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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25화 (25/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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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아진은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석주가 설핏 웃었다. 하여튼 겁은 많아서는……. 아연실색한 아진의 낯이 영 우습고 귀여웠다. 오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아진의 입술을 검지로 가볍게 튕긴 석주가 그를 안고 일어났다.

“어어…….”

아진이 팔다리를 퍼덕거렸다. 그러나 금세 포기했다. 그와 여러 날을 함께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석주가 놔주기 전까지는 제 자력으로 그의 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단전 아래에 손을 곱게 모으고 석주에게 몸을 맡긴 아진이 물었다.

“어디, 어디 가세요?”

“욕실.”

“왜요?”

“찬물에 담가야지.”

“안 그래도 되는데…….”

아진이 발을 까딱거렸다. 쓰라리고 따갑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진은 아픈 걸 극도로 싫어하나 얄궂게도 맷집은 좋았다. 험하게 구르며 살아온 터라 고통에 이골이 났다는 게 맞겠다.

아진이 뭐라고 하든 말든, 석주는 고집스레 욕실에 도착했다. 욕실은 방보다 조금 서늘했다. 창이 크게 나 있어서 여름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쨍쨍하게 들려왔다.

석주는 욕조 곁에 있던 협탁을 대충 쓸어내리고는 거기에 아진을 앉혔다. 그 후 방으로 돌아가서 대야를 가지고 왔다. 석주의 피를 닦아 낸 손수건이 둥둥 떠 있는 대야였다.

석주는 핏물을 버리고, 수건은 세면대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 모습을 본 아진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거 그렇게 막 놔두면 세면대에 얼룩지는데. 수건도 얼른 씻어야 핏물이 빨리 빠지는데. 그런 말이 앞니를 툭툭 쳤다.

석주는 대야에 찬물을 콸콸 받았다. 손을 넣었다 빼며 온도를 확인하더니 그것을 아진의 발아래에 두었다. 그 후 가느다란 발목을 쥐어 물로 이끌었다. 그러더니 붉은 발등 위로 조심히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아파?”

석주가 물었다.

“조금요.”

아진이 대답했다. 모호한 대답이었는데, 석주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아진의 말을 ‘아파 죽을 것 같아요.’ 정도로 해석한 듯했다.

석주는 커다란 손으로 연신 물을 끼얹었다. 그 손길이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아진은 그런 석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머리통마저 잘생긴 깡패 사장님은 이상하다. 눈 병신에 잠 병신에, 종 발까지 씻겨 주고, 진심으로 걱정도 한다. 도박장의 금 사장은 직원들이 아프대도 지랄하지 말라며, 일을 땜빵 냈다간 목을 부러트릴 거라며 분기탱천했었는데.

아진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발등이 홧홧하든 말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있기가 힘들었다. 등줄기가 서늘한 게 이따금 몸이 부르르 떨리기도 했다.

아진이 춥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뗐을 때였다. 석주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보였다. 그는 아진과 달리 몹시 더워 보였다. 치미는 열기가 싫은지 드문드문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손을 찬물에 담그고 있는데도 더위를 타다니. 아진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사장님.”

“응.”

“땀나요.”

“괜찮아.”

석주가 아진의 발을 들고 조명 아래에 비춰 보았다. 붉어짐이 한층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자세한 건 의사를 불러 물어봐야 할 듯싶었다.

석주가 작은 발을 다시 물에 담그는데. 하얀 손이 쭉 뻗어 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야에 나풀거린다 싶더니 석주의 관자놀이에 맺혀 있던 땀을 훔쳐 갔다.

찰나, 닿았다 떨어진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

석주가 우뚝 굳었다. 느릿하게 팔랑거리던 속눈썹도 멈췄다. 그런 석주의 눈가로 땀이 흘러내렸다. 아진은 그것도 손가락으로 슬쩍 거두어 갔다. 그 손가락이 가진 찬기에 석주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가 천천히 아진을 올려다봤다.

아진은 무표정했다. 석주를 내려다보는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어두웠다. 그 얼굴이 새롭다. 마치 아진을 처음 보는 듯한 낯섦이 느껴졌다.

아진에게서 뿜어지는 백색의 차가움에, 달 같은 아름다움에, 석주의 심장이 쿵, 쿵, 쿵 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여름 특유의 열기 때문에 피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데. 심장까지 거칠게 발씬거리니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귓구멍을 왕왕 울려 댔다.

그때, 아진이 석주를 향해 양손을 뻗었다. 조명 빛을 담뿍 담아 하얗게 빛나는 손끝이 석주의 뺨에 닿았다. 이내 그 손이 석주의 뺨을 감싸 쥐었다. 차디찬 손이 순식간에 끓는 열을 머금었다.

“와, 사장님 무지 뜨겁다.”

아진이 가볍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 해맑은 음성에 석주의 입이 뻐끔 벌어졌다.

“너…….”

“…….”

“너는 정말이지…….”

석주는 열심히 입을 벙긋거렸으나 이렇다 할 말을 만들어 내진 못했다. 아진에게 목을 내어 준 채로 굳어 있었다. 아진은 끝끝내 석주의 열기를 모두 앗아 갔다. 땀이 맺혀 있던 이마가 순식간에 버석해졌다.

아진은 미련 없이 손을 거두었다. 석주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에 아진이 팔랑팔랑 발을 흔들었다.

“사장님, 저 발 시려요.”

“아, 어, 그래.”

석주가 얼른 대야를 끌어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물을 버리고, 보들보들한 새 수건을 가져와 아진의 발을 닦아 주었다. 그쯤 되니 저 먼 세상으로 떠났던 정신이 차츰차츰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가 보송보송해진 아진의 발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거 흉 지나? 내가 칼에는 많이 찔려 봤는데 덴 적은 없어서 모르겠네.”

“흉 지면 어때요. 어차피 다리 병신인데.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아진이 협탁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본인을 병신이라 칭하면서 하등 껄끄러움이 없었다. 마치 매일 듣고 산다는 것처럼. 아무리 병을 욕설로 이용하는 시대라지만 본인을 그렇게 칭하는 건 흔치 않았다.

석주는 아진의 말본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아진의 코를 검지로 퉁 튕겼다. 제법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아!”

아진이 두 손으로 코를 부여잡았다. 순간 코뼈가 뒤틀린 줄 알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겁도 없이 석주를 노려봤다. 허나 석주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신경 써.”

“왜요?”

“넌 내 사람이잖아.”

“…….”

석주는 씩 웃더니 욕실 밖으로 향했다. “따라와. 약 바르게.” 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수십 분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도 많이 줄 거고, 아프다 하면 쉬게 할 거고,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줄 거고, 누군가 그들을 못살게 군다면 선뜻 나서서 복수해 줄 거다.’

‘내가 그들의 집과 일터를 빼앗고 여기로 데리고 왔으니 책임을 져야지.’

아진이 절뚝절뚝 그를 따라잡았다. 석주는 서랍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간신히 반쯤 쓴 연고를 찾아냈다.

“소파에 앉아.”

석주의 명령에 아진이 얌전히 엉덩이를 붙였다. 전처럼 그의 발치에 앉은 석주는 손바닥 가득 연고를 짜 아진의 발등에 슥슥 펴 발랐다. 연고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인 아진이 조심스레 석주를 불렀다.

“저…… 사장님.”

“왜.”

석주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봐야 발등일 뿐인데 뭘 그렇게까지 꼼꼼히 신경 써 바르는지.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아진이 더듬더듬 말했다.

“부엌, 부엌에서 일하는 누나 중에요.”

“응.”

“이순이 누나가 있거든요. 그 누나가 사장님 방도 정리하고, 사장님 코, 콘돔도 갖다 줘요.”

“아아, 누군지 알아.”

“어제 그 누나가 이불 빨래하다가 넘어져서 팔꿈치가 까졌는데요.”

“응.”

“그 누나 팔꿈치도 이렇게 약 발라 주셨어요?”

뜬금없는 말에 석주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만면에 의아함이 차올랐다.

“……아니?”

“그 누나도 사장님 사람이잖아요. 아니면…… 어…….”

아진의 눈동자가 중구난방으로 움직였다. 석주는 그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석주가 피식 웃었다. 손에 묻은 연고를 수건에 벅벅 닦은 그가 아진의 옆에 앉았다. 그의 무게에 소파가 한쪽으로 푹 꺼졌다. 아진이 스르르 미끄러져 석주의 옆에 철썩 붙게 됐다. 석주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네가 특별해서 그래.”

“…….”

“아진이 너는 내 사람 중에서도 유달리 특별해서 손수 약 발라 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해 줘.

달콤한 말에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샐쭉 입을 벌리며 웃었다. 항상 찬기가 돌던 가슴 언저리가 뜨끈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진이 자신의 이마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겼다. 손바닥에 땀이 묻어났다.

정말 오랜만에. 더웠다.

* * *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가 그치길 반복했다. 땅이 마를 만하면 와르르 소나기가 왔다가 또 마를 만하면 소나기가 왔다. 근데 신기하게 하늘은 맑았고, 햇볕도 쨍했다. 비 덕에 더위도 한결 가셨다. 온 집에 문을 열어 두면 서늘한 바람이 숭숭 통했다.

덕분에 석주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정장 재킷에 넥타이까지 매고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상필이랑 덕수가 형님 더운 거 싫어하시는 거 알고 힘을 좀 쓴 것 같지예? 새끼들, 위에서도 잘나가는가 봅니다.”

검은 우산을 든 명진이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상주 완장을 찬 석주가 그를 따라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보다.”

오늘은 약쟁이들의 습격으로 인천 공장에서 죽은 조직원들의 장례식이 있는 날이었다.

집 뒷마당에서 치러진 장례식은 엄숙하고 간결하게 이루어졌다. 온 사방에 자랑하듯 하는 여타 깡패들의 장례식과는 달랐다. 화환도 없었고, 조문객도 없었다.

그렇게 조용한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엔 다들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먹었다. 누구 하나 울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다들 상복을 입은 것만 아니면 잔칫집이라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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