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골치 아프던 장마가 끝났다. 조직원들은 새벽부터 출근 준비로 바빴다. 아침 식사 역시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준비됐다.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은 석주가 다실로 들어섰다. 조직원들이 꾸벅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일찍 나오셨지 말입니다, 형님.”
“날씨가 쨍쨍-한 게 오늘은 차 바퀴가 날쌔게 굴러갈 것 같습니다, 형님.”
“응.”
석주가 작게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곧 종들이 헐레벌떡 바쁘게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석주는 그들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러나 하나같이 낯선 이들뿐이었다. 머리로 얼굴을 죄 가리고, 다리를 저는, 흰 피부의 종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가장 마지막으로 나오는 국이 들어설 때까지도 없었다.
남자 종 하나가 석주의 앞에 조심히 국그릇을 내려다 놓을 때였다. 석주가 그를 보며 물었다.
“그, 다리 저는…… 남자아이가 안 보이는데.”
“누구요? 아진이요?”
“아진이?”
처음 듣는 이름에 석주가 눈살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하룻밤을 같이 보내 놓고 이름도 몰랐다. 뭐, 제가 언제고 밤을 보낸 이들의 이름을 묻고 기억했느냐마는. 그래도 석주는 본인이 아진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에 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아진이 아닙니까? 우리 중에 다리 저는 애는 걔뿐인데.”
“어. 아진이. 맞나 봐. 걔는 성이 뭐야?”
“성? 그런 거 없어요.”
“성이 없어? 왜?”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종이 눈치를 보며 석주의 옆에 살포시 꿇어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아진에 대한 정보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희가 있던 도박장에 아진이가 온 게 아홉 살이었습니다. 납치됐는지, 부모가 팔았는지, 이름도 없이 들어왔어요. 근데 애가 살갑고 애교도 많고 그래서 같이 일하던 할배가 이름을 지어 줬다 아닙니까.”
“그게 아진이다?”
“예.”
“흔한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 할배가 평안에서 와서 사투리를 엄청 심하게 썼는데, 아진이 평안 말로 저녁이라고 한다나. 초저녁이라고 한다나. 뭐 그런 뜻이라고 했어요. 그때 아진이가 애라서 초저녁만 되면 꾸벅꾸벅 졸았거든요. 아무튼 성은 없어요.”
석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 초저녁. 묘하게 그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하물며 다리를 저는 것도 그렇고. 낮보다는 밤이 어울리는 이라서.
석주가 음, 하며 목으로 신음했다. 그러다 조직원들이 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아무리 개방적인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윗사람이 먼저 밥을 뜨는 게 예의로 내려오는 한국이라.
석주가 뒤늦게 국을 한술 떴다. 그리고 눈짓으로 얼른 식사하라 일렀다. 조직원들이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석주는 도리어 수저를 내려놓고, 다시 종을 바라봤다.
“그래서. 그 아진이는 오늘 왜 안 보여?”
“아파서 오늘 쉰답니다.”
“……아파?”
“네. 몸이 막 엄-청 차갑고, 떨고, 기침도 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뭔 병이 난 건지 피부도 울긋불긋하고 그래서 지금 방에 불 잔뜩 때 놓고 누워 있습니다.”
“…….”
“내 참. 아파서 열이 오르는 건 봤는데, 열이 식는 건 또 처음 본다니까요. 것도 이 여름에.”
석주가 입을 꾹 다물었다.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저 때문에 아픈 게 분명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제가 그렇게 험하게 다루었는데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제 주변에 있는 깡패 놈들은 칼에 후벼져도 히죽히죽 웃어 대는 놈들이라 미처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종이 이만 가 보겠다며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석주는 그가 사라진 부엌 쪽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아파서 엎어져 있는 아진이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 *
아진은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온종일 누워 있었더니 몸이 무겁고 찌뿌둥했다. 그래도 푹 잤다고 전신을 갉아 먹던 오한이 한결 가셨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아진이 팔뚝을 문지르는데. 어째 이불이 묵직했다. 아진이 무심코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
두툼한 이불이 몸을 덮고 있었다. 그냥 두껍기만 하면 다행인데, 비단에 금수까지 놓인 고급 이불이었다. 두툼하고 보드라운 게 언뜻 봐도 보통 값어치 있는 게 아니었다.
있는 집안의 혼수로나 살 법한 이불인데…….
아진이 화들짝 놀라며 이불을 발로 밀어 냈다. 몸이 무겁다 싶더니 저 무거운 게 제 몸을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아진이 뒤통수를 긁으며 주위를 훑었다. 제가 밤새 추위에 떨다 누군가의 이불을 빼앗아 온 줄 알고. 헌데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분명 제가 머무르는 남자 종들의 방이 맞는데, 아진 혼자였다.
“늦잠 잤구나.”
아진이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낯선 이불을 곱게 접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반으로 접는데도 끙, 소리가 절로 났다. 그래도 천이 고와서 저도 모르게 주물주물 매만지게 됐다.
아진이 이불장에다 이불을 간신히 욱여넣고 뒤를 돌았을 때였다. 멀끔한 바닥에 소쿠리 하나가 놓인 게 보였다. 뚜껑까지 있는 네모난 소쿠리였다.
아진은 그것도 그대로 들어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묵직하고 덜그럭거리는 게 뭔가 든 것 같았는데 열어 보지도 않았다.
제 것이 아니니 남의 것이다. 남의 것은 손대는 게 아니었다.
없이 살아도 나쁜 짓은 하면 안 된다. 실제로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콩밥을 먹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벌을 받는다고, 다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꽃님이 그랬다.
아진은 옷을 갈아입었다. 옷장 한편에 이틀 전 석주가 주었던 그의 셔츠가 곱게 접혀 있었다. 거적때기라 칭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제 옷 사이에 있기엔 매우 이질적인 옷이었다.
“……돌려줘야 하는데.”
아직은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조금 더 이따가. 나중에.
아진이 탁, 서랍장을 닫았다.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아진이 걸레를 박박 빨았다. 복도와 마루를 닦을 준비를 하는 거였다. 근데, 지나가던 꽃님이 그를 잡아 무언가를 내밀었다. 조그마한 갈색 병에 든 약이었다. 그리고 한약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먹어. 몸에 좋단다. 한약은 자기 전에 한 사발씩 데워 먹고.”
“힉……. 아줌마가 샀어? 이 비싼 걸?”
“……아니.”
“그럼?”
“몰라. 주웠어. 그냥 처먹으라면 처먹어, 좀.”
꽃님이 약을 아진의 품에 떠넘기고는 자리를 떴다. 아진이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갈색 병을 열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매캐하고 텁텁한 향이 올라왔다. 아진이 턱을 안으로 당기며 인상을 썼다.
“……쥐약인가?”
아줌마가 나를 죽이려는 건가? 싶었으나 에라 모르겠다, 하고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때부터였다. 이상한 나날이 시작된 건.
태회파의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아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독대 옆에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근데 볼이 간지러웠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가 아진을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한 시간째였다. 본인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커다란 키며 넙데데한 어깨며 번뜩이는 안광에 새빨간 담뱃불까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진이 푹 한숨을 내쉬며 뚝배기를 박박 문질러 닦았다. 오늘 저녁에 뚝배기 계란찜이 반찬으로 올라가서 설거짓거리가 많았다.
계란찜은 꽃님의 손맛을 안 조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꽃님이 평소보다 소금을 조금 더 넣고, 고춧가루까지 톡톡 뿌려 주면 좋다고 뒤집어졌다. 아진도 좋아했다. 보들보들하고 맛있는 계란찜.
아진이 그렇게 딴생각을 하며 어둠 속 시선을 애써 무시하는데. 함께 둘러앉아 있던 누나들이 숙덕거렸다.
“사장님은 저기 왜 서 있는 거야?”
“몰라. 감시라도 하나?”
“사장님이? 설거지하는 걸 감시한다고? 왜?”
“오늘 밥그릇에 눌어붙은 밥알이라도 있었나 보지.”
“설마! 우리가 설거지를 얼마나 꼼꼼히 하는데. 아진아. 너는 뭐 아는 거 있어?”
질문의 화살이 아진에게로 날아와 박혔다. 아진이 어……, 하고 입을 뻐끔 벌렸다.
“잘 모르겠어. 근데 혼내려고 온 건 아닐걸.”
“그걸 어떻게 알아?”
“혼낼 거였으면 우리가 설거지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냥 냅다 와서 이 뚝배기로 우리 머리를 후려치지 않았을까?”
아진이 거품 묻은 뚝배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
누나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도박장에서도 질문 하나 했다고 사람의 목을 자르던 미친놈들이 아닌가. 심기에 거슬리는 짓을 했다면 즉시 죽었을 터였다.
종들은 바쁘게 그릇을 닦았다. 헌데 아진만 느렸다. 이 설거지를 끝내면 불편한 만남이 있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진아, 도와줄까?”
일찌감치 설거지를 끝낸 누나들이 물었다. 아진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들은 발랄하게 인사를 하고는 석주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아진이 무쇠솥을 벅벅 문질러 닦을 때였다. 싸-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싶더니 넓적한 두루마기가 옆자리에 내려앉았다.
석주였다.
종들이나 앉는 작은 의자에 쪼그려 앉은 그가 아진의 곁에 있던 솥을 한 손으로 잡아 자신 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수세미를 주워 와 닦기 시작했다.
기겁한 아진이 엉덩이를 추켜들며 그를 말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설거지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왜 사장님이 하시냐고요.”
“뭐 어때. 내 거 내가 닦는 건데.”
“이건 제 거예요!”
“네 거야? 네가 샀어?”
“아니, 아니, 제 일이에요!”
“도와줄게.”
“사장님이 왜요! 할 줄도 모르면서…….”
아진이 석주를 흘겨봤다. 와서 뭘 하리라 예상하긴 했으나 그게 설거지일 줄은 몰랐다. 한껏 무시하는 아진의 말에 석주가 피식 웃었다. 잘생긴 입꼬리가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왜? 나는 평생 설거지 같은 거 안 해 봤을까 봐?”
“……해 봤어요?”
“그럼. 내가 날 때부터 깡패였던 것도 아니고.”
“…….”
날 때부터 깡패였을 것 같은데. 아진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꿀떡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