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진의 부름에 석주가 휙 뒤를 돌아봤다. 그는 다실 한쪽에 있는 술 찬장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값비싼 위스키가 두 병이나 들려 있었다. 옷차림은 늘 그랬듯, 맨살에 두루마기만 걸친 채였다.
근데 낯빛이 평소와 달랐다. 눈가가 검었고, 그러잖아도 날카롭던 턱은 칼처럼 벼려져 있었다. 깊게 찢어진 눈매에 짜증과 피곤이 가득했다. 살도 내려서 두루마기 너머 보이는 근육이 한껏 도드라진 상태였다.
“……넌 뭐야.”
석주가 잠긴 음성으로 물었다. 아진이 허튼수작이라도 부렸다간 저 묵직한 위스키 병으로 머리를 으깰 기세였다. 아진이 턱을 안으로 말았다.
“아, 저 아진인데요…….”
“뭐?”
“그, 어, 종이요.”
“…….”
석주는 도통 누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훤히 드러난 자신의 팔뚝을 매만지던 아진이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머리가…….”
아진이 뒤로 넘겨 두었던 앞머리를 내렸다. 그래 봐야 비에 축축이 젖어서 네 갈래로 갈라졌지만 그래도 이 모습이 석주에게 익숙하지 않을까 싶었다.
석주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좁아 들었다. 아진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아진이 꾸물꾸물 계단을 타고 다실로 올라왔다. 그의 머리칼에서 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아진이 손바닥으로 그것을 대충 훔쳐 바지에 닦았다. 석주가 물귀신이라고 냅다 후려치지 않은 게 용한 꼴이었다.
“술 드시게요?”
“…….”
“빈속에 술 마시면 안 되는데. 점심도 저녁도 물리셨잖아요.”
아진이 종알거리며 석주가 열어 둔 술 찬장의 문을 닫았다.
석주가 그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아진의 하얗고 마른 팔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살집일랑 없는 늘씬한 허리와 오목하게 들어간 등줄기, 움직일 때마다 함께 퍼덕거리는 날개뼈가 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거기다 추위에 볼록하게 도드라진 홍색 유두와 연지색 유륜이라니.
그것을 보던 석주는 문득, 도박장에서 봤던 남창 하나를 떠올렸다. 창녀들 사이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맨다리를 훤히 내놓고 있던. 덥수룩한 머리에 고개를 한껏 늘어트리고 있던. 다리를 절고, 공포에 부들부들 떨던 그 남창 말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였다. 석주가 따로 기억하고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기도 했다.
……그땐 저 얼굴을 못 봤기 때문이겠지.
석주가 축 처진 머리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아진의 맨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 있으니 그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스몄다.
집에 남창이 있을 줄이야. 운 좋은 발견이었다. 창녀가 없으니 남창이라도 쓰면 되지 않나. 아랫도리에 단단히 뭉친 열기를 뿜고 두 시간이라도 잘 수 있다면 돼지와도 떡을 못 칠 이유는 무엇인가 싶었다.
그런 석주의 생각은 꿈에도 모를 아진이 통통한 입술로 종알거렸다.
“제가 간단하게 안주라도 봐 드릴까요? 저녁에 먹다 남은 게 있을 텐-”
“이리 와 봐.”
“……예? 아, 네.”
아진이 절뚝절뚝 석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그러자 석주가 크게 한 걸음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짙은 술 냄새가 훅 밀려왔다.
석주는 이미 거나하게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아진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는데. 석주가 별안간 아진의 앞머리를 훌떡 까뒤집었다.
“어…….”
우악스러운 힘에 아진의 고개가 뒤로 휙 넘어갔다. 상체로 덩달아 넘어가서 반사적으로 손을 휘젓다 석주의 두루마기를 잡았다. 보드라운 천이 손가락에 감겼다. 그러다 중심을 잡고, 저의 방자함에 놀라 얼른 손을 놓았다. 그리고 구겨진 두루마기를 슥슥 문댔다.
그러면서 석주의 눈치를 보는데.
“…….”
석주는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었다. 아진이 눈을 끔뻑이며 그런 석주를 올려다봤다.
어스름한 초롱 빛에 아진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봉긋하니 예쁘게 솟은 이마. 어떻게 머리칼에 가려졌을까, 궁금할 정도로 커다란 눈. 물기가 이슬처럼 매달린 풍성한 속눈썹. 저도 남자라고 오뚝 솟은 콧대, 진주를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동그스름하니 예쁜 코끝. 통통하고 붉은 입술. 추위에 희게 질린 뺨. 가느다란 턱선. 그리고 가냘픈 목선.
석주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생김새가 어떠하든, 남자를 안는 건 제 취향이 아니었으나, 이 정도 몸에 이런 얼굴이면 못 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일본에서 소년을 대접받아 안아 본 적도 있고 말이다.
명진이 이 새끼는 대체 뭘 하는 건지. 집에 남창이 있으면서도 여태 일언반구 말을 안 하다니.
석주는 내일 그를 흠씬 꾸짖어 주리라 다짐하며 들고 있던 위스키를 방석이 쌓인 곳에다 대충 던졌다. 놀란 아진이 그것을 쳐다보는데. 석주가 그의 손목을 쥐어 왔다.
“가자.”
“네? 어딜?”
“값은 비싸게 치러 줄게.”
그 말에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딜 가자는 건지, 무슨 값을 비싸게 치러 주겠다는 건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대비가 이렇게 오는데 바깥에 나가겠다는 건가? 뭘 사러? 아니면 저보고 다녀오란 뜻인가?
아진이 우물쭈물 서 있자 석주가 그의 손을 당겼다. 거센 파도 같은 힘에 아진의 몸이 훅 휩쓸려 갔다.
아진은 석주의 방으로 ‘끌려’왔다. 길고 어두운 복도 위로 질질 끌리다 정신을 차리니 석주의 방이었다.
그렇게 궁금하던 그의 방에 들어왔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종들이 쓰는 방이 네 개는 붙은 것처럼 드넓은 그의 방을 둘러보기도 전에, 몸이 떠밀려서 이불 위로 철퍼덕 엎어지게 됐다. 그래도 이불이 두툼하게 깔려 있어서 아프진 않았다.
아진은 그 와중에도 제 몸에 묻은 빗물이 값비싼 이불에 스미진 않을까, 얼룩이 지진 않을까, 저더러 물어내라고 하면 어쩌나, 빨래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만, 이런 천은 막 빨면 큰일 나는데, 따위의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아진이 버둥거리며 이불 위에서 헤쳐 나오려는 찰나. 그의 곁으로 풀썩 옷가지가 떨어져 내렸다. 석주가 걸치고 있던 두루마기였다. 아진이 그것을 봄과 동시에 휙 석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석주가 이불 위로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아진을 타고 올라왔다. 길쭉하게 도드라진 쇄골과 두툼한 근육,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위압적이었다.
석주가 아진의 젖은 허벅지를 쥐어 당겼다. 그러자 느슨하게 묶여 있던 바지춤이 훌러덩 벗겨져 쑥 내려갔다.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그가 비싸게 치러 준다는 값이 무엇에 대한 값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 몸을 사겠다는 거구나. 저와 밤을 보내겠다는 거구나. 저와 떡을 치겠다는 뜻이었구나. 대체 왜 남자인 저를. 집에 여자 종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물며 얼굴이 꽤 볼만한 여자 종들도 많거늘.
아진이 어쩔 줄 모르고 숨만 색색 내쉬는 사이. 석주는 아진의 푹 젖은 속옷까지 벗겨 내고 마른 다리를 벌렸다.
희멀겋고 보드라운 살결이 도무지 몸종 같지 않았다. 어디 좋은 집안에서 햇빛에 닿을까 바람에 날아갈까 온갖 유난을 떨며 키운 예쁜 막내 도련님 같았다.
석주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후끈한 숨을 토해 내는데. 아진이 손끝이 파르르 경련하는 손으로 석주의 팔을 잡았다.
“사장님.”
“응.”
“사장님, 저, 저는 몸 안 팔아요.”
“왜? 이제 안 팔아?”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만 팔아. 후하게 치러 줄게.”
석주가 아진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릿한 비 냄새 너머 아진의 체취가 느껴졌다. 말랑하고 보드라운 냄새였다. 잘 빤 이불에서 날 법한 냄새.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온실 속에서 틔워진 하얀 꽃 냄새 같기도 하고. 거기다 비에 식어 차가운 체온이라니.
석주는 순간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 뻔했다.
눈매에 힘을 주고 눈을 홉뜬 석주가 혓바닥을 넓게 펼쳐 아진의 목을 핥아 올렸다. 원래 남창의 몸을 핥아 주는 취미는 없다만. 비에 가려진 아진의 원래 냄새가 궁금했다.
그 생경한 감각에 아진이 움찔움찔 몸을 털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했다.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삿갓 모양의 전구가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피부 위를 나도는 석주의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그는 콧속에 아궁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체온이 높았다. 더운 걸 못 견딘다더니. 정말 체온이 높았구나 싶었다.
아진이 그렇게 멍청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석주가 입을 크게 벌려 가슴과 유두를 물어 왔다. 차게 식었던 유두가 뜨끈한 혀에 짓뭉개지는 느낌에 아진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 사장님, 하지 마세요.”
아진이 석주의 어깨를 밀어 냈다. 감히 윗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멍석에 말릴 일이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러다 정신 차리면 꼼짝없이 남창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진의 가느다란 손목으로는 190의 건장한 사내를 밀어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손목이 우악스레 잡혔다. 아귀힘이 어찌나 좋은지.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뼈가 뒤틀리는 느낌에 아진이 눈가를 구겼다.
“사장님, 아프…….”
그때. 석주가 아진의 코앞으로 미남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차게 식은 얼굴이 야차 같았다. 아진이 헛숨을 들이켜며 굳었다. 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나는 말 많은 걸 안 좋아해. 시끄러우면 머리가 깨질 것 같거든. 지금도 빗소리 때문에 머리가 쪼개지기 직전이야.”
“……네?”
“시끄럽다고, 너.”
“아, 죄송, 죄송합…….”
아진이 석주에게 깔린 채로 고개를 까닥이며 사과했다. 평생 종으로 살아온 몸뚱이는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알아서 움직였다. 그에 석주가 커다란 손으로 아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냥 조용히 있으면 돼. 빨아라, 벌려라, 안 할 테니까 조용히만 있어.”
뭘 빨고 뭘 벌리라는 건지 아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알고 있지만 상세히는 몰랐다. 도박장에서 아진은 부엌일이나 담배를 파는 일 따위만 해 왔기 때문이다.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입 닥치고 가만히만 있으라는 것 같은데. 오해는 풀어야 하지 않겠나. 허나 나오는 대로 나불거렸다간 석주가 제 혀를 뽑아 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