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7화 (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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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많이 오네…….”

    바깥 마루에 앉은 아진이 시커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막 점심시간을 지났는데 하늘이 밤처럼 새카맸다.

    입술 끝에 꾹 힘을 준 아진이 발을 쭉 뻗었다. 둘둘 감긴 바지 아래로 매끈한 종아리와 복사뼈가 도드라진 발목, 그리고 하얀 발등이 드러났다. 아진이 그 발등을 빗속으로 집어넣었다.

    용마루에서부터 갈라진 비는 기와지붕을 타며 곡선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처마를 따라 졸졸졸 흘러내렸다. 거기다 발을 대고 있으면 등줄기가 움찔 떨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 느낌이 좋아 발을 넣었다가 빼며 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은 마당을 안 쓸어도 되고, 바깥 마루도 못 닦으니 일이 몇 없었다. 폭우가 그치면 일이 곱절에 곱절은 많아지지만 그건 추후 생각할 문제니 괜히 지금 사서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풀 냄새…….”

    아진이 납작한 가슴이 두껍게 부풀 정도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흠뻑 젖은 나뭇잎 냄새, 나무 냄새, 풀 냄새, 흙냄새가 한 번에 왕창 밀려들었다.

    아진에게는 낯선 냄새였다. 열 살 이후로 도박장 밖을 나온 적이 없는 터라 이런 자연의 향기가 몹시 새롭게 다가왔다. 한옥은 이런 냄새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러 대감을 모셨던 종들은 비가 빨리 그쳐야 집을 말릴 텐데, 나무 기둥이 썩으면 안 되는데, 부엌에 흙탕물이 밀려들면 안 되는데, 라며 온갖 걱정을 했지만 아진은 철없이 그저 좋기만 했다.

    다닥다닥 붙은 양옥이 유행하는 지금, 돈깨나 있는 양반들이 구태여 한옥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발가락이 꽁꽁 어는 느낌에 아진이 다시 무릎을 접었다. 그리고 손으로 발가락을 꾹꾹 매만졌다.

    장대비가 내린 지 사흘째. 쉬지 않고 이어진 비에 세상이 난리였다. 아진이야 바깥에 나가지 않아서 모르나, 어제. 물건과 음식 재료를 사러 시내에 갔던 남자 종들이 흙바닥에서 패싸움이라도 한 꼴로 나타난 걸 보니 정말 난리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집이 시끄러웠다. 평소와 달리 한낮인데도 조직원들이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태회파는 장마가 시작된 시점부터 일을 못 하고 있었다.

    차가 다니기 용이한 시멘트 바닥은 서울 시내에만 깔려 있고, 귀퉁이에 있는 이 저택의 주위는 온통 산과 흙이었다. 그래서 차가 나가질 않았다. 조금 가다 바퀴가 진흙 속에 빠져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단다. 그래서 다 같이 집에 있는 것이다.

    날씨로 일을 못 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날씨는 신의 영역이니까. 아마 대통령도 침실에 들어앉아 빗소리나 듣고 있을 게 분명했다. 깡패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석주와 관련한 문제였다.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 석주 역시 사흘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창녀가 집으로 오질 못하니까. 명진은 석주를 위해 여자를 업어서라도 데리고 오겠다며 당차게 집을 나섰지만 늦은 밤, 산에서 귀신과 싸운 꼴로 나타났다. 물론 창녀는 데리고 오지 못했다. 귓바퀴에 나뭇가지 따위나 꽂은 채였다.

    덕분에 조직원들은 석주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복도를 걸을 때도 숨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석주가 직접적으로 조직원 하나를 쥐 잡듯이 하거나, 신경질을 내거나 한 게 아니었음에도 자발적으로 눈치를 봤다.

    하긴, 아무리 심성이 착한 이라도 사흘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하면 성깔이 더러워질 테다. 근데 원래 사람도 막 도륙하던 이가 그러니 누구든 긴장할 수밖에.

    아진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쯧쯧 혀를 차는데. 벽에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부엌 쪽문이었다. 꽃님이 아줌마가 아진을 불렀다.

    “아진아.”

    “응?”

    “이리 와서 감자 깎아.”

    “응!”

    아진이 냉큼 일어나서 부엌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부엌은 벌써부터 저녁 준비로 바빴다.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 앞에 퍼질러 앉은 아진이 열심히 감자를 깎고 있을 때였다. 다실과 연결된 쪽문으로 이순이 푹 한숨을 내쉬며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밥상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꽃님이 공들여 담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이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밥상은 한 시간 전, 나갔던 그대로였다. 숟가락도 반질반질한 게 새것이었다.

    “사장님이 점심을 하나도 안 드셨어. 내내 담배나 뻑뻑 태우고…….”

    이순이 쯧쯧 혀를 차며 밥상을 부엌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석주는 장마 이틀째부터 다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밥상을 방까지 가져다주는데, 그마저도 저렇게 그대로 돌아오곤 했다. 마치 방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종들이 우스갯소리로 비 오면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게 아니냐 숙덕거릴 정도였다.

    “그 큰 덩치가 밥 몇 끼 굶는다고 죽을까.”

    꽃님이 밥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우리라도 먹자. 개밥으로 쓰기엔 아깝다.”

    그 말에 종들의 얼굴이 확 피었다. 그들이 밥상 앞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진은 그런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이틀째 밥을 제대로 못 먹는데. 미음이라도 끓여야 하는 게 아닌가?

    입술을 새치름히 뒤튼 아진이 벅벅 감자를 깎는데. 뒤통수로 손이 날아왔다. 꽃님이었다.

    “이놈아. 감자 살을 다 깎으면 어쩌냐. 아깝게.”

    “아우……. 아줌마. 아파…….”

    “그럼 간지러우라고 때렸겠냐. 이거나 먹어.”

    꽃님이 간장에 달달 볶은 불고기 한 줌을 내밀었다. 아진은 입술을 한껏 내밀어 놓고도 그것을 냉큼 받아먹었다. 꽃님이 아줌마가 볶은 불고기는 달고 짭조름하고 보들보들했다.

    이렇게 맛있고 귀한 걸 석주는 왜 안 먹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는 목구멍이 찢어지더라도 좋다고 먹을 텐데 말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마지막 일과가 남았다. 설거지. 세 끼를 차리느라 고생한 꽃님은 일찍 방으로 퇴근하고, 아진을 비롯한 말단 종들 셋만 남아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늘은 늘 전을 펴던 장독대 옆이 아닌 부엌 앞 처마에 자리를 잡았다.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설거지를 할 순 없으니 말이다.

    늦은 밤 바깥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비를 맞는 것도 아닌데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설거짓거리는 아진이 제일 많았다. 보통 부엌일은 여자가 주로 하고, 바깥일은 남자가 하는데 아진은 다리가 이 모양이라 대개 부엌일을 했다. 그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봐야 같은 일이고, 사실 따지고 보면 온종일 한시도 쉬지 않고 하는 부엌일이 더 힘든 건데, 어렸을 때부터 남자다움일랑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아진에게는 못내 서글픈 일이었다.

    그래서 아줌마나 누나들과 설거지를 하면 무겁고 커다란 것은, 이를테면 놋그릇이나 솥뚜껑, 냄비 같은 것들은 본인이 자처해 도맡곤 했다. 누나들은 그런 아진을 귀여워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어디서 얻어 온 사탕 같은 걸 건네주기도 했다.

    오늘도 그랬다. 아진의 앞에 놓인 대야에만 설거짓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찌감치 설거지를 끝낸 누나가 손을 치마 춤에 문지르며 아진에게 물었다.

    “아진아. 도와줄까?”

    “아냐. 들어가.”

    아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잘 자.”

    “응. 누나들도.”

    누나들은 미련 없이 떠났다. 혼자 남은 아진은 쏴아아-하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오늘은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는 꽃님도 없어 손이 새빨갛게 얼었는데, 시리지도 않았다. 마른 몸을 후려치는 밤바람이 더 추워서.

    아진은 이를 꽉 문 채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깨끗해진 그릇들을 부엌으로 옮겨 두고, 물이 가득 찬 대야를 추켜세웠다. 근데 다리가 어찌나 저린지. 또 대야는 왜 그렇게 무거운지. 무릎은 또 왜 말을 안 듣는지.

    “으아악!”

    그 무게에 휩쓸려 몸이 기우뚱한다 싶더니 처마 너머로 철퍼덕 넘어졌다. 운도 없는 아진은 빗줄기에 파인 고랑 위로 넘어졌다. 촥- 물이 튀었다. 전신이 대번에 축축하게 젖었다. 기겁한 아진이 갯벌 위로 올라온 망둑어처럼 펄떡거렸다.

    그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소매 끝과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와중에도 억척스레 내리는 비는 아진의 정수리를 꿀밤이라도 먹이듯 때려 댔다.

    “으…… 씨발…….”

    아진이 어색하게 욕을 짓씹으며 절뚝절뚝 다시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너무 억울하고 짜증이 나서 눈물이 다 핑- 돌았다. 이 꼴로 잘 순 없고. 씻어야 하는데. 언제 물을 데워서, 언제 씻고, 옷은 또 언제 빨고 자나.

    아진이 두 손으로 미역처럼 늘어진 머리를 마구 끌어 넘겼다. 시야를 가리던 머리칼이 사라지니 한결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여기서 퍼질러 앉아 엉엉 울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 우는 건 생존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진이 윗도리를 훌떡 벗었다. 그리고 물을 쭈욱 짰다. 바지도 벗을까, 하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미친 변태 놈으로 몰릴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아진은 널브러진 대야를 물로 헹구고, 벽에 곱게 세워 둔 후에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마솥에다가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불 앞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연신 푹푹 쉬기도 했다.

    “다리만 아니었어도 안 넘어졌을 텐데.”

    아진이 자신의 무릎을 주먹으로 혼내듯 때렸다. 그때. 삐그덕, 삐그덕, 덜컥. 생경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이 숨을 멈췄다.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가 무언가를 뒤지고 찾는 듯한 소리.

    도둑일까. 아니면 조직원인가.

    아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쪽문으로 다가가 슬쩍 문을 열었다. 습기에 눅눅히 젖은 문은 끼이익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덕분에 아진은 기척 없이 다실에 숨어든 이를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인영이 눈에 익었다.

    “……사장님?”

    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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