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39화 (3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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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꿈 꿨어? 귀신이라도 나온 거야?”

    “…….”

    아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눈앞에 있는 석주가 믿기지 않았다. 아직 피가 낭자한 그 꿈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 꿈을 꾸고 나면 항상 그랬다.

    교통사고가 나고, 진수가 죽고, 제 다리가 망가지는 꿈은 잊을 만하면 꾼다. 그래도 이만하면 나아진 거였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매일같이 꾸었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이 올 때까지 홀로 몸을 옹송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었지.

    이렇게 누군가가 저를 달래 주고, 어루만져 주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제 편이 생긴 것 같았다. 그 교통사고에서 가해자는 항상 아진이었던 터라. 모두가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던 터라.

    아진이 석주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사장님…….”

    “…….”

    석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다 아진의 엉덩이를 받쳐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후 마른 몸을 한껏 껴안았다. 아진 특유의 서늘하고 맑은 냄새가 밀려왔다. 가느다란 목에 코를 묻은 석주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꿈 꿨어. 응?”

    다정한 음성이 아진을 달랬다. 커다란 손으로는 등을 슥슥 쓸어 주기도 했다.

    석주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아진과 함께 밤을 보낸 게 벌써 몇 개월째인가. 근데 이렇게 못된 악몽에 시달려 깨는 건 처음 봤다.

    아진은 보통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다. 아무래도 종일 몸을 움직여야 하고, 다리도 편치 않으니 체력 소모가 말이 아니니라. 거기다 밤마다 제가 여기저기를 주무르고 좆을 들이밀며 괴롭히는데 곯아떨어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근데 이렇게 깨서 눈물도 그렁그렁하고, 몸은 바르르 떤다. 자는 동안에도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몸을 납작하게 누른 채 끙끙 앓았다. 분명 보통 악몽이 아니었다.

    “뭔데. 귀신이 나왔으면 굿을 해 주고, 사람이 나왔으면 찾아다 혼내 주마. 그러니 말해 봐.”

    다정한 음성에 아진이 힘을 바짝 주고 있던 어깨를 한결 풀어 내렸다. 석주의 품이 매우 안전하게 느껴졌다. 석주의 후끈한 체온에 몸을 비비던 아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사고…… 사고 나는 꿈을 꿔서…….”

    눈물이 아롱아롱 맺힌 속눈썹이 느릿하게 팔랑거렸다. 석주가 검지로 그것을 살살 털어 주며 물었다.

    “사고?”

    아진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당시의 기억을 누구에게 꺼내 놓는 게 처음이라 목구멍이 쉽게 트이지 않았다.

    석주는 아진을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아진의 뺨을 지분거리거나, 오목한 등줄기를 쓰다듬어 주거나, 아진의 입술에 촉촉 짧게 입을 맞춰 주기도 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거칠게 발씬거리던 아진의 호흡이 한결 차분해졌다.

    아진이 석주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날, 열 살의 그날, 제 다리가 꺾이고 누군가가 죽었던 그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순식간에 끝난 일이고, 아진의 다리에만 길게 남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래서 바깥에 나갈 수가 없어요. 차가 너무 무서워서. 또 차에 치일까 봐. 차가 이번엔 제 머리를 깔아뭉갤까 봐. 그 친구처럼…… 머리가 터질까 봐.”

    “…….”

    석주가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시의 사고가 아진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아주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을 슥슥 쓰다듬는데, 아진은 종알종알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들어 주는 이는 꽃님 다음으로 처음이라 멈출 수가 없었다. 신이 난다기보다는,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돈도 무용지물이에요. 나가질 못하니 쓸데가 없어서. 집을 구해서 혼자 살 자신도 없고. 저는 이렇게 죽을 때까지 사장님 집에서 일하고 싶어요.”

    “…….”

    “사장님 집은 넓고, 정원도 있고, 하늘도 볼 수 있고,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알 수 있으니까 천국 같아요. 도박장은 낮에도 밤에도 어두컴컴했거든요.”

    “학교도 그래서 가기 싫다 한 거니.”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듣기만 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가서 무얼 배우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아진은 병신에 등신이었고, 바보였고, 멍청이였다. 그날의 사고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바깥에 나가고 싶진 않았다. 매울 생각이 없는 구덩이는 안락하고 편안하다. 그 구덩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앉은 아진은 손바닥만큼 보이는 하늘로도 충분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아랫입술을 쭙 머금었다가 놨다. 그러고는 여린 선을 가진 아진의 턱을 매만지며 저음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그냥 여기 있어.”

    “……네?”

    “여기, 내 방에,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어.”

    “…….”

    “그럼 내가 세상을, 세계를 이 방으로 가져오마.”

    “…….”

    “너는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하얗고 작은 치아와 붉게 달아오른 혀가 슬쩍 보였다. 석주가 엄지로 그 아랫입술을 슥 문댔다. 엄지 끝에 축축한 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게 아쉬워 손을 떼고 아진의 입술 전체를 빨았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석주가 이상하다. 몇 시간 전 돼지의 팔을 자르는 걸 무심한 얼굴로 보던 이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됐다.

    아진은 혼란스러운데, 동시에 안도했다. 매일 밤 저를 품고 자는 석주가 여전히 제 눈앞에 있구나 싶어서.

    그리고 같잖은 우월감이 들기도 했다. 마당에 잡초처럼 서 있던 종들과, 팔이 썰린 돼지와, 그에게 꾸벅꾸벅 인사하는 조직원들과 저는 차별화된 사람이구나. 석주가 말했듯 ‘특별한’ 그의 사람이구나.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진이 자신의 뺨을 감싼 석주의 손을 조심히 쥐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말했잖아. 네가 좋다니까.”

    석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생긴 입술이 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눈매가 멋지게 접히고, 짙은 눈썹도 유순해졌다. 아진이 그 환상적인 미소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야 말았다.

    “저도…… 사장님이 좋아요.”

    정말 정말 좋아요.

    아진이 석주의 입술로 천천히 다가갔다. 석주는 그것에 동조해 주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진이 오롯이, 제 발로 다가오길 기다리는 거였다.

    마침내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순간, 석주가 아진의 뒤통수를 감싸 쥐며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입맞춤이 순식간에 질척해졌다.

    석주가 아까부터 탐나던 아진의 혀를 마음껏 얽어 빨았다. 치아를 핥고, 혀끝으로 작은 입 안 여기저기를 훑었다. 유달리 통통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아프게 빨기도 했다.

    “으응…….”

    입맞춤은 길었다. 계속해서 스치고 부딪친 아진의 코끝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석주는 입술이 얼얼할 때쯤에야 멀어졌다.

    아진이 푹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이미 그와 할 짓 못 할 짓 구분 없이 했는데도 그랬다. 아진이 손등으로 홧홧한 입술을 벅벅 문지르는데. 석주가 그를 품에 안았다. 눈알을 데구루루 굴리던 아진이 석주의 목을 껴안았다.

    석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석주는 기분이 좋았다. 길을 걷다가 금광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진에게 그런 기억이 있다는 게 기뻤다. 제가 굳이 아진의 발목을 꺾지 않아도 그가 제 품에서 도망칠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 * *

    멀끔한 정장 위에 두루마기를 걸친 사내들이 성큼성큼 병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질반질한 구둣발들이 하얀 복도를 짓누르듯 걸었다. 힘찬 발걸음에 검은 두루마기가 펄럭펄럭 나부꼈다. 물씬 풍기는 험악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일제히 벽에 붙어 섰다.

    그러든 말든, 가장 선두에 선 석주는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느긋하게 걸었다. 병실 호수를 찾는 눈이 설핏 구겨져 있었다. 그러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찾던 호수를 발견했다.

    석주가 병실 앞에 서자 명진이 얼른 문을 열었다. 병원 특유의 짙은 소독약 냄새가 담뿍 밀려왔다. 석주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셨습니까, 형님.”

    병실을 지키고 있던 조직원이 얼른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른 이들 역시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석주가 가장 앞에 있던 이의 어깨를 툭 건드려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1인용 병실엔 환자 하나와 조직원 넷이 있었다. 방금 석주와 명진의 등장으로 더 많아졌고. 명진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야들아. 잠깐 나가 보그래이.”

    그 말에 병실을 지키던 이들이 우르르 나갔다. 병실에는 환자와 명진 그리고 석주만이 남았다. 석주가 침대 곁에 있던 간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 후 버릇처럼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에 명진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다가왔다.

    “형님. 여기 병원인데예.”

    “아…….”

    석주가 담배를 꺾어 작은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깡패라도 지킬 건 지켜야 했다. 불한당에 파렴치한이라고 소문이 나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더군다나 병원과는 척을 지어 봐야 하등 득 될 게 없었다.

    석주가 기다란 다리를 꼬곤 환자를 바라봤다. 침대 머리맡에 [최진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진걸은 덩치가 좋았다. 그래 봐야 석주나 명진보다는 작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평균 사내보다 훨씬 큰 덩치임은 확실했다. 턱은 네모 모양으로 각이 졌고,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인지 스물여섯임에도 서른으로 보였다.

    피부는 까무잡잡했으며, 광대가 도드라졌고, 피를 많이 쏟은 탓에 얼굴이 희멀겠음에도 눈매는 강직하고 사나웠다.

    그는 침대맡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붕대가 두껍게 감긴 배를 잡고 있었다. 석주를 응시하는 눈빛이 무미건조했다. 그에 곁에 서 있던 명진의 이마에 불룩 핏줄이 올라왔다.

    “어여. 닌 사장님보고 인사도 안 하나.”

    “……안녕하세요.”

    진걸이 마지못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폈다. 명진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석주 대신 칼을 맞아 준 건 고맙다만 그렇다고 무례가 허락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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