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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34화 (3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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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가 아진을 품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마른 어깨에 턱을 올린 채 말했다.

    “그런 약 없어.”

    “근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너랑 살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서 그래.”

    “…….”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와는 지금도 살고 있지 않나. 같은 집에서,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데. 여기서 뭘 더 얼마나 같이 살겠다는 건지. 그 같이 사는 것에 임신이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아진이 사탕 막대를 잘근거리고 있으니 석주가 그것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마당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어…….”

    아진이 짧게 탄식했다. 아까워라……. 쪽쪽 빨면 아직 단맛을 느낄 수 있었는데. 더군다나 마당에 버리면 어차피 내일 제가 쓸어야 한단 말이다. 그가 아랫입술을 불룩 내밀었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몸을 안아 일으켰다. 아진의 마른 몸뚱이가 훌쩍 들렸다.

    “늦었다. 이제 자야지.”

    “네…….”

    아진이 석주의 목에 팔을 감았다. 석주는 아진을 안거나, 들거나, 만지는 걸 몹시 좋아했다. 아진은 처음엔 그의 손에 여기저기가 주물러지는 걸 꺼렸으나 이제는 적응해 버렸다. 석주가 저를 안아다 옮기는 것도 좋았다. 절뚝거리며 힘겹게 걷지 않아도 됐으니까.

    석주가 아진을 이불 위에 조심히 눕혔다. 아진은 익숙하게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버득버득하니 낡은 제 이불과 달리 보드랍고 매끈한 비단 이불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스몄다.

    석주는 큰 불을 모두 끄고, 구석에 놓인 작은 등 하나만 남겨 두었다. 그 후 두루마기를 대충 벗어 던지곤 아진의 곁에 몸을 뉘었다. 아진이 옆으로 몸을 돌려 석주를 바라봤다. 석주 역시 머리 아래에 팔을 괸 채 아진을 바라봤다.

    아진이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의 풍성한 속눈썹 아래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춤을 췄다. 그것을 구경하던 석주가 아진의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겼다. 자꾸 앞으로 내려오는 덥수룩한 앞머리가 영 거슬렸다. 그렇다고 자르라 할 순 없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석주는 머리가 뒤로 넘어갈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아진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말갛고 하얗고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낯이, 그리고 빛에 따라 짙어졌다가 밝아지길 반복하는 군청색 눈동자가, 이렇게 푹푹 찌는 여름에도 혼자 시원한 체온을 가진 게 참으로 신비로웠다. 도무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넌 꼭 귀하게 자란 양반집 도련님 같아. 생긴 것도 그렇고. 보들보들한 피부도 그렇고.”

    석주가 아진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석주를 흘겨보았다.

    “거짓말. 저 그런 말 처음 들어요.”

    석주가 피식 웃었다. 그야 너의 그 ‘꽃님이 아줌마’가 널 꼭꼭 숨겨 왔으니까 그렇지. 종들은 아진의 생김새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던데. 끽해 봐야 다리가 불편한 놈, 어린놈, 정도였지.

    허나 석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진이 자신의 생김새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길 바랐다. 그래야 이렇게 못난 제 곁에 있어 줄 것 같아서.

    “다 눈깔이 병신인가 보지.”

    그 말에 아진이 배시시 웃었다. 커다란 눈이 곱게 접히고, 기다란 눈꼬리가 원만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통통하고 붉은 입술은 치아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벌어졌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석주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아진아.”

    “네.”

    “내일도 올 거지?”

    아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끄덕끄덕 턱을 주억였다. 석주가 그의 뺨과 머리칼을 한 번에 크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얼마나 조막만 한지 제 손에 다 들어온다.

    “모레도 와야 해. 이제 너 없이 잘 자신이 없거든.”

    아진과 함께라면 밤이 즐겁다. 잠도 잘 잔다. 세 시간이나 자면 다행이던 몸뚱이가 그를 안으면 다섯 시간도 여섯 시간도 까무룩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자는 동안은 더위도, 핏줄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열기도 도망갔다.

    이전엔 아침만 오길 꼬박 뜬눈으로 기다렸는데. 이제는 아침이 와도 일어나기 싫어 아진의 엉덩이만 주무르고 있다.

    그에게 길든 석주는 이제 그 없이 밤을 보낼 게 무섭고, 두려웠다.

    어쩐지 부끄러운 말에 아진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의 손이 이불자락을 구겼다가 펴길 반복했다.

    “누, 누나들 부르시면 되잖아요. 예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아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놓았다. 그에 석주가 눈썹을 위로 비죽 올렸다.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아진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석주가 작게 웃으며 아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아진을 꽉 껴안았다. 얼음을 껴안은 것처럼 몸이 시원해졌다. 이마로 배어 나오던 땀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그 서늘함에 석주가 만족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좋아. 네가 제일 좋아.”

    “…….”

    “여자였으면 진즉 데려다 식을 올렸을 만큼 좋아.”

    “…….”

    “사실 남자라도 식 올리는 데는 문제 없긴 한데.”

    수군거리는 새끼들 있으면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널 빼앗아 가려는 놈이 있다면 그 역시 죽여 버리면 그만이고. 그게 설사 여태 널 숨겨 왔던 ‘꽃님’이래도. 혹은 네 부모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도. 나는 너와 함께하는 밤을 위해서라면 그 모두를 도륙 낼 수 있다.

    석주는 끔찍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리고 그런 석주의 생각은 추호도 모를 아진은 광대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채 ‘특별함’에 취해 있었다.

    “뭐…… 굳이 식 같은 거 안 올려도……. 저는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걸요…….”

    더듬더듬 이어진 말이 석주의 귀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조건도 제약도 없이 제 곁에 있어 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석주가 심각한 낯으로 물었다.

    “그거 떡 치자는 뜻이야?”

    “이, 이게 어떻게 떡 치자는 뜻이에요!”

    “근데 나는 섰는데?”

    석주가 보란 듯이 아랫도리를 아진의 엉덩이에다 비볐다. 뜨끈하고 단단한 살덩이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까부터 서 있었잖아요!”

    질겁한 아진이 빽 소리를 지르며 석주의 품에서 도망가려 했다.

    “……기억하고 있었어? 똑똑하네.”

    석주가 낭패라는 듯 쯧 혀를 찼다. 그러고는 도망가는 아진을 품에 안아 그의 허벅지 사이에 좆을 끼웠다.

    “으…….”

    아무리 겪어도 적응되지 않는 느낌에 아진이 목을 움츠렸다. 석주가 그런 아진의 목덜미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잘 자, 아진아.”

    “…….”

    “대답 안 해?”

    “네. 잘 잘게요. 사장님은 뭐, 잘 주무시든지 말든지…….”

    아진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에 석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여름밤이었다.

    * * *

    아직 해도 다 뜨지 못한 이른 새벽. 아진은 부엌 구석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아진아. 얘. 아진아.”

    그림자가 아진을 흔들어 깨웠다. 억척스러운 손길에 아진이 부스스 눈을 떴다.

    “어……. 아줌마…….”

    그림자의 주인은 꽃님이었다. 아진이 그녀를 보며 샐쭉 웃었다. 역시, 꽃님이 저를 가장 먼저 발견할 줄 알았다.

    꽃님은 이 집에서 가장 일찍 깨어나는 사람이었다. 식사 메뉴를 정하고, 종들에게 장 봐 올 것을 시키고, 그 밖에도 재료 손질을 해야 해서 늘 일찍 일어났다. 대신 그만큼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아줌마, 잘 잤어?”

    아진이 찌뿌둥한 허리를 뒤틀며 물었다.

    “더워서 자는 둥 마는 둥 했어. 넌 왜 여기서 자?”

    꽃님이 물었다. 그러다 아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더니 대뜸 욕을 퍼부었다.

    “씨팔놈들이 또 너 쫓아냈어? 다리 병신이라 같이 못 자겠대?”

    꽃님이 씩씩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진이 긍정이라도 하면 바글바글 끓인 솥 물을 사내종들이 모여 자는 방에다 엎어 버릴 기세였다. 아진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나 방에서 안 잤어.”

    “그럼?”

    “사장님 방에서 잤어.”

    “……근데 왜 여기 있어?”

    “사장님한테 말하고 일찍 나왔어. 이거 아줌마랑 같이 먹으려고.”

    아진이 껴안고 있던 것을 들어 보였다. 롤케이크였다. 서울 시내에 생긴 고급 제과점에서 파는 건데, 석주가 어제 저 먹으라고 사 준 것이다. 아진은 먹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고 또 참았다. 꽃님과 함께 먹으려고. 꽃님이 초콜릿과 사탕 같은 단건 좋아하지 않으나 빵은 잘 먹던 게 생각나서.

    석주는 기특하다는 눈으로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고는 별말 하지 않았다.

    “…….”

    꽃님이 아진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진이 벌떡 일어나서는 접시와 칼, 그리고 젓가락을 챙겨 왔다. 그러더니 작은 개다리소반을 하나 펴서 바쁘게 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얼른 먹어야 해.”

    아진은 케이크가 포장된 비닐을 까서는 큼지막한 크기로 잘랐다. 그것을 접시에 옮기고 젓가락을 들곤 꽃님을 뒤돌아봤다.

    “얼른 와, 아줌마.”

    “…….”

    꽃님은 아무런 말 없이 소반 앞에 앉아 아진이 내미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진이 반짝이는 눈으로 꽃님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꽃님이 어쩔 수 없어 젓가락으로 빵을 잘라 한 입 물었다.

    아진이 기다렸다는 듯 자신 역시 빵을 베어 물었다. 촉촉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몇 번 씹자 빵 사이에 발려 있던 달콤한 딸기잼이 느껴졌다. 아진의 광대가 봉긋 올라갔다.

    “너무 맛있다. 너무 맛있어. 그치 아줌마?”

    아진이 앉은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꽃님이 헛웃음을 흘렸다. 짐승도 아니고. 먹을 걸 뭐 저리 좋아하는지. 꽃님은 쯧쯧 혀를 차면서도 아진의 접시에 크게 자른 롤케이크 한 덩이를 새로이 올려 주었다.

    “단거는 뒤지게 좋아하면서. 혼자 먹지 날 왜 불러?”

    “아줌마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

    아진이 꽃님의 팔뚝에 얼굴을 기대며 배시시 웃었다.

    “여우 같은 새끼…….”

    꽃님이 모난 말을 하며 아진의 머리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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