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6화 (6/261)

06

명령하지 않은 배려에 석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주인이었으면 ‘그래, 냉큼 떠 와라.’ 했을 텐데, 그는 쉽게 긍정해 주지 않았다. 아진이 우물우물 변명했다.

“부엌에 직접 들어가시기는 좀, 어, 좀 그러니까…….”

자고로 사내대장부는 부엌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점잖은 양반집 사내가 부엌에 들어가도 놀랄 판에 석주가 직접 들어간다니. 가서 손수 물을 뜨다니. 안 될 말이었다. 내일 명진이나 조직원들이 알면 기함하며 종들의 곤장을 칠지도 몰랐다.

아니, 사실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진의 마음이 편했다.

석주는 침묵했다. 그러다 선심 쓰듯 아진에게 유리병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아진이 그러잖아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고꾸라트리며 두 손으로 유리병을 받았다. 반질반질하고 올록볼록한 게 분명 값비쌀 게 틀림없었다. 제 몸값의 곱절은 되리라.

아진은 유리병을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석주가 그를 뒤따랐다.

아진은 다리를 절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다 한들 절뚝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었다. 다리 병신을 누가 좋아하겠나. 아무리 종이라도, 아니 종이니 눈에 거슬리면 내쳐지기 마련이었다.

다행히 아진은 넘어지거나 유리병을 깨트리지 않고 부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진이 지대가 낮은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래 봐야 계단 세 개만 내려가면 되는데, 높이가 높아서 아진에겐 퍽 힘겨웠다.

석주는 부엌에 들어오지 않고 문에 기대어 아진을 구경했다.

아진은 최신식 싱크대 앞에 서서 유리병을 씻었다. 그리고 깨끗한 수건으로 물기를 삭삭 닦아 내고, 쪼르륵 물을 담았다. 그 소리에 잊고 있던 요의가 아진의 아랫배를 탁, 하고 때렸다.

아진이 무릎을 비볐다. 당장이라도 오줌을 쌀 것만 같았다. 방광이 대체 언제까지 참으라는 거냐며 신경질을 내는 듯했다.

그러나 아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요의를 참았다. 석주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물 하나 따르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다리 병신이라고 생각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내 유리병이 가득 찼다. 아진이 그것을 들고 절뚝절뚝 문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석주가 손을 내밀었다. 아진이 잔 흉터가 많은 사내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잡고 올라오라는 뜻인가? 역시 사장님은 착하구나.

그가 유리병을 한 손으로 옮겨 쥐고 손을 뻗으려는데. 석주가 유리병을 채 갔다.

“내가 들고 갈게.”

“아, 네.”

아진이 서둘러 팔을 접었다. 광대에 발갛게 부끄러움이 올랐다. 그래도 머리카락이 얼굴 반절을 가리고 있으니 석주는 보지 못했으리라.

아진은 부엌 문지방을 잡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리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사장님.”

그러자 석주가 설핏 미간을 구겼다.

“넌?”

“네?”

“오줌 누러 안 가?”

“아, 어, 바깥, 바깥 화장실 쓰면 돼요.”

아진이 대충 바깥쪽을 향해 손짓했다. 석주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이 가득 찬 물병을 들어 보였다.

“고마워.”

“네? 아이, 별것도 아닌데……. 안녕히 주무세요.”

석주는 아진의 인사를 받으며 뒤를 돌았다. 그가 뚜벅뚜벅 복도를 딛으며 멀어졌다. 아진이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보폭도 엄청 컸다. 저런 보폭으로 부엌으로 오는 내내 용케 제 걸음에 맞춰 줬구나, 싶었다.

아진은 석주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으아아, 싸겠다, 싸겠어…….”

바지 위로 아랫도리를 움켜쥔 그가 헐레벌떡 밖으로 향했다. 그는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이 맨발로 마루를 밟고, 댓돌을 뛰어, 흙바닥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다행히 오줌을 지리지 않고, 화장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뜨끈한 물줄기가 힘차게 쏘아지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진의 입가에 웃음이 스몄다.

장대비

석주의 집은 거꾸로 뒤집힌 비읍(ㅂ) 형태이다. 정확히는 붉을 단(丹)을 직선으로 투박하게 쓴 생김새라고 보면 된다. 뾰족하게 선 아래의 두 뿔이 대문을 향해 있는 구조다.

한옥이라 하면 으레 방이 쓰임새별로 나뉘어 이동할 때마다 고무신을 신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게 전통이지만, 최근 그 추세가 줄어들고 있다. 마치 양옥처럼, 방과 방을 잇는 복도를 만들어서 신발을 벗지 않고도 나다닐 수 있도록 짓는 것이다.

석주의 집이 그랬다.

단(丹) 모양의 집 왼쪽 모서리 끝에는 부엌이 있고 오른쪽으로 향하는 가로로 여자 종 방 하나, 남자 종 방 두 개가 붙어 있다. 그리고 가로 끝까지 조직원들의 방이다. 조직원들은 계급에 따라 두 명 내지 다섯 명이서 한방을 쓴다.

그리고 부엌의 왼쪽 아래로는 다실, 욕실이 붙어 있고 명진의 방이 있다. 다음으로는 석주의 서재, 석주의 방이 있으며 끝엔 석주 개인 욕실이 있다. 이쪽이 丹의 왼쪽 직선에 해당한다.

미음 형태의 가운데에는 ‘안 정원’이 있는데, 연못과 커다란 회화나무가 멋지게 우거져 있다. 회화나무는 집이 자리 잡기 수백 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최초에 집을 지을 당시 나무를 베지 않고 둘러 지었다고 했다.

정원 아래 한일(一)자로 그인 복도에는 널찍한 대청과 현관이 있으며, 마지막. 오른쪽 세로 선에는 욕실 하나와 사랑방 두 개, 그리고 또 조직원들의 방이 줄줄이 있다.

무거운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은 모두 민흘림[2] 방식으로 깎여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고, 바깥 마루와 방은 크고 작은 창호지 창문으로 만들어져 빛도 잘 든다.

바깥에는 주차장도 있고, 조직원들이 운동을 하는 곳, 숲만큼이나 울창한 정원에, 텃밭도 있지만 그건 추후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집이 비읍(ㅂ) 자라서 복도에 있으면 기둥 사이사이로 반대편을 훔쳐볼 수 있었다.

집 안 복도를 닦고 쓰는 아진은 이 점을 아주 좋아했다. 이따금 안 정원에 있는 석주나, 방 앞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는 석주나, 대청에서 조직원들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석주를 아주 멀리서 티 나지 않게 훔쳐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까지 마친 저녁. 아진은 늘 그렇듯, 복도 청소가 덜 끝났다는 핑계를 대고 사랑방이 있는 오른쪽 복도에 퍼질러 앉아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조직원들이 오가며 이 시간에 여기서 왜 이러고 있냐는 눈치를 줘도 꾸역꾸역 앉아 있었다. 그마저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 자러 들어가서 버틸 만했다.

그리고 집이 한층 조용해졌을 때쯤. 아진은 현관 쪽으로 바짝 붙어 문틈이나 장식장 같은 걸 박박 닦는다.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 문이 열리고 석주가 나왔다.

그는 항상 바지만 입은 맨 상박에 두루마기만 걸치고 있었다. 두루마기는 날이 갈수록 얇아졌다. 몇 주 전에는 예쁜 비단이었는데, 요즘은 천 너머의 빛이 다 스밀 정도로 얇은 옷감이다.

여름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진은 여름을 좋아했다. 추위를 지나치게 많이 타서 그랬다. 오죽하면 한여름에도 홑이불을 꼭꼭 덮고 잤다.

근데 얼마 전, 조직원들이 하던 대화로 말미암아, 석주는 저와 달리 더위를 많이 타는 듯했다.

그들은 여름이라 석주 형님의 신경이 예민하다는 둥. 얼음을 잔뜩 사 놔야 한다는 둥. 그나마 시원한 정원에서 형님이 밤을 보낼 수 있게 정자를 만들자는 둥. 종 하나를 붙여 밤새도록 부채질을 하게 하자는 둥.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

대체 얼마나 더위를 타면 아랫사람들이 저리 걱정을 할까 했는데. 실로 석주는 매일 밤 저렇게 바깥에 나와 바람을 쐬곤 했다.

맨발로 방 앞 마루까지 나온 그는 우직하니 서서 머리를 짜증스레 쓸어 넘긴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손수 불을 붙이고 크게 연기를 들이마신다. 그렇게 담배 하나를 다 태울 때까지 밤공기를 쐬며 더위를 식히곤 했다.

먼 거리에서도 그의 단단한 상박이 들썩이는 건 참으로 또렷이 보였다.

“…….”

아진은 그런 석주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는데. 여전히 멋지다. 아니 어제보다 더 멋진 것 같다.

아진과 석주는 몇 주 전, 화장실 가던 새벽에 마주친 이후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진이 일방적으로 훔쳐보는 걸 제외하고는 찰나의 맞물림도 없었다. 석주는 아진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했다.

하긴, 종 하나가 새벽에 물을 떠다 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기억까지 하고 있겠나.

아진은 그걸 당연하다 생각했지만 묘하게 섭섭했다. 저는 아직도 매일 밤 그 순간을 되뇌는데.

아아, 제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예쁜 여자를 보는 것도 아니고. 제가 모시는 사장님 얼굴을 보겠다고 걸레를 쥐고 있는 꼴이라니…….

“아휴…….”

아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레를 꾹 쥐었다. 한 시간 가까이 쥐고 문댔더니 물기가 손에 옮겨 와서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했다. 영 보기 싫은 손이었다. 걸레를 툭 떨어트린 아진이 손을 벅벅 바지춤에 문댔다.

그때, 현관이 소란스러워졌다. 명진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진이 무릎을 접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명진의 뒤로 높은 힐을 신은 여자 몇몇이 따라 들어왔다.

명진은 그녀들에게 방 몇 개를 가리키며 가라 일렀다. 그리고 가장 뒤에 서 있던 여자는 직접 이끌었다. 석주의 방으로 가는 거였다.

곧 명진과 여자, 그리고 석주가 맞닥트렸다. 명진은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빙긋 예쁘게 웃으며 석주에게 다가갔다. 석주는 손수 자신의 방문을 열어 주었다. 여자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석주의 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녀의 향기로운 분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았다.

석주는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를 훅 빨아 당긴 후, 꽁초를 꺾어 재떨이에 던지듯 놓고는 두루마기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찰나, 그의 울룩불룩하고 널찍한 등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아진은 혼자 남았다.

사실 태초부터 혼자였음에도 방금 막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하루도 안 빼놓고 여자를 부른다면서?’

‘잠을 못 잔대. 떡이라도 쳐야 한두 시간 겨우 잔대.’

‘악몽이라도 꾸나?’

그의 밤에 대한 소문 중 한 단락이 떠올랐다.

“진짜 악몽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떡 치는 걸 좋아하나…….”

아진이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읊조렸다. 그러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제가 알 필요도, 궁금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떨어진 걸레를 주웠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비척비척, 절뚝절뚝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늘따라 제 꼴이 그렇게 볼품없고 비루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복도를 걷던 아진이 괜히 자신의 왼쪽 다리를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이상하게 무릎이 지끈거렸다.

그리고 그날 새벽.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른 장마의 시작이었다.

*주석

[2] 기둥머리에서 기둥뿌리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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