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1화 (4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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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는 다른 자동차 앞으로 향했다. 그 자동차는 여타 차들보다 반짝이고 컸다. 바퀴도 두툼하고 커다란 게 그대로 집으로 돌진하면 집도 무너지겠다, 싶을 정도였다.

석주가 앞에 서자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구둣발이었다. 그런데 그 구두가 태회파 조직원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가죽이 울룩불룩, 오돌토돌하게 올라와 있고 불그스름하게 번뜩이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나중에야 들은 건데 악어가죽으로 만든 구두란다.

이내 구두 주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키가 컸다. 허나 덩치가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깨도 적당한 넓이에 정장 바지 너머로 무릎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몸이라 그랬다. 하나같이 태산처럼 듬직한 태회파 조직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몸이었다.

남자는 석주보다 키가 한 뼘쯤 작았다. 나이도 많아 보였다. 아주 젊게 봐 줘야 마흔 초반쯤. 나이 때문인지 눈매가 깊었고, 눈은 물방울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코는 크고 우뚝한 반면 입술은 얇은 게 꽃님이 봤다면 복이 아래로 줄줄 새는 낯짝이다, 라고 말했을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남자는 꽤 미남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어떻게 뜯어봐도 잘생긴 석주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한 조직의 우두머리로 있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름이 뭐랬더라. 아, 그래. 박기헌.

기헌은 앞마당을 크게 한 번 둘러본 후, 석주의 안내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종들은 내내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조직원 하나가 다가와 명령했다.

“저녁은 다실 말고 대청마루로 들이소. 그리고 술은 다실에다 쌓아 놨다니까 다른 거 말고 그것만 들고 오고. 마당 쪽으로 드나들지 말고 복도로만 이동하이소.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당이 먼저 보이니까. 알아 뭇지예?”

“예. 알겠습니다.”

조직원이 얼른 가 보라며 손을 휘저었다. 종들이 허겁지겁 집을 돌아 부엌으로 갔다. 아진도 절뚝절뚝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봤으나, 석주는 이미 집 안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아진은 널찍한 쟁반에다가 갖가지 반찬을 얹어 조심조심 복도를 가로질렀다. 종들이 그의 곁을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평소엔 조용하던 마룻바닥이 끼익끼익 시끄럽게 뒤틀리는 소리를 냈다.

대청마루 앞에 선 아진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조심히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에는 8인용 상 다섯 개가 길게 붙어 있었다. 상석엔 석주가 앉아 있었고, 왼쪽으로는 기헌부터 중호파가 줄줄이, 오른쪽으로는 명진부터 태회파가 줄줄이 앉아 있었다.

그것을 흘끔 본 아진이 쟁반을 바닥에다 조심히 내려놓았다. 석주와 완전 반대편에 있는 상 끄트머리였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그가 반찬들을 상 위로 올렸다. 그러면 다른 종이 그것을 들고 석주 앞에서부터 반찬을 차곡차곡 옮겼다.

그러고 있으니 기헌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언젠가는 강 사장을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근데 이렇게 먼저 만나자고 하고. 하물며 집으로까지 초대하고! 이야, 이거 너무 감사해, 너무.”

기헌이 자신의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며 웃었다. 석주가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진작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일이 바빠서 늦었습니다.”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요? 그래도 뭐, 이렇게 만났으니 된 거 아닙니까. 근데 집이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요즘은 양옥이 유행인데 한옥을 지었어요? 나는 양옥에 사는데 계단 오르기가 좀 불편하긴 해도 집이 두 배로 넓어지니까 기분이 좋더라고. 뭐 집을 2층으로 쌓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마는…….”

“그렇습니까? 다음에 초대해 주시면 가서 구경하지요.”

석주가 설핏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기헌이 기우는 술병의 주둥이에다 자신의 잔을 가져다 댔다. 쪼르륵. 맑은 술이 작은 잔을 채웠다.

“암만, 암만. 내 응당 초대하지요. 근데 강 사장은 굳이 관리하기 힘든 한옥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애국심이 대단하신 모양입니다.”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원래 한옥을 좋아합니다. 조용하고, 서늘하고. 아무리 날이 더워도 마루는 차갑거든요.”

“그럼 두루마기는요?”

“변별력을 주는 거죠.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을 구분할 줄 모르니까요. 벌써 중국이랑 일본에서 우리 약을 따라 만들어 팔아서요.”

“아, 걔들이 좀 그렇죠? 중국은 이름부터 맛까지 싹- 베껴 따라 하고. 일본은 따라 해 놓고 아닌 척-하고. 안 그렇습니까?”

“예. 골치가 아픕니다만, 그래 봐야 질 낮은 도둑질이지 않겠습니까? 원조는 못 따라오는 법이니까요.”

“아, 그럼요. 그럼요!”

아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 대청마루가 광활할 만큼 크고, 거리가 먼데도 딱 두 사람만 이야기를 하니 듣지 않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쟁반이 금세 비었다. 아진이 빈 쟁반을 들고 일어나 다실을 나왔다. 물론, 슬쩍 석주를 훔쳐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쩐지 석주가 영 마음에 쓰였다. 분명 웃고 있는 낯임에도 불편해 보였다.

……에이. 제가 뭐라고 그를 신경 쓰겠나.

아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텅 비어서 들어오는 접시를 씻고, 부족한 반찬을 새로 하고, 덩치 좋은 장정들이 끊임없이 먹어 치우는 떡갈비와 전을 다시 부치고. 허리 들 새 없이 일하다 보니 시간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아진아. 가서 반찬 놓고 와라.”

이순이 아진에게 말했다. 설거지를 하던 아진이 물기를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이 그에게 널찍한 쟁반을 들려 주었다.

아진이 그득히 채운 반찬을 들고 다시 대청마루로 들어섰을 땐 전과 달리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배곯은 짐승처럼 음식을 먹어 치울 땐 언제고, 지금은 하나같이 수저를 가만히 내려 두고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진이 상 끄트머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반찬을 올리는데, 석주가 한숨 섞인 어투로 말했다.

“우리는 서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말에 기헌이 냅다 말을 휘갈겼다.

“관심이 없어도. 그렇게 떡-하니 종로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 이거지 내 말은.”

“……신경을 끄세요. 그럼 서로 편할 겁니다.”

“…….”

정적이 도래했다. 아진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얼른 반찬을 올려 두고는 나왔다.

부엌으로 돌아온 아진이 설거지를 한 지 또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아진아. 가서 빈 술병 걷어 와라.”

또 다른 종이 아진에게 명령했다. 늘 그랬다. 종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아진이라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아진은 불평불만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안 한다고 땍땍거렸다간 병신이 일도 가린다며 혀를 찰 게 분명해서.

아진은 빈 술 상자를 들고 절뚝절뚝 대청마루로 향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어쩐지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술병 걷어 오는 일인데 뭐가 어렵다고. 손이 꽁꽁 얼 때까지 설거지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청마루 앞에 도착한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흡, 숨을 들이마시며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행히 아무도 아진에게 관심이 없었다.

분위기는 전과 또 달랐다. 난잡하게 뒤엉킨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직원들은 발그레하니 술기운이 올라와 있었고, 이제 배가 찬 모양인지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술잔이 더 많이 움직였다.

가장 취해 보이는 건 기헌이었다. 상체를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인 그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강 사장 덕분에 외국 놈들이 한국 뽕! 코리아 필로폰! 이라고 하면 돈을 다발로 싸 들고 온다지요? 그래서 나도 요즘 뽕 수출에 관심이 생기던데. 혹시 사정이 넉넉하면 거래처나 소개 좀 해 줄 수 있나?”

“…….”

석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이 거래처를 소개해 달라는 거지, 결국엔 네 몫을 떼어다 달라는 뜻이었다. 그저 꽁으로. 석주가 굳은 낯으로 술잔의 주둥이를 슥슥 쓰다듬는데. 기헌이 재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농담입니다, 농담.”

“거래처는 저도 잘 모릅니다. 각국마다 능력 좋은 식구들이 알아서 하고, 저는 약만 갖다 주거든요.”

“부럽네요. 나는 왜 그렇게 능력 좋은 식구가 없나 몰라.”

기헌이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옆자리에 앉아 안주를 집어 먹던 남자의 뒤통수를 뻑! 하고 후려갈겼다. 머리를 빡빡 깎은 남자였는데, 기헌의 오른팔, 그러니까 명진쯤의 위치에 있는 이가 아닌가 싶었다.

남자의 고개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분위기가 대번에 서늘하게 식었다. 그러든 말든 기헌은 대차게 남자를 비난했다.

“이 새끼야. 처먹지만 말고 너도 능력을 길러. 영어나 중국어 그런 것 좀 배우고.”

“……죄송합니다, 형님.”

남자가 기헌 쪽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가시방석이었다. 아진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며 상 여기저기에 놓인 빈 병을 거두었다. 가끔 병이 부딪칠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는데, 다 던지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아진은 빈 술 상자를 차곡차곡 채워 갔다. 다들 덩치가 좋으니 술 먹는 양도 엄청났다. 기다란 상을 타고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던 아진이 이내 석주의 상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빈 병을 수거하는데, 병 하나에 술이 조금 남아 있었다. 많이는 아니고, 한 잔에서 반 잔쯤. 어떡할까, 고민하던 아진은 곁에 있는 빈 잔에다 술을 쪼르륵 따랐다. 도박장에서 흔히 경험해 온 사내들은 남은 술을 버리는 것에 매우 민감했기 때문이다.

아진이 그렇게 텅 빈 술병을 품에 안는데. 버럭 고함이 울렸다.

“이 씨발! 다리 병신이 역겹게 술을 따라!”

몇 분 전 기헌에게 뒤통수를 맞은 남자였다. 화들짝 놀란 아진의 마른 어깨가 위로 튀어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아진에게로 향했다. 그 모두에는 석주와 기헌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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