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16화 (1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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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멀찌감치 서 있던 석주가 얼른 대답했다. 그러면서 쿵쿵 마루 찧는 소리를 내며 냉큼 아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진이 반대로 접은 걸레로 마루를 훔치며 다시 물었다.

“사과 말이에요. 소쿠리에 사과 들었던데. 사장님이 생각하신 거예요? 사과해야 하니까 사과 사 줘야지, 하고?”

친절한 아진의 설명에 석주가 그제야 아, 하고 뜻을 알아차렸다. 아진이 드디어 소쿠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석주가 아진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아진이 깨끗하게 닦아 놓은 마루 위로 두루마기가 넓게 펼쳐졌다. 그가 아진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명진이가 가르쳐 줬어.”

그 말에 아진이 걸레를 탁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앞머리를 손등으로 마구 쓸어 넘기며 석주를 흘겼다.

“여름 사과 그거 맛대가리도 없는 거. 양반집에서 제사할 때나 어쩔 수 없이 사는 건데. 뭐 하러 비싼 돈 주고 사 와요. 사과는 날씨가 좀 서늘해졌을 때 따 먹어야 달고 아삭하죠.”

“…….”

“이왕 비싼 돈 들일 거 복숭아나 사 오시지.”

“그게 너한테 좋은 과일을 먹이겠다는 뜻으로 산 게 아닌데…….”

“그럼요? 올려 두고 제사라도 지내라고요? 사장님 일찍 뒤지라고?”

“아니…… 그것도 아닌데…….”

석주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는 억울했지만 아진의 말이 영 틀린 게 아니라 대꾸하지 못했다. 그래. 이왕 돈 들일 거였으면 달고 맛있는 과일이나 사 올 걸 그랬다. 바나나나 귤처럼 바다 건너에나 있는 것들.

“미안해.”

석주가 사과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명진을 발로 차 주는 상상을 했다. ‘사과할 땐 사과 아입니까?’ 하면서 킬킬 웃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개소리였던 모양이다.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는 석주에 아진이 쩝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부엌 식구들이랑 나눠 먹었어요. 맛은 좀 덜하긴 했지만…… 못 먹을 맛도 아니었고…….”

“다음엔 달고 맛있는 거로 사 줄게.”

사장님이 저한테 왜 과일을 사 줘요? 아진은 묻고 싶었지만 침묵을 택했다. 뭐, 사 준다는데 못 받을 건 또 뭔가. 이번에 제대로 말했으니 다음번엔 정말 귀한 과일을 사 줄 줄 몰랐다. 서양에서 온 과일 같은 거 말이다. 그런 건 돈 있어도 못 구하는 것이다.

어금니 사이로 배어 나온 침을 꿀떡 삼킨 아진이 다시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석주는 아예 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진을 구경했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잘근거리기도 했다.

아진은 알 듯 모를 듯하게 그를 곁눈질하며 벅벅 마루를 닦았다. 그러다 아까부터, 아니, 사실은 어제부터 궁금하던 것을 흘리듯 물었다.

“오늘은 누나 안 와요? 이제 비도 안 오는데.”

“누나?”

“창녀 말이에요.”

그 말에 석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늘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눈매가 더욱 시려졌다. 아진이 더듬더듬 자질구레한 말을 덧붙였다.

“그, 어, 온다고 하면 이순이 누나가 콘돔도 갖다 놔야 하고, 대문도 열어 놔야 하고, 그래서 물어본-”

“안 와.”

“……왜요?”

“누가 오든 못 잘 것 같아서.”

석주가 기둥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그의 눈가에 짙은 피곤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어제는 퍽 쌩쌩해 보이더니. 오늘은 ‘그날’과 비슷했다. 질긴 장마가 이어지던 날. 술과 약에 취해 퀭한 눈으로 제 손목을 움켜쥐었던 날 말이다.

목덜미 위로 돋아난 소름에 아진이 어깨를 움츠렸다가 폈다. 그리고 바쁘게 팔을 움직였다. 얼른 일을 마치고 부엌으로 가야겠다. 가서 따뜻한 아궁이 옆에 붙어 꽃님의 일이나 도와야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별안간 발목이 뜨끈해졌다.

석주가 아진의 발목을 감싸 쥔 거였다. 이 더운 여름에, 덜렁 드러난 마른 발목이 아까부터 눈에 거슬렸다. 마치 혼자 하얗게 추위를 타고 있는 듯해서.

실은 시원해 보여서 만지고 싶었다. 갈무리하기 어려운 제 열기를 묻히고 옮기고 싶었다. 아진이 제 열기를 다 가져가도 괜찮고, 제 열기에 스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석주의 눈이 탁하게 번뜩이는데. 기겁한 아진이 다리를 버둥거렸다.

“뭐 하시는-”

아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주가 그를 죽 잡아당겼다. 야차 같은 힘에 아진이 미끈한 마루를 타고 석주의 앞까지 쭉 끌려갔다. 아진이 헛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석주가 싱긋 웃으며 아진의 발목과 발을 감싸 쥐었다. 마치 추운 겨울. 포대기를 한 엄마가 맨발이 달랑 나온 아이의 발을 두 손으로 쥐고 열기를 묻히는 것처럼.

“발이 차네.”

“…….”

아진이 제 발을 감싸 쥔 석주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종놈 발이 더럽지도 않나. 뭐가 좋다고 웃으면서 주물럭거리는 건지 아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발바닥을 감싼 손바닥, 복사뼈를 주무르는 손가락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간지러운데, 어쩐지 발을 빼고 싶지 않았다. 아진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석주는 아진의 발바닥이 따끈해질 때까지 쥐고 만졌다. 그러다 은근히 종아리까지 주무르며 물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사 달라면 사 주시게요?”

“응.”

석주가 망설임 없이 긍정했다. 아진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석주가 하얀 이에 짓눌린 붉은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그때, 아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석주를 불렀다.

“사장님.”

“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세요?”

“뭘?”

“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사과하시냐고요.”

“실수?”

“네.”

“…….”

석주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내려왔다. 실수라. ‘그날’ 일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다니 저로서는 다행이다만, 마음이 좋진 않았다. 혹 아진에게 제가 저지른 ‘실수’와 같은 짓을 한 놈이 있나.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걸까, 싶어 화도 났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

“근데 저한텐 왜 그러세요? 사람도 막…… 죽이시는 분이……. 고작 하룻밤으로 며칠을 사과하시고…….”

“넌 예쁘잖아.”

“…….”

난데없는 말이었다. 아진이 설핏 인상을 썼다. 석주의 열이 옮아 불그스름해진 광대를 어깨로 슥슥 문질러 닦은 그가 벌침처럼 따끔하게 말을 쐈다.

“사장님 눈 병신이에요?”

“쿨럭, 뭐라고?”

석주가 목구멍에 엉킨 숨을 토해 냈다. 퍽 당황스러운 문장이었다. 으레 병신이라 하면 욕이나, 비아냥으로 쓰는데. 아진은 정말 눈에 문제가 있냐는 뜻으로 쓰고 있었다.

“제가 다리 병신인 것처럼 사장님은 눈 병신이시냐고요.”

“아닐, 걸……?”

“근데 왜 그러세요? 저 남자예요. 제 고추도 잡아 보셨잖아요.”

“…….”

“저한테 왜 예쁘다고 하세요? 남자한테는 예쁘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진이 앵두 같은 입술로 종알종알 불평했다. 석주가 피식 실소했다. 아진은 알고 있을까. 제가 그날 밤새도록 그의 뒤를 들쑤셨을 때보다 지금 더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석주가 양반다리를 한 자신의 무릎 위로 턱을 괴고, 아진을 바라봤다.

“그래. 듣기 싫으면 안 할게.”

“그리고 이제 사과도 하지 마세요. 돈도 받았고 사과랑 또 사과도 받았으니까.”

“왜?”

“자꾸, 자꾸 오시잖아요. 오지 마세요.”

“내가 오는 게 싫어?”

“네.”

아진이 냉큼 대답했다.

“…….”

석주가 뻐끔 입을 벌렸다. 누구든 간에 이렇게 제가 싫다고 원색적으로 티 내는 이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저와 척을 지고 있는 조직도 아니고. 제집에서 일하는 종이 저를 이렇게나 싫어한다니.

석주가 헛웃음을 흘리는데, 아진이 벌떡 일어났다. 걸레를 두 손으로 가지런히 모아쥐고는, 또 꾸벅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의 머리칼이 팔랑거리며 뒤집혔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럼 저 가 볼게요. 저녁은 좀 늦게 드시러 오세요. 부엌이 아직 준비가 안 돼서.”

겁도 없이 방자한 말을 통보한 아진이 석주를 스쳐 갔다. 석주가 쿵쿵 뒤꿈치를 찧으며 멀어지는 아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잔잔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아진아.”

“…….”

아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휙 뒤를 돌았다. 눈코입이 다 같이 동그랗게 벌어진 게 석주가 제 이름을 부른 것이 몹시 놀라운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꽃님과 몇몇 여자 종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그를 병신, 절름발이, 깽깽이라고 불렀으니까. 조직원들은 어여, 거기, 야 등으로 불렀고.

아진이 다시 석주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겁도 없이 석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석주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진이 설핏 미간을 찌푸리는데. 석주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나랑 자자.”

그 말에 아진이 헛숨을 들이켰다. 이름이 불렸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뭐라고요?”

“나랑 자자고.”

석주가 재차 말했다. 아진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손목을 흔들어 석주의 손을 털어 내려 했다. 허나 석주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빠져나오려 하면 할수록 아귀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먼저 포기한 건 아진이었다. 그가 석주 앞에 풀썩 퍼질러 앉았다. 뒤틀려서 제대로 접히지 않는 무릎은 반대쪽으로 쭉 폈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요. 제가 사장님이랑 또 자면 똘추라고 놀림당할 거예요.”

그 말에 석주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미친놈아, 개새끼야, 돌았냐, 뭐 그런 원망이 아닌,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이 우스웠다. 귀엽기도 했다. 그가 덥수룩한 머리 아래로 빼꼼 드러난 아진의 귓불을 슬쩍 만지며 물었다.

“누구한테?”

“그냥…… 사람들한테…….”

“그럼 사람을 막 죽이는 내가 그 사람들도 다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니냐.”

“안 돼요!”

아진이 눈을 홉뜨며 석주를 노려봤다. 이 세상에 그나마 얼굴 트고 사는 몇 안 되는 이들이다. 죽으면 안 됐다. 그럼 저는 정말 혼자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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