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40화 (4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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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가…….”

“명진아. 괜찮아. 인사는 내가 해야지.”

석주가 명진의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에 명진이 짜증스레 혀를 차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석주가 진걸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뗐다.

“고마워.”

“……아닙니다.”

진걸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석주가 작게 웃었다.

“아니긴. 나 대신 배가 갈라졌는데, 인사는 해야지.”

“인사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사람들까지 붙여 두고?”

“음……. 아니. 물어볼 게 있어서.”

진걸이 눈썹을 들썩였다. 석주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특유의 저음으로 물었다.

“우리가 아는 사이던가?”

“예?”

“아니, 내가 기억을 못 하나 싶어서. 우리가 원래 알던 사이인가?”

“아닙……니다.”

“근데 왜 날 구했지?”

석주가 차게 식은 눈으로 진걸을 응시했다. 친구도 아니었고, 식구도 아니었는데 왜 저 대신 칼을 맞았냐는 질문이었다. 진걸이 마른침을 삼켰다. 까슬까슬한 이불을 주물럭거리던 그가 이내 석주의 시선을 받아 냈다.

“혹시 돈이나 주시지 않을까 하고요.”

“……뭐?”

“제가 아무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놈이라지만 평생 그렇게 살고 싶진 않거든요.”

“…….”

“뽕값이 얼마인 줄은 모릅니다만, 그래도 그 커다란 공장에서, 그 많은 생선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실어 나르는 걸 보면 사장님은 돈이 뒤지게 많겠다 싶었습니다.”

명진이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탄식했다. 반면 석주는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가 검지로 톡톡 자신의 무릎을 두드리다, 다시 물었다.

“돈. 좋지, 돈.”

“…….”

“근데 내가 돈에 목숨 거는 애들을 수도 없이 봐 와서 잘 알아. 결국 마지막에 돈과 제 목숨이 선택지에 놓이면, 하나같이 목숨을 선택해. 죽으면 돈 같은 건 하등 쓸모없으니 말이야.”

“…….”

“그래서 궁금하네. 넌 왜 목숨 대신 돈을 선택했을까.”

석주의 새까만 눈동자가 진걸을 뾰족하게 노렸다. 진걸이 갈라진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 짧은 한숨과 함께 답을 내놓았다.

“도박 한번 해 본 거죠.”

“도박?”

“네. 돈에 목숨을 건 도박이요.”

“…….”

“근데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피가 튀고, 비명을 지르고, 총소리가 들리고, 욕하고, 미친놈들은 낄낄 웃으며 무당처럼 칼춤을 추고……. 그런 상황이라 냅다 몸부터 날린 거지. 다시는 경험하기 싫습니다.”

“…….”

“그래서. 돈은 주실 겁니까?”

진걸이 석주와 눈을 맞췄다. 보통의 눈동자보다 조금 작은 눈동자는 메말라 있었다. 옅은 공포와 불안이 일렁였다. 그 눈을 빤히 보던 석주가 몸을 일으켰다.

“그래. 퇴원하면 사무실로 찾아와. 돈 줄게. 바깥에 애들 따라오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진걸이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다 터진 배가 아픈지 윽, 하고 신음하기도 했다. 석주가 그런 진걸을 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훗날 그를 거둘지 말지는 나중으로 미루고, 어쨌거나 저 때문에 저리 다쳤으니 돈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몸조리 잘 하고. 나중에 보자.”

말을 마친 석주가 명진에게 눈짓했다. 명진이 얼른 입구로 가 문을 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석주가 문으로 향하는데.

“사장님.”

진걸이 그를 불렀다. 석주의 발이 멈췄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석주가 고개를 반쯤 돌렸다. 침대 아래로 발 한쪽을 내린 진걸이 보였다. 배를 움켜쥔 그가 더없이 진중한 낯으로 물었다.

“약쟁이들이 어떻게 그 공장을 알고 들이닥쳤는지 아십니까?”

“……넌 안다는 말로 들리네.”

“예. 압니다.”

석주가 반만 돌렸던 몸을 모두 돌렸다. 진걸이 그를 보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중호파가 알려 줬습니다.”

그 말에 석주의 얼굴이 콰득, 구겨졌다.

번쩍 [큰 빛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양]*

새파랗던 나뭇잎이 하나둘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마당에다 비질을 하면 흙먼지만 일었는데, 요즘은 나뭇잎이 그렇게 많았다. 한 바닥을 다 쓸고 뒤를 돌면 또 나뭇잎이 떨어져서 아진은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빗자루를 휘둘러야 했다.

“사장님이 일하기 싫어지면 언제든 말하랬는데…….”

아진이 허공에다 손바닥을 탈탈 털며 중얼거렸다. 석주는 평생 놀고먹게 해 줄 테니 일하기 싫으면 말만 하라고 했다.

원한다면 본인의 방에 들어와 글공부를 해도 좋고, 한가득 사 둔 어린이용 설화 책을 읽어도 좋다고 했다. 술이 가지런히 진열된 찬장 한편에 초콜릿과 사탕을 한가득 두었으니 먹고 싶을 때마다 빼 먹으라고도 했다. 대신 먹은 만큼 뽀뽀를 해 달라는 남세스러운 소리도 했다.

아진은 그 유혹에 매시간 흔들리고 있었으나 그래도 열심히 참아 냈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한다.’

언젠가 꽃님이 한 말이다. 여기서 석주의 말에 좋구나, 하며 깨춤을 추면 분명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석주가 만들어 준 안락과 사치는 아진의 주제에 맞지 않는 거였다. 밤에만, 그와 함께하는 밤에만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진이 박박 비질을 하는데.

“아진아!”

부엌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이순이 그를 불렀다. 아진이 휙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아진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이리 와서 이것 좀 도와!”

“응!”

아진이 빗자루를 들고 헐레벌떡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은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는 전을 구웠고, 저기서는 국을 끓였고, 누군가는 채소를 썰었고, 또 누구는 식기류를 박박 닦아 윤을 내고 있었다.

오늘 손님이 온다고 상을 곱절로 신경 써서 차리라는 지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진은 전 굽는 자리에 투입됐다. 젓가락을 든 그가 얇게 썰린 소고기에 밀가루를 묻혔다가 달걀 물에 퐁당 빠트렸다. 그럼 이순이 그것을 집어 널찍한 팬 위에다가 얹었다.

그렇게 육전을 공장에서 플라스틱 찍어 내듯 만드는데, 종들이 또 쑥덕쑥덕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이 집에 손님이 오는 건 처음이지?”

“그렇지. 깡패 소굴에 죽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누가 와.”

“시부랄. 대체 누가 온다고 이렇게 난리야, 난리가.”

“뭐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도 오나?”

“설마 우리 사장님도 정치하려는 거 아냐? 막 다음 대선에 대통령으로 나오려나?”

“뭔 깡패가 대통령을 해.”

“왜 못 해. 사업 수완 좋고 똑똑하고 우리한테도 잘해 주잖아.”

“저번 주에 그 돼야지 놈 팔 썰리는 거 못 봤냐.”

“걔는 지가 잘못한 거고…….”

“그…… 있잖어. 내가 조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왜? 뭘 들었는데?”

“중호파가 온다더니만?”

그 말에 일순 부엌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말한 종에게 박혀 들었다. 종들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진도 가슴팍이 빵빵해질 만큼 공기를 들이켰다.

중호파가 온다니. 종들은 중호파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아마 서울 시민이라면 다 그들을 싫어할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때리고, 깨부수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추행하고,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발길질도 했다. 힘만 믿고 패악을 부리는 상종 못 할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었다.

도박장에 있을 때도 수금하러 간간이 왔는데 그럴 때마다 종이고 창녀들이고 다 구석에 숨어서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뭐!”

“진짜야?”

“중호파가 온다면 거기 대가리가 오는 거야? 나 대가리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나도 못 봤지. 누군들 봤겠어?”

“이름은 아는데. 뭐라더라. 박 어쩌구였는데.”

“박기헌, 박기헌. 도박장 사장이 맨날 뒤에서 욕했었잖아.”

“그래, 박기헌.”

“여길 왜 와? 전쟁이라도 나는 거 아니냐?”

“우리 여기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종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당장 어디로 숨거나 도망이라도 칠 기세였다. 아진도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중호파가 하는 손찌검은 종들이 오가며 툭툭 건드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 대 맞으면 일주일 내내 그 부위가 지끈거리곤 했다. 도박장에 있을 때도 다리 병신이라는 이유로 수시로 맞았었다.

아진의 낯이 우중충해지는데. 꽃님이 국자 뒤로 냄비 뚜껑을 탕탕 두드렸다.

“이놈들아. 그만 지껄이고 전이나 구워! 칼부림할 거면 요리는 왜 시키겠냐. 자기들도 딴에 사업하는 인간들이라고 점잖게 앉아서 입으로 싸우려는 거겠지.”

그 말에 종들아 아, 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아진이 다시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밀가루 위에 얹는데.

댕, 댕, 댕!

종이 울렸다. 석주가 왔다는 뜻이었다.

종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손을 앞치마에다 벅벅 닦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는데, 다실과 연결된 부엌 쪽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직원 하나가 나타났다.

“사장님이 여자들은 그냥 있고 남자만. 남자 종들만 나와서 인사하라십니다. 음식 나르는 것도 남자들만 하랍니다.”

그 말에 종들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러자 조직원이 문을 쿵쿵 두드리며 그들을 재촉했다.

“빨리빨리 움직이소.”

그 말에 남자 종들이 부리나케 부엌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쩔 줄 모르고 눈알을 굴리던 아진 역시 부엌 밖으로 발을 디뎠다.

“…….”

꽃님이 멀어지는 아진을 멀거니 바라봤다.

늘 그렇듯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아진은 일렬로 선 종들의 끄트머리에 섰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리고 검은 자동차들이 드르릉드르릉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차는 많았다. 딱 평소의 곱절이었다. 어찌나 줄줄이 들어오는지. 보통 우측 옆 마당에 주차하면 되는데 앞마당까지 차를 대야 했다.

아진이 번뜩이는 헤드라이트를 모르쇠 하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곧 차가 모두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린 이는 석주였다. 검은색 정장에 두루마기를 걸친 그의 등장에 조직원은 물론 종들까지 다 함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참고 문헌

*번쩍,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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