.”

킬킬 웃는 목소리를 듣던 아진이 문을 마저 닫았다. 그리고 비척비척 복도를 걸었다. 술 상자에 든 건 하나같이 빈 술병들뿐인데. 팔이 빠질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졌을 때쯤, 부엌이 한가해졌다. 음식은 더 이상 나가지 않았고, 종 하나가 간간이 술병을 걷어 왔다. 들리는 바로는 대청마루가 아직 왁자지껄하단다.

종들은 뒤늦게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식어서 조금 버석해진 밥에 국과 전을 가볍게 데워서 먹었다. 하나같이 좋은 재료로 만들어서 그런가. 그렇게 먹어도 눈물 나게 맛있었다.

실로 아진은 눈가가 뜨끈해져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근데 맛있어서는 아니었다.

결국 술자리는 자정이 넘을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조직원 하나가 남자 종 두엇만 남기고 자러 가도 좋다는 말을 전해 왔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품을 하며 자신들의 방으로 이동했다.

“…….”

입술을 우물거리던 아진 역시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마음이 묵직하고 어깨가 뻣뻣한 게 도무지 눕고 싶지 않았다. 눕는다고 한들 잠이 오지도 않을 것이다.

몇 개월 내내 석주의 방에서 포근한 이불에, 뜨거운 품에 쌓여서 귀하게 잤는데. 이제 와 퀴퀴한 냄새가 나고 하늘이 무너지라 코를 고는 종들 사이에서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잠이 안 온다는 거였다.

아진은 부엌 옆에 붙은 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종일 혹사당해 지끈거리는 무릎을 툭툭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밤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달도 휘영청 커다랗게 뜬 게 해처럼 밝았다. 밤벌레와 귀뚜라미들은 여름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져서 세상이 고요했다.

그게 참 아쉬웠다. 세상도 저를 외면한 기분이라.

“하아…….”

아진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꾹 감았다.

‘아진아.’

‘나가.’

수 시간 전 석주에게 들었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왕왕 맴돌았다. 고작 두 문장인데. 사실 문장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가볍고 흔한 말인데. 왜 이렇게 사무치고, 섭섭하고, 서러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제가 석주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거나하게 착각이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게 무섭게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

아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거기서 제 식구에게 그런 언행을 하지 말라고 그 남자를 혼내 주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냥, 그냥…… 조금만…….

아. 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 자체가 일평생 처음이라 다 어색하고 짜증만 났다.

마루 아래로 다리를 내린 아진이 툭툭 바닥을 찼다. 그러다 발끝에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차였다. 그것을 빤히 보던 그가 손을 뻗었다.

아진은 딱딱한 흙바닥에다가 나뭇가지로 글자를 하나하나 써 갔다.

[아진]

이제 이름 정도는 쉽게 쓴다. 바둑이 이야기도 안 보고 쓰는데 이름쯤은 우스웠다. 아진은 제 이름 옆에 또 다른 것도 끄적였다.

[강석주]

며칠 깅석주던 석주도 강석주로 돌아왔다. 이름이 석 자인 데다가 획수도 많아서 외울 때 힘들었다. 몇 번이고 틀렸는데 석주는 화 한 번 내지 않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피식 웃던 아진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석주 이름을 벅벅 문대 지웠다. 기껏 쓴 이름이 흙에 덮여 사라졌다.

아진이 휙 나뭇가지를 내던졌다.

“짜증 나…….”

분명 별것 아닌 건데, 이렇게 청승을 떨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 와중에도 야금야금 석주를 원망하는 마음도 싫었다.

그렇게 친절하던 이도 다리 병신인 저를 바깥에 내놓기는 부끄럽구나. 역시 한낱 종 따위인 저보다는 사업이, 바깥사람이 더 중요하구나. 석주가 제게 흥미를 잃으면 전처럼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비루한 잡초처럼 살아가겠구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아진이 혀가 마를 정도로 한숨을 반복하는데.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아진이 소리의 시발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깜깜한 어둠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도 느긋하고 찬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아진을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내 등불 빛에 그림자의 얼굴을 드러냈다. 기헌이었다. 아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저를 모르고 지나가 주길 바라면서.

허나 기헌은 아진의 앞에 멈춰 서고야 말았다. 울퉁불퉁한 가죽 구두가 아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진이 낭패라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너 아까 그놈이구나? 다리 병신?”

기헌이 담배를 꺼내 물며 물었다. 아진이 흘끔 그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기헌은 멀쩡했다. 몇 시간 전 대청마루에서 봤을 땐 얼굴도 벌겋고, 몸짓도 굼뜨고, 술에 얼큰히 취한 것 같더니. 지금은 자세도 똑바르고 눈빛도 날카로웠다. 술이 금방 깬 건지, 아니면 취한 척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기헌이 후우……, 하고 연기를 뿜었다. 그러다 아진의 팔뚝을 툭 쳤다. 본인 딴에는 가볍게 친다고 한 것 같은데, 아진의 가냘픈 몸은 크게 출렁거렸다.

“우리 애들이 좀 거칠어서 그랬다. 이해해라. 근데 강 사장도 참. 귀-한 손님이 왔는데 다리 병신한테 음식 나르는 거나 시키고 말이야. 싸가지 없게…….”

아진이 뒤꿈치에 힘을 주고 바르게 섰다. 병신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놈의 다리 병신. 죽을 때까지 뗄 수 없는 호칭인데 아직도 기분이 나쁘다.

“…….”

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하겠나. 우리 사장님 싸가지 없는 사람 아니에요, 라고 따지겠나. 듣기 거북하니 다리 병신이라고 하지 말라고 버럭 하겠나. 아니면 제가 나르는 음식이 더럽냐고 화라도 내겠나. 그냥 묵묵히 있는 게 최선이었다.

“근데 씨발, 화장실이 어딨는 거야? 집이 쓸데없이 커서는……. 엿 먹이려고 시내에 있는 그 좋은 술집 다 두고 여기로 부른 거지, 개새끼…….”

“…….”

“아니, 아니지. 다 흙이고 풀인데 아무 데나 싸도 되지. 이게 다 천연 비료인 거야. 안 그러냐?”

기헌이 낄낄 웃으며 허리띠를 끌었다. 기겁한 아진이 그에게 한발 다가갔다.

“화장실은 저기, 저쪽 문으로 들어가면 나와요.”

마당 비질은 아진의 일이다. 맑은 날씨로 보아 당장 비도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며칠 내내 그의 오줌 지린내를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리 하찮은 놈이라도 비위라는 건 있는지라.

“뭐야? 내가 여기 오줌 누는 게 싫으냐?”

기헌이 삐딱하게 눈썹을 올렸다. 아진이 헛숨을 삼키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기헌이 무어라 한 소리 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바람 한 줄기가 두 사람 사이를 휭-, 하고 지나갔다. 막 가을에 접어든 밤바람은 꽤 사나웠다. 아진의 앞머리가 대차게 휘날렸다. 우중충해 보일 정도로 길게 기른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며 말간 맨얼굴이 드러났다. 찰나였으나 달빛이 쨍해 그 얼굴을 못 볼 수가 없었다.

“너…….”

기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담배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가 아진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놀란 아진이 움찔 몸을 떨었을 때였다.

“……여기 계셨습니까.”

낮은 목소리. 먼 거리임에도 발끝까지 드리운 기다란 그림자. 바람에 휘날리는 두루마기의 사각거리는 소리.

아진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석주가 서 있었다. 덕분에 아진의 머리칼로 향하던 기헌의 손이 정착하지 못하고 거두어졌다.

기헌은 아진과 달리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매우 능청맞게 말했다.

“아. 화장실을 못 찾아서. 근데 여기 이놈이 알려 줬습니다.”

분위기가 묘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석주가 그런 기헌을 빤히 봤다. 그 시선이 전에 없이 차갑고 뾰족했다. 기헌이 흥미롭다는 듯 그 시선을 마주했다. 어째 바람이 전보다 차가워진 것 같았다.

“화장실은 안쪽에 있습니다. 들어가시죠.”

“네, 그러죠.”

두 사람은 그렇게 말을 주고받아 놓고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진은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아랫입술만 줄줄 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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