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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18화 (1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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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가 멍하니 아진의 얼굴을 보는데, 아진이 윗입술을 뾰족하게 만들며 말했다.

    “예쁘다고 하지 마세요.”

    신신당부하는 말에 석주가 나직이 웃었다. 이런 얼굴을 갖고 있으면서 그 말을 듣기 싫어하는 네가 참 못됐다.

    석주가 여린 선을 가진 아진의 눈썹을 엄지로 살살 훑으며 물었다.

    “너도 네가 예쁜 걸 알고 있지 않아?”

    “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니까 머리를 기르는 거잖아.”

    “그냥 꽃님이 아줌마가 기르래서 기르는 거예요. 저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나서 얼굴 내놓고 다니면 단명할 팔자래요.”

    아진이 눈썹이 간지럽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석주가 손을 아진의 뺨으로 옮겼다.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볼살이 뽀얀 보름달 같았다. 석주는 행여 제 손에 볼이 뭉개질까, 조심조심 그것을 매만졌다. 아진은 그의 뜨끈한 손바닥이 나쁘지 않아 잠자코 얼굴을 내주고 있었다.

    “그 꽃님이 아줌마는 무당이야?”

    “비슷해요. 아줌마 말은 다 맞아요.”

    석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가 꽃님이 꼭꼭 숨겨 놓은 보물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가 아진과 얼굴을 마주 댄 채 작게 속삭였다.

    “그래. 머리 자르지 마. 얼굴 내놓고 다니지도 말고. 웬만하면 고개 숙이고 다니고.”

    석주는 이 보물을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생각일랑 없었다. 오히려 꽃님도 모르는 곳에다 숨기고 싶었다. 제게는 그럴 권리가 없음에도 그랬다.

    말만 종이지, 신분제가 사라진 지금 아진은 그저 이 집에서 일하는 직원이었으며, 동시에 자유로운 이였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이곳을, 석주의 손아귀를 떠날 수 있는 이.

    진지한 석주의 말에 아진이 실소했다.

    “……아줌마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

    그가 고개를 털며 석주의 손에서 얼굴을 빼냈다. 그리고 꾸물꾸물 몸을 돌렸다. 졸지에 석주는 아진의 뒤통수만 쳐다보게 됐다. 석주가 무어라 불평하려는데. 아진이 선수를 쳤다.

    “잘래요.”

    “……응.”

    석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나불거렸다간 아진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뜰지도 모르니까.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하냐며 저를 노려볼 게 뻔했다.

    석주는 아쉬운 대로 뒤에서 아진을 껴안았다. 아진의 서늘한 체온에 코로 짙은 숨이 뿜어졌다. 풍성하고 보드라운 머리칼에서 묘한 풀 냄새가 밀려왔다. 목덜미에서도 부들부들한 냄새가 났다. 석주의 입꼬리가 주책없이 말려 올라갔다.

    석주뿐만 아니라 아진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제 몸을 끌어안은 석주의 품이 어찌나 따뜻한지. 등 뒤에 아궁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온도면 한겨울에 이불 없이도 잘 수 있을 듯했다.

    “사장님 엄청 따뜻하시네요.”

    아진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그에 석주가 아진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넌 차갑고. 그래서 잠이 잘 오나 봐.”

    “……제가 죽부인 대용인가요?”

    “죽부인치고는 너무 예쁘-”

    “…….”

    “너무 잘생겼지.”

    간신히 돌아온 정답에 아진이 슬쩍 웃었다. 그가 이제는 정말 잠들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을 때였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게 또 엉덩이를 쿡 쑤셔 왔다. 아진이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근데요, 사장님.”

    “응.”

    “고추 좀 단도리 해 주세요.”

    석주가 헛숨을 들이켰다.

    “…….”

    “…….”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진이 배를 앞으로 내밀며 석주의 아랫도리와 떨어졌다. 석주가 가만히 있는데도 혼자 꺼떡거리고, 아진의 엉덩이를 바늘처럼 쿡쿡 찌르는 게 정말 구렁이가 아닌가 의심이 됐다.

    몰래 움직일 거면 크지나 말든가. 어마어마하게 큰 데다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처럼 뜨겁기까지 하니 모른 척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석주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미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고추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진짜 가랑이 사이에 구렁이를 달고 다니는 거지. 아진도 사내인지라 고추가 제멋대로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석주의 품에서 빠져나오는데. 석주가 그의 허리를 쥐고 다시 자신 쪽으로 쭉 끌어왔다. 그러고는 아진의 귓가에 질색할 말을 속삭였다.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자도 돼?”

    “뭘요? 고추를요? 제 허벅지에요?”

    “응. 계속 찌르면 불편하잖아.”

    “…….”

    “네 허벅지 사이에 넣고 자면 괜찮을 거야.”

    아진이 입을 뻐끔 벌렸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개소리였는데, 진지하게 하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으니 석주가 알아서 아진의 허벅지를 슬쩍 들었다. 그 후 그 사이로 두툼한 살덩이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진의 허벅지를 내려놓았다.

    “으…….”

    괴상한 기분에 아진이 목을 움츠렸다. 다리 사이에 뜨끈한 게 꿈틀거리는 것이 ‘그날’ 밤을 떠오르게 했다.

    겹쳐진 몸, 맞물리는 가슴, 뚝뚝 흐르던 땀과 눈물, 뜨거운 열기, 전신을 관통하던 쾌락, 더부룩하게 차오른 배 속, 배꼽 아래쪽에 있는, 홧홧하고 따끔하고 지끈거리던 어느 부분.

    아진의 광대가 점점 더 발그레해지는데. 석주의 뜨끈한 입김이 귓불을 스쳤다. 아진은 화들짝 놀라 흠칫 몸을 떨어 놓고도 얼른 눈을 꽉 감았다. 석주가 웃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진은 속으로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밥하기, 설거지하기, 마루 닦기, 비질하기, 빨래하기 그런 거. 그랬더니 석주의 고추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진은 그렇게 자각 없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밤새 석주가 아진의 허벅지 사이와 엉덩이 사이를 헷갈리는 일은 없었다.

    * * *

    다음 날 밤. 아진은 다른 종들의 코골이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또 살금살금 고양이처럼 방을 기어 나왔다. 그리고 광대를 봉긋 올린 채 우다다 복도를 가로질렀다.

    석주의 방문 앞에 서서는 가쁜 숨을 골랐다. 그 후 무표정한 얼굴을 연기하며 똑똑 문을 두드렸다. 문은 어제와 달리 곧장 열렸다. 셔츠 차림에 입에는 담배를 문 석주가 씩 웃으며 아진을 반겼다. 아진이 슬쩍 눈을 피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진이, 오늘은 일찍 왔네.”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아진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말했다.

    “뭐……. 시간이 남아서…….”

    아진이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석주가 피식 웃었다.

    “그랬어?”

    방문을 닫은 석주가 짝다리를 짚고, 고개를 옆으로 꺾은 채 아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집요하고 길었다. 뺨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아진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벅벅 긁으니 석주가 그 손을 채 가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새 불그죽죽하게 올라온 손톱자국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잘생긴 얼굴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굴어.”

    “간지, 간지러워서…….”

    “세수하고 와. 비누 옆에 로숀도 있을 거야.”

    “로……숀이요?”

    “하얀색 통. 로숀이라고 적혀 있어. 세수하고 발라.”

    아진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가 멀뚱히 서 있자 석주가 욕실을 향해 턱짓했다. 아진이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석주의 욕실은 다실 옆에 있는 화장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양 변기가 있었고, 손 씻는 세면대가 있었다. 다른 점은 세면대 위에 큰 거울이 붙어 있고, 값비싸 보이는 금색 전기 조명이 있으며, 석주가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의 큼지막한 욕조가 있다는 거였다.

    아진이 어색하게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어푸어푸 거칠게 세수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비누를 손바닥에 마구 문질러 거품을 내기도 했다.

    석주는 이렇게 좋은 비누로 세수도 하고, 로숀도 바르는구나. 그러니 그렇게 피부가 좋지. 하얗고 매끈한 게 좌로 보나 우로 보나 깡패 같지 않지 않나.

    거품을 씻어 낸 아진은 로숀을 찾아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로숀…….”

    세면대 옆에는 온갖 통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아진의 눈에는 영 낯선 것들이었다. 평생 비누 하나로 온몸을 씻어 온 터라.

    그래도 로숀이 뭔지는 알았다. 도박장에서 일할 때, 누나들이 피부 결이 좋아진다며 세수하고 찍어 바르던 것.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것.

    허나 로숀의 생김새는 천차만별이었고, 듣기로는 숙녀용과 신사용이 나누어져 있다고 했다. 석주가 로숀이라 적혀 있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진은 글을 몰랐다.

    한참 고민하던 아진은 ‘비누 옆에’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누 옆에 있는 것을 곧장 집어 손바닥에 쭉 짰다. 그것을 벅벅 얼굴에 문댔다. 거품이 났다.

    “으이…….”

    아진이 짜증스럽게 신음했다. 로숀은 거품이 안 나는데. 잘못 찍었구나. 그가 다급하게 거품을 씻어 냈다.

    아진은 로숀 찾기를 쉽게 포기했다. 윗도리를 끌어당겨 대충 물기를 닦고는 도망치듯 욕실을 나왔다. 연달아 두 번이나 한 세수에 피부가 당겼지만, 그런 건 아진에게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진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석주는 서재에 있었다.

    석주의 방은 욕실-침실-서재순으로 붙어 있는데, 세 방 다 미닫이문을 설치해서 밖을 나가지 않더라도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멀찌감치에 앉아 있는 석주가 한눈에 보였다.

    “사장님. 안 주무세요?”

    아진이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에 만년필을 들고 종이를 뒤적거리던 석주가 아진을 바라봤다.

    “난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서.”

    그 말에 아진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럼 저 다시 갈까요?”

    “안 돼.”

    “아, 안 돼요?”

    “응. 안 돼. 먼저 자.”

    석주가 펜 끝으로 침실에 깔린 이불을 가리켰다. 아마 이순이 깔아 놓고 갔을 이불은 어제와 다름없이 깨끗하고 도톰했다. 아진이 쭈뼛쭈뼛, 절뚝절뚝 이불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괜히 석주의 눈치를 봤다.

    주인 없는 침상을 차지하려니 어쩐지 송구스러웠다.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아진이 이불 사이로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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