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아진은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석주가 무언갈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사각. 바스락바스락. 듣기 좋은 소리였다. 함께 자는 종들의 코골이와 비교하면 오르골에서 나는 음악 같았다.
아진은 곁눈질로 석주를 훔쳐보다, 뒤늦게 그의 방을 구경하게 됐다.
석주의 방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도박장 사장이 쓰던 사장실은 온갖 장식품과 사치품들이 그득했는데. 석주는 종에게 오천 원이라는 거금을 턱턱 줄 수 있는 재력가이면서도 장식품이 별로 없었다.
조직원들과 함께 쓰는 다실과 대청마루에는 큼지막한 샹들리에를 달아 놨으면서, 그의 방엔 전구가 훤히 드러난 삿갓 모양의 조명과 벽에 툭툭 박힌 동그스름한 조명이 다였다. 지금 제가 누워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깔린 이불이라는 것도 이질적이었다.
서랍장은 무늬 없이 투박했으며, 한편에 놓인 소파만 값비싸 보였다. 그렇다고 방이 비거나 초라해 보이진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벽에 아진보다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파도 그림이었다.
널찍한 종이 가득 파도가 들어차 있었는데, 파도의 첫 시작 부분은 먹이 두껍게 발려 있다가 점차 갈수록 선이 얇아졌다. 검푸르면서도 새파란 색은 한기가 느껴지게 했다. 힘찬 그림인데, 몽글몽글한 거품은 또 부드러워 보였다.
진짜 바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진은 평생 바다라곤 구경도 해 보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림의 한쪽 귀퉁이에는 [汰會]라는 글씨가 힘차게 휘갈겨져 있었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태회파의 태회가 아닐까 싶었다. 파도가 모인다는 뜻의 태회.
한참 그림을 보던 아진은 눈알이 뻑뻑해지고 나서야 눈을 뗐다. 그가 이불을 올려 덮었다. 파도를 보고 있어서 그런가. 몸이 으슬으슬했다. 석주는 덥다는 듯 와이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두 개나 풀고 소매도 둘둘 걷고 있는데, 아진은 이불을 더욱 꽁꽁 싸맸다.
“…….”
아진이 물끄러미 석주를 바라봤다. 석주는 여전히 무언갈 적고 확인하고 있었다. 아진에게는 찰나조차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진은 그게 못내 서운했다. 서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관계였음에도 그랬다. 저는 그저 잠 못 자는 사장님의 숙면을 위해 온 한낱 종일 뿐인데 말이다.
자신의 아랫입술을 줄줄 빨던 아진이 참지 못하고 석주를 불렀다.
“사장님.”
“응.”
석주가 아진을 보며 대답했다. 아진이 석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먼 거리에서 마주쳤다.
“사장님은 왜 침대 안 쓰세요?”
“천성이 천민이라 침대에선 잠이 더 안 오더라고.”
그 말에 아진이 푸하, 하고 웃었다. 진짜 천민 앞에서 본인이 천민이라고 나불거리는 사장님이라니. 석주가 무슨 일을 하는 사장이든 간에, 어쨌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집에 살고, 지갑에 돈도 두둑하지 않나. 분명 천민은 아니었다.
아진의 웃음소리에 석주가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아진이 이불을 돌돌 말아 껴안으며 말했다.
“지금 이런 집에 사는데 어떻게 천성이 천민이에요.”
“…….”
“천성이 양반이니까 그런 거지.”
“…….”
“사장님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이제 제자리를 찾아온 거예요.”
“…….”
“꽃님이 아줌마가 그랬어요. 죽는 꼴을 봐야 진정한 팔자를 알 수 있다고. 평생 떵떵거리면서 살아도 나이 들어서 빌빌거리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했어요. 그럼 다음 생이 험하다고.”
석주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노인 같은 소리를 하는 아진이 신기했다. 석주는 얼굴도 모르는 ‘꽃님이 아줌마’가 아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구나 싶었다.
“내 죽는 꼴이 양반답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 사장님이 국회 의원이 될지,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
아진이 종알거렸다. 석주가 책상 위로 턱을 괬다. 그리고 새까만 눈동자로 아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너는?”
“네?”
“아진이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되돌아온 질문에 아진이 자신의 턱을 긁었다. 그러다 석주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보고는 손을 이불 안으로 숨겼다.
“저는…… 되고 싶은 건 없고,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허무맹랑한 소리에 석주의 눈가가 어그러졌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그러다 자신의 뺨을 아래로 눌러 내리며 미소를 사그라트렸다.
“불사신이 되고 싶다는 거야?”
“아니요, 아니요. 오십 년 뒤에 할아버지가 되면 죽겠지만, 그때까지는 살아 있고 싶어요. 종으로 살든, 성공해서 부자로 살든 상관없어요. 그냥 살아 있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픈 것도 싫고 죽는 것도 싫거든요.”
“…….”
석주의 낯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이불 속에 감춰진 아진의 다리를 흘끔 바라봤다. 그가 아픔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불행은 나눌수록 불행한 법이다.
그때. 아진이 팔과 다리를 버둥거려 이불을 펼치더니 턱 아래까지 당겨 덮었다. 그것을 본 석주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춥니?”
“조금요.”
“나는 더운데.”
“…….”
“이리 와.”
석주가 책상을 두드렸다.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삶. 아진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아진이 책상 옆에 섰다. 그러자 석주가 그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훌쩍 들어 올렸다. 종착지는 석주의 다리 위였다.
“어어, 사장니-임…….”
어색한 자세에 아진이 푸드덕거렸다. 석주가 그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앞을 보게 했다.
의자에 석주가 앉아 있고, 그의 허벅지 위에 아진이 앉은 요상한 꼴이 됐다. 어릴 때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안겨 본 적이 없었다.
아진이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굴리는데.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스며 왔다. 석주가 아진을 뒤에서 안은 거였다. 몸이 두툼한 모포라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바짝 굳어 있던 아진의 어깨가 사르르 녹아내렸다.
“가만히 있어. 자꾸 푸닥거리면 던져 버린다.”
“……네.”
석주가 아진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는 다시 만년필을 쥐었다. 아진의 눈동자가 글을 쓰는 석주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이불에 누워 있을 때보다 더 가까이서 들렸다. 그게 묘하게 평화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진은 석주의 품에 완전히 적응했다. 엉덩이 아래로 느껴지는 석주의 고추도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불보다 따뜻한 그의 품이 좋기만 했다. 아진은 곧 물에 익힌 가래떡처럼 석주의 품에 축 늘어졌다.
석주는 아진의 말랑하고 따뜻한 허벅지를 주무르며 일을 마저 했다.
“사장님은 어째 이렇게 따뜻하세요?”
아진이 가물가물 감기는 눈으로 물었다.
“여름엔 너 말고 대부분이 따뜻할걸. 네가 신기한 거지.”
“그런가…….”
“부산은 서울보다 더 더워. 너무 더울 때는 물속에 들어가서 잔 적도 있어.”
“으응, 그렇구나…….”
아진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묘하게 말이 짧아진 아진에 석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진은 꾸벅꾸벅 졸다가, 석주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가, 책상 위를 나뒹구는 볼펜을 만지작거렸다가 또 졸길 반복했다.
그러다 책상 귀퉁이에 놓인 네모난 금색 판을 발견했다. 철인지 금인지 모를 것으로 만들어진 명함 지갑이었다. 아진이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집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석주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만지지 말라고 하면 내려놓으려고. 그러나 석주는 흘끔 보고는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것을 허락으로 판단한 아진이 달칵 명함 지갑을 열었다. 빳빳한 명함이 나타났다. 검은색 바탕에 모서리마다 금테가 둘려 있었다. 글씨는 전부 흰색이었는데, 쨍한 흰색이 아니어서 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汰會물산
사장 강석주(姜射晝)
주소: 서울시 종로 아카데미 극장 맞은편
전화: (02) 732-5023]
아진이 빳빳한 명함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다 뒤를 돌렸다. 명함 뒤판에는 [汰會물산]이 적혀 있었고, 배경으로는 하얗게 일어나는 파도 무늬가 있었다. 아진이 다시 명함을 뒤집었다.
로숀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 뭘 알겠느냐마는, 그래도 괜히 멋져 보였다.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명함이 있다니. 정체성이라곤 없는 아진은 부럽기만 했다.
아진이 명함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석주의 시선이 덩달아 아래로 쏠렸다. 느릿하게 팔랑거리는 아진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그가 검지로 자신의 이름을 톡톡 두드렸다.
“낮 주(晝)야.”
“네?”
“강석주의 주가 낮이라는 뜻이라고.”
“……그래서요?”
“네 이름은 초저녁이라는 뜻이라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난 모르는 게 없어.”
석주가 어깨를 들썩이며 장난스레 한 말에 아진이 입을 헤- 벌렸다. 그렇구나, 하고 등신처럼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순진한 아이를 놀리는 듯한 기분에 석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아진의 앞머리를 슥슥 위로 올렸다. 동그랗고 하얀 게 달을 닮은 이마가 드러났다.
“나는 낮이라 덥고 너는 밤이라 추운가 봐.”
“…….”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 말에 아진이 흠, 하고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석주를 올려다보며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저는 제 이름이 좋은데요.”
“그래?”
“네. 병갑이, 창개, 돌포, 복쇠 같은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런 이름으로 살 바엔 평생 추위 타는 게 나아요.”
예상치 못한 이유에 석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런 흔하면서도 지랄 맞은 이름으로 사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겠다. 이름이 병갑이인 아진을 생각했더니 더 우스웠다. 석주가 쉽게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큭큭거리는데, 아진이 명함을 흔들어 보였다.
“저 이거 하나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