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괜히 짜증스레 대야에 물을 퍼부었다. 가만히 있다가 패대기쳐진 물은 복수라도 하듯 철벅거리며 튀어 오르더니 아진의 하얀 발등을 파도처럼 덮쳤다. 아진이 제자리에서 껑충 튀었다.
“앗, 뜨거!”
그가 발등을 움켜쥐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발등이 지글지글 끓는 것 같다 싶더니 그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아진아. 괜찮니?”
“얘는 왜 이렇게 덤벙대. 바빠 죽겠는데. 바깥에 가서 찬물에 담가.”
종들이 아진을 추스르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다실과 연결된 쪽문이 벌컥 거칠게 열렸다. 그리고 커다란 그림자가 부엌 안을 급습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명진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종들이 저들끼리 모여들었다. 명진은 도박장에서 남자 직원의 목을 칼로 썰었던 탓에 가장 기피 대상이었다. 그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흠뻑 젖은 손을 휘저으며 캐물었다.
“아진? 아진이가 누구고?”
그 말에 아진의 어깨가 움찔 튕겨 올랐다. 그는 손을 들거나 앞으로 나갈 필요도 없이 명진에게 발각되었다. 다른 종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아진이 뒤늦게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 전데요.”
“석주 형님이 시킬 일 있다고 오라신다. 대야랑 수건 들고 방에 가 봐.”
“아, 네!”
얼른 대답한 아진이 대야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대야 바닥이 조금 우그러져 있기에 조금 더 매끈하고 깨끗한 것으로 바꿔 쥐었다. 거기다 뜨거운 물을 잔뜩 담은 아진은 수건까지 옆구리에 꼈다.
명진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진이 짝이 맞지 않는 다리로 부엌 턱을 넘었다. 그의 뒤로 꽃님의 시선이 박혀 들었다. 아진은 그 시선을 눈치챘으나 구태여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아진은 행여 물이 식을까, 발을 바삐 놀려 석주의 방 앞에 도착했다. 밤이었다면 복도를 통했겠지만 대낮이었고 피를 뒤집어쓴 조직원들이 이 방 저 방 바쁘게 나다니고 있어 바깥 마루를 빙 돌아왔다.
창호지 문 앞에 대야를 내려놓은 아진이 나직이 석주를 불렀다.
“사장님. 저 왔어요. 아진이에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후 “들어와.”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먼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대야를 안에 들여놓고, 방에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긴 다리를 옆으로 늘어트리고 있던 석주가 아진을 반겼다.
“아진이 안녕.”
맨몸에 두루마기만 걸친 그의 한 손에는 새카만 총이 들려 있었고, 반대 손에는 총알 한 줌이 들려 있었다.
“나 좀 도와줄래?”
석주의 말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저는 총을 만질 줄 모르는데요.”
겁에 질린 목소리에 석주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총 아니야. 등을 다쳤는데, 손이 안 닿아서.”
그에 아진이 아, 하며 대야를 들고 석주의 앞으로 갔다. 석주가 소파에서 내려와 아진에게 등을 보이고 앉았다. 그가 어딘가 굼뜬 동작으로 두루마기를 벗었다. 아진이 그를 도와 두루마기를 아래로 내리며 종알거렸다.
“많이 다치셨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디랑 싸웠길-래…….”
석주의 등을 본 아진의 입이 서서히 닫혔다. 석주의 등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상처가 오른쪽 날갯죽지 위부터 등줄기 가운데까지 죽 가로지르고 있었다. 근데 조금 이상했다.
아진이 싸움에 대해 뭘 얼마나 알겠느냐마는 그래도 험하게 살아온지라 이런저런 상처를 많이 봐 왔는데, 이렇게 찢어진 건 처음 봤다.
힘주어 직선으로 그은 게 아니라 곡선으로 중구난방 갈라져 있었다. 칼을 꽂고 춤이라도 춘 것처럼. 이래서는 붕대를 감아 놔도 살이 쉽게 붙질 않을 터였다.
아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릎을 고쳐 꿇은 그가 수건을 뜨거운 물에 첨벙첨벙 담갔다가 뺐다. 조금 전까지 바글바글 끓던 물이라 그 온도에 손끝이 다 따끔했는데 너무 놀라서 뜨거운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진은 상처를 피해 조심조심 피를 닦아 냈다. 한참 전에 나온 피에 새로운 피가 찔끔찔끔 흘러나와 끈적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수건으로 살살 닦아 내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진의 말간 미간에 온통 주름이 졌다.
“사장님. 이거 큰- 병원 가야 해요. 알코올로 소독도 하고 꿰매기도 하고 약도 먹어야 해요.”
“큰- 병원 가야 해?”
석주가 아진의 아이 같은 말투를 따라 하며 웃었다. 아진이 석주의 옆구리를 슬쩍 꼬집었다. 등에 용 같은 칼자국을 단 주제에 웃다니. 어이가 없었다.
“웃지 말고요. 이렇게 큰 상처가 덧나면 사장님 뒤져요, 뒤져.”
석주가 재차 웃었다. 그의 널찍한 등이 들썩였다. 그게 어찌나 얄미운지. 아진이 콕콕콕 석주의 옆구리를 찔러 댔다.
“그만 웃어요, 그만. 상처 벌어지잖아.”
마음 같아선 살점이 떨어져 나올 정도로 꼬집고 싶다만 등이 온통 피범벅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진이 심통 맞은 표정을 한 채 쿡쿡 석주를 괴롭히는데. 석주가 손을 뒤로 뻗어 아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계속 그렇게 만지면 나 또 발기한다.”
“…….”
“이번엔 허벅지 사이에 안 넣고 엉덩이 사이에 넣을 거야.”
아진이 얼른 손을 거두었다. 석주가 나직이 웃었다.
아진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대가리에도 칼을 맞았나……. 왜 자꾸 웃는지 모르겠다. 푹 한숨을 내쉰 그가 다시 피를 닦았다. 석주는 총에 총알을 채웠다.
“근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아?”
“네?”
“소독이니 약이니 그런 거 말이야.”
“아……. 도박장에서 누나들이 자주 다쳤었어요. 손님들이 때려서.”
“때려? 왜?”
“이유도 거지 같아요.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나들 다 착했는데, 지들 마음대로 안 해 준다고 패고 발로 차고……. 사랑한다고 염병을 떨더니 다음 날에는 꽃뱀 년이라고 칼 들고 찾아오고…….”
다 불알을 떼 버려야 하는데. 아진이 중얼중얼 욕을 읊조렸다. 그에 석주가 자신의 이마를 긁적였다.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싶어서. 아진을 만나기 전에는 매일 밤 여자들을 불렀으니 오해할 만도 하다 싶었다.
“그…… 나는, 여자 안 때려.”
“사장님요?”
“응.”
“알아요. 도박장에서도 누나들은 다 그냥 보내 주셨잖아요. 밤마다 오는 누나들도 제 발로 걸어 나가고.”
아진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석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오해하지 않았다니 다행이었다.
“여기서 제 발로 못 걸어 나갔던 건 저뿐이죠.”
그 말에 석주의 얼굴에서 표정이 씻겨 내려갔다. 입이 절로 딱 다물렸다. 덕분에 아진은 조용히 석주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가 피에 젖은 수건을 물에 빨았다. 찰방찰방 물소리가 널찍한 방을 울렸다. 작은 손이 수건을 비틀어 차르르 물을 짜내는데. 똑똑. 누군가가 석주의 방문을 두드렸다.
“형님. 저 명진입니다.”
문 너머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들어와.”
석주는 문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진만 괜히 목을 움츠렸다.
곧 문이 열리고 명진이 들어왔다. 아진이 은근히 석주의 뒤로 숨었다. 그 곰살맞은 움직임을 눈치챈 석주가 아예 몸을 돌려 아진을 숨겼다.
명진이 두루마기를 뒤로 펼치며 앉았다. 그는 팔뚝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붕대 위로 피가 배어 나온 것으로 보아 작은 상처는 아닌 듯한데, 함께 온 조직원들이 너무 심하게 다쳐 와서 그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아진이 입을 삐죽였다. 맨날 행님, 행님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더니. 석주보다 덜 다쳐 오는 게 말이 되나. 명진이 조금 얄미워졌다.
“형님. 의사들 도착했습니다. 일단 형님 등부터 보라 칼까요?”
“아니. 애들부터 치료하라고 해.”
“그래도-”
“말 들어. 나는 내일 치료해도 안 죽어.”
“……예.”
“집에서 치료 못 하는 애들은 얼른얼른 병원에 보내고, 돈은 상관없으니까 수술이고 약이고 필요한 건 다 하라고 해. 아, 힘 좋은 애들 몇 명 붙여 보내는 거 잊지 마. 총도 들려 주고.”
“예, 형님.”
명진이 꼬박꼬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잠깐 호흡을 고른 후, 한 뼘 정도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의 눈가가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하얗게 뜬 입술을 핥은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상필이랑 덕수 장례식은…….”
“……일단 목숨 붙어 있는 애들부터 살리고 생각하자.”
“예.”
“‘그놈’은?”
“아, ‘그놈’은 심하게 다쳐서 오는 길에 바로 병원 보냈습니다. 우리 식구도 아이고 따로 입원시켜 놔도 노리는 놈들은 없지 싶어가요.”
“그래. 소식 들어오는 대로 알려 주고.”
“예. 식사는 방으로 들일까요?”
“응. 다른 애들도 각자 방에서 먹게 해. 몸 불편한데 나오라 하지 말고.”
“그라지요.”
명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석주에게 푹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뒤를 돌았다. 곧장 문으로 향하는 그에 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였다. 돌연 명진이 팩 고개를 돌렸다.
“어여. 아진이?”
갑작스레 호명된 이름에 아진이 파드득 몸을 떨며 고개를 뺐다.
“네, 네?”
“형님 잘 모시라.”
“……네.”
아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진은 두루마기를 펄럭거리며 나갔다. 문이 닫히고 아진이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그새 차게 식은 수건을 다시 물에 담그는데, 석주가 나직이 웃으며 물었다.
“명진이가 무서워?”
“네.”
“왜? 귀엽잖아.”
질색할 말에 아진의 얼굴이 괴상하게 구겨졌다. 곰 발바닥에 으깨진 호랑이 같은 얼굴인데 뭐가 귀엽다는 건지…….
“……사장님 진짜 눈 병신인가 봐요. 의사 오면 등 치료하고 눈도 치료하세요.”
진지한 목소리에 석주가 박장대소했다.
아진이 석주의 등에 엉겨 붙은 피를 모두 닦아 낼 때까지도 의사는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언제쯤 오려나 싶어 바깥에 귀를 기울여 보면 복도 마루가 쿵쿵쿵 울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리였다. 저 멀리서 탁하게 비명도 들려왔다.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바깥이 아비규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진이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혼자 능숙하게 붕대를 동여매던 석주가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데 사람이 죽어 나가요?”
아진이 부루퉁히 반문했다.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그저 약쟁이들이 난동을 부렸을 뿐이라고 말해 줄까 하다가 말기로 했다.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뭐 하러 하나.
“일하다 보면 가끔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아진의 낯이 어둑해졌다.
“그래서 도박장 사람들도 그렇게 쉽게 죽이신 거예요? 가끔 있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