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명진이 석주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형님, 저 잘했지요?’ 뭐 그런 뜻이 아닌가 싶었다. 석주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명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동안 아진은 벽에 기대어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엎어진 갈비탕을 발견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그가 깨진 그릇을 향해 손을 뻗는데.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아진아.”
석주였다. 아진이 얼른 그를 바라봤다. 석주가 가늘게 눈을 휘며 웃었다.
“밥 먹었어?”
“……예?”
“밥 먹었냐고.”
“아니……요. 저는 이따가, 나중에…….”
“이리 와. 같이 먹자.”
석주가 자신이 앉아 있던 방석을 쑥 빼 곁에 놓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툭툭 두드렸다.
“…….”
아진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려운 말도 아닌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을 끔뻑이고 있자 석주가 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아진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무 뽑듯 쑥 들어 올렸다.
아진은 눈 깜짝할 새에 방석에 앉게 됐다. 수십의 조직원의 얼굴이 다 보이는 상석이었다. 기겁한 아진이 다시 일어나려 했다.
“저 저거 치워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하면 되지.”
아진의 어깨를 내리누른 석주가 부엌 샛문 앞에 서서 상황을 구경하던 종을 바라봤다. 삼백안으로 뾰족해진 시선에 종이 퍼뜩 움직였다. 석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아진은 다른 종이 쏟긴 갈비탕을 치우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주의 앞에 새로운 국이 놓였다. 김이 폴폴 나는 국엔 고기가 가득했다. 잘게 썰린 파와 고명으로 올라간 달걀지단이 참 맛깔나 보였다.
아진이 저도 모르게 꿀꺽 군침을 삼키는데. 석주가 자신의 수저를 아진의 앞에 놓았다.
“먹어.”
“……예?”
“먹어. 저녁 안 먹었다며.”
“아……. 어…….”
아진이 머뭇거렸다. 그가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끔뻑이고만 있자 석주가 그의 손에 수저를 들려 주었다.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석주를 한 번 보고, 또 조직원들을 바라봤다. 조직원들은 저와 석주를 귀신 보듯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진이 수저를 느릿하게 밥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밥을 최대한 조심히, 예쁘게 떴다. 적당한 한 숟갈이 되었을 때. 그것을 들어 석주의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다실에 정적이 차올랐다. 물론 이전에도 조용했지만, 지금의 정적은 조금 달랐다. 무겁고, 딱딱했다.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명진은 들어 올리던 물잔을 아래로 툭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허나 아진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라고 석주에게 밥을 먹이는 게 편하겠나. 지금 이 순간이, 이 상황이 무엇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어서 정신이 다 혼미했다.
“어, 어른 먼저…….”
아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가 아무리 못 배운 이로서니 그래도 한국인인데. 어른이 먼저 한술 떠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
석주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돌연 씨익 웃더니 그것을 받아먹었다. 숟가락을 슬쩍 위로 올리며 빼낸 아진은 야무지게 반찬도 챙겨 먹였다. 그쯤엔 석주의 광대가 뒷산만큼 볼록하게 올라와 있었다.
음식을 씹어 삼킨 석주가 조직원들을 바라봤다.
“너희들도 먹어.”
“……예, 형님.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형님.”
우렁차게 인사한 조직원들이 일제히 수저를 들었다. 그들이 식사를 시작하면서 아진과 석주에게 박혀 있던 시선이 자연히 사라졌다. 아진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든 수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까딱까딱 흔들렸다.
그것을 보던 석주가 아진의 뒤통수를 크게 쓰다듬었다. 이 예쁘고 동그란 뒤통수에 돼지 놈의 불결한 손바닥이 닿았다 생각하니 또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더 조심히, 더 소중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밥 먹어.”
“네…….”
아진이 마지못해 수저를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밥 대신 고기가 가득한 국에 손이 갔다. 숟가락 가득 고기를 뜬 아진이 흘끔 석주를 봤다. 석주가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크게 벌린 아진이 고기를 듬뿍 입에 넣었다.
야들야들한 고기가 천상의 맛이었는데,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 * *
오늘은 아진의 설거지가 가장 먼저 끝났다. 아진이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누나들이 아진의 몫을 죄 끌고 가 대신 씻어 주었기 때문이다. 맞닥트리는 종들도 으레 별명처럼 부르던 다리 병신이라느니 깽깽이라느니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진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팔과 다리가 자꾸 결리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잠자리에 누운 아진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종들이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소리 없이 일어나 방을 나왔다.
아진은 복도 마루가 끼이익 비명을 지르든 말든 성큼성큼 걸어 석주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려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
“아진아.”
더운 여름밤, 상박에 나풀거리는 두루마기만 걸친 석주가 빙긋 웃으며 서 있었다. 아진의 요란한 발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들어와.”
석주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조금 샜다. 아진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어둑했다. 서재의 책상 앞만 훤했다. 아진의 뺨을 가볍게 쓸어 준 석주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책상으로 향했다.
“나 아직 일 덜 끝났는데. 먼저 잘래?”
“…….”
아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움직이는 석주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석주가 뒤를 돌아봤다. 그에 아진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사장님.”
“응.”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뭘?”
석주가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이며 물었다. 아진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또박또박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저 놀리지 마시라고요.”
“……내가 널 언제 놀렸어?”
“저녁 먹을 때. 그게 놀린 게 아니면 뭐예요.”
뾰로통한 말에 석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가 담배를 흐웁, 깊게 빨았다. 기다랗던 담배가 새빨간 불씨를 흩뿌리며 단숨에 짧아졌다.
석주가 기다란 다리로 느긋하게 아진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거대한 덩치에 겁먹은 아진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따지려고 왔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미친 짓이다, 싶다. 제가 뭐라고 사장님에게 따지나.
“…….”
아니나 다를까. 석주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진이 볼 안쪽 살을 꽉 씹었다. 몇 시간 전의 돼지처럼 목덜미가 잡혀 마당으로 내던져지는 제 모습이 상상됐다.
……무지 아플 것 같은데.
아진이 눈을 꾹 감으며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는데. 석주가 아진의 손목을 쥐었다. 그 손길이 우악스럽거나 거칠지 않았다.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아진이 퍼뜩 얼굴을 들었다. 석주가 눈썹을 어그러트린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편했으면 미안. 내가 이런 건 처음 해 봐서.”
“…….”
예상 밖의 반응에 아진이 입을 벙긋 벌렸다. 그가 말하는 ‘이런’ 게 무엇을 뜻하는 건진 알 수가 없지만,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매우 놀라웠다.
아진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석주의 손이 그의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그가 뼈가 뾰족하게 도드라진 팔꿈치를 매만지며 변명했다.
“그냥…… 보여 주고 싶었어. 네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그럼 너를 함부로 대하는 이가 없을 테니까.”
사실 석주도 아진을 옆구리에 끼고 밥 먹을 생각일랑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돼지 놈이 아진의 뒤통수를 북처럼 후려치지만 않았어도 그냥 엉덩이나 몇 번 주무르다가 보냈을 것이다.
근데 아진이 개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며 맞는 순간 눈이 빙글 돌아갔다. 아진이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종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손찌검을 당하다니. 바깥은 어떨지 몰라도 석주의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진에게는 더욱, 없어야 할 일이고.
허나 그것으로 아진이 불편했다면 석주의 잘못이었다.
“미안해.”
“…….”
지나치게 쉽게 나온 사과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이전에도 석주의 사과가 값이 쌌다는 걸 상기했다. 사과하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가 참…… 멋졌다.
아진은 나이가 어리지만, 세상에서 구를 만큼 굴렀다.
그가 지금껏 봐 온 어른들은 하나같이 고압적이었고, 아집이 셌으며, 욕심이 많았고, 자존심도 높았다. 그래서 뭘 잘못해도 사과할 줄 몰랐고 되레 빽빽 소리를 지르며 윽박질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 분명 어른을 보고 만든 속담일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근데 석주는 아니었다. 뽕 파는 깡패 주제에 종에게 사과하고, 밥도 먹여 주고, 약도 발라 준다.
다시 생각하지만 석주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그래서 아진은 도무지 그를 이겨 먹을 수 없었다. 어쩌면 석주가 하나 남은 제 멀쩡한 다리를 으깨 놓고도 사과만 하면 넙죽 받아 줄지도 몰랐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앞,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한결 누그러진 아진의 기세에 석주가 씩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짙은 담배 냄새가 파도처럼 울컥 밀려왔다. 거기에 석주 특유의 후끈한 체온까지. 아진이 움찔 몸을 떠는데, 석주가 그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쪽 팔로 감쌌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어쩌지. 그건 안 돼.”
“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온 세상에 네가 내 사람인 걸 알릴 거라고. 그러니 아진이 네가 적응해.”
“……미안하다면서요?”
“응.”
석주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침에 젖어 반질반질한 아랫입술과 가지런하고 작은 아랫니가 보였다. 석주가 연하게 웃으며 엄지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진이 입을 딱 다물며 석주를 노려보았다.
“사장님 양아치예요?”
“응.”
석주가 이번에도 곧장 고개를 주억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