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진은 뒤늦게 상기했다. 자신이 왜 이 방에 찾아왔었는지를 말이다.
그가 꾸물꾸물 몸을 돌려 석주를 마주 봤다. 허나 석주가 불을 끈 터라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사장님…….”
아진이 석주의 뺨을 문질렀다. 축축한 눈물이 묻어 나왔다. 아진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혹사당한 몸이 어떠하든 간에 사람이 코앞에서 울고 있으니 애처로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석주가 눈을 꾹 감았다. 그의 잘생긴 뺨을 타고 굵직한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죽은 이들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때로는 아들 같았던 이들이. 오로지 저만 믿고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따라와 준 이들이.
그런 이들을 제가 죽음으로 내몰았다. 석주는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애들이야.”
“…….”
“내가 조금만 경계했어도, 조금만 더 알아봤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자책 가득한 말에 아진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나 해 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사장님 잘못 아니에요,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죽은 상황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진짜 석주의 잘못으로 애꿎은 목숨이 죽은 것이면 어쩌나. 그럼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아니라 비난이 될 터였다.
아진이 석주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감미로운 음성으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다 좋은 곳에 갔을 거예요.”
“…….”
“꽃님이 아줌마가 그랬어요. 웃으면서 보냈으니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
석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밤사이, 아진의 군청색 눈동자가 옅게 빛나고 있었다. 석주가 그것을 지그시 바라봤다.
석주는 꽃님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도 뭐. 못 믿을 건 또 뭔가 싶었다. 나쁜 말도 아닌데.
정말 좋은 곳에 갔으려나. 여태 많은 동생을 먼저 보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고 죄스럽고, 자책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지. 그리고 분노해서 온갖 곳을 들쑤시며 피를 몰고 다녔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직 약이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흘러나갔는지, 공장 위치가 어떻게 발각됐는지 알 수 없으나 이른 시일 내에 찾아서 동생들을 죽인 이를 벌할 것이다.
석주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세게 말아쥐는데. 아진이 문득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사장님보다 일찍 죽었으니까, 다음 생엔 사장님보다 더 일찍 태어날 거예요. 그럼 사장님이 그 사람들을 형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라요.”
천진한 말에 석주가 눈썹을 올렸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석주가 나직이 대답하며 아진을 한가득 껴안았다. 품에 들어차는 청량한 아진이 참 좋았다. 이 순간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이,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그라서 정말 좋았다.
“아진아, 너는 참…….”
“네?”
“예뻐.”
“…….”
“생김새가 예쁜 게 아니라, 존재가 예뻐.”
석주가 아진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그러자 아진이 빼꼼 얼굴을 들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몰라도 돼. 나만 알면 되니까. 인제 그만 자. 괴롭혀서 미안해.”
“……네.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아진이 바르게 인사했다. 석주가 그의 등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래. 잘 자. 아진아.”
파란 꿈을 꿀 것 같았다. 달빛과, 파도와, 아진의 눈동자와 닮은 파란 꿈 말이다.
염절의 끝물
온 세상에 어둠이 내렸을 때쯤. 집 안 가득 종소리가 울리고 조직원들이 퇴근했다. 인사를 마친 종들은 바지런히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아진도 그 틈에 끼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실에 상을 펴고 방석을 깔았다.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덩치가 커서 다닥다닥 붙여 놓으면 안 되고 널찍하게 떨어트려 놔야 했다. 식기들 역시 적당한 넓이로 깔아야 했다.
아진은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수저를 놓았다. 그리고 반찬을 가지러 부엌으로 돌아가려는데. 두루마기 자락이 펄럭거리며 아진의 앞에 나타났다. 아진이 고개를 올렸다. 석주가 서 있었다.
“…….”
“…….”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먼저 입을 뗀 건 아진이었다. 그가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물었다.
“왜…… 벌써…….”
“오면 안 돼?”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석주의 집이다. 그가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나. 갑자기 부엌에 쳐들어와서 오늘 여기서 잘 거니까 다 꺼지라고 해도 그러라며 이불을 깔아 줘야 했다.
다만 평소보다 너무 이르게 나타난 게 의아했다. 원래 석주는 내내 방에 있다가 상이 다 차려지고, 조직원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으면 명진이 그를 데리고 왔었다. 이렇게 가장 먼저 나타난 적은 없었다.
“배, 배가 많이 고프신 거면 일단 사장님 밥부터 내올까요?”
아진이 친절하게 물었다. 밥 먹으러 일찍 나타난 이유가 무엇이겠나. 배가 고프니 왔겠지. 아진의 사고로는 그 이유밖에 도출할 수 없었다.
“아니. 괜찮아. 천천히 해.”
석주는 아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더니 상석에 가 앉았다. 그런 석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사장님이 또 이상한 짓을 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근데 석주의 이상한 짓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진이 반찬을 놓고, 밥을 놓는 내내 계속해서 아진을 구경했다. 정말 말 그대로 구경이었다. 도무지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진은 흘끔흘끔 석주의 눈치를 보며 상을 차려야 했다. 제가 일을 잘 하나, 못 하나 감시하러 온 건가 싶을 정도였다. 헌데 마지막 순서인 국을 옮길 때까지도 석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쯤엔 조직원들도 하나둘 자리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미리 와 앉아 있는 석주에 놀라 꾸벅꾸벅 허리를 숙여 댔다.
아진이 두툼하고 야들야들한 갈비가 가득한 갈비탕을 석주의 밥그릇 옆에 내려놓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아진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꽉 주물렀다. 석주의 손이었다.
“으앗!”
기겁한 아진이 몸을 움츠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국이 출렁거리며 튀어 올랐다. 상 위로 하얀 국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다행히 많이 쏟진 않았다. 행주로 한두 번 훔치는 것으로 멀끔히 사라질 양이었다.
아진이 눈을 부릅뜨며 석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석주는 웃지도 않고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사장님 진짜 이상해.
아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행주를 가지러 가기 위해 허리를 펴는데. 뒤통수에 뻑, 하고 매서운 손찌검이 날아왔다. 그리고 빽 고함이 울렸다.
“야! 이 병신이 그거 하나 못 해서!”
집에서 일하는 종 중 하나였다. 쉰 살에 가까운 남자 종으로 성격이 괴팍하고 종들의 우두머리로 나서는 걸 좋아했다. 아무도 임명하지 않았고, 부탁하지 않았는데 늘 대장인 것처럼 행동했다.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찐 덩치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는 이였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고 꽃님이 그를 볼 때마다 혀를 차며 하는 말이었다. 거기다 냄새는 또 어찌나 나는지. 쿰쿰하고 퀴퀴한 악취에 여자 종들은 물론 남자 종들도 가까이 가길 꺼렸다.
아진이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아…….”
뒤늦게 신음이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정도 구박은 아무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서럽고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석주 앞이라 그런 모양이다.
아진의 뒤통수를 후려친 돼지가 석주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손바닥으로 아진이 흘린 국을 벅벅 닦아 자신의 옷에 문지르기도 했다.
“아이고, 사장님. 죄송합니다. 국은 제가 새로 갖다 드릴게요.”
“…….”
“넌 뭐 해. 빨리 가.”
석주의 국을 든 돼지가 아진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다행히 빗맞아서 넘어지진 않았으나 크게 휘청거리긴 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아진이 푹 고개를 숙이는데. 석주가 상 아래로 기다란 다리를 쭉 뻗었다.
그의 발뒤꿈치가 돼지의 발목을 걷어찼다. 간결하나 힘 좋게 뻗어 나온 발길질에 돼지는 그대로 철퍼덕 엎어졌다. 살이 어찌나 많은지. 바닥에 엎어지는데 물 위에 엎어진 듯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들고 있던 갈비탕은 쏟기다 못해 그릇이 반으로 갈라졌다.
모두의 시선이 돼지에게로 향했다.
“으윽…….”
돼지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꿈틀거리며 경련하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러잖아도 살에 파묻혀 납작하던 얼굴이 더 납작해진 것 같았다. 실로 코가 뭉개져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뻗은 다리를 접어 양반다리를 한 석주가 상 위로 턱을 괬다. 그리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 병신이. 그거 하나 못 해서.”
수 초 전 돼지가 아진에게 했던 말이었다. 흠칫 놀란 돼지가 석주를 뒤돌아봤다.
“사, 사장님?”
영 꼴 보기 싫게 생긴 면상에 석주가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제가 예술에는 식견이 없다만, 그래도 볼 거 못 볼 거 구분은 할 줄 알았다. 이거 원, 식사 전인데 입맛이 사라지게 생겼다.
아니꼬운 석주의 심기를 눈치챈 명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돼지의 멱살을 움켜쥐고 쑥 들어 올렸다. 돼지 무게가 족히 쌀 한 가마니는 훌쩍 넘을 것 같은데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게 가히 장사였다.
“이 새끼가 형님 밥상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지럴이야, 지럴이.”
“으, 죄송, 죄송합니다.”
돼지가 멱살이 잡힌 채로 고개를 까딱이며 사과했다. 명진이 성큼성큼 다실을 가로질러 바깥쪽으로 난 창호지 문으로 향했다. 그에 주위에 앉아 있던 조직원들이 문을 훤히 열었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마당이 나타났다.
명진은 돼지를 마당으로 훌쩍 던져 버렸다. 돼지는 무게 탓에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마루만 간신히 넘어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신발이 올려진 댓돌에 어깨를 처박은 그가 마당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흙을 온통 뒤집어쓴 돼지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명진이 쯧쯧 혀를 찼다.
“사내새끼가 돼서 조막만 한 애나 괴롭히고…….”
에잉, 명진이 희한한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았다. 조직원들이 키득거리며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