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쌍피-5화 (5/261)

05

“힉…….”

헛숨을 들이켠 아진이 냅다 고개를 숙였다. 꽃님이 아줌마가 그랬다. 웬만해선 석주의 눈에 띄지 말라고.

이해는 안 됐지만, 아줌마가 시키는 건 해야 했다. 제게 나쁜 일일 리 없으니까. 더군다나 꽃님이 아줌마는 신(紳)기도 있었다. 어렸을 때 무당 팔자였는데, 여차여차 넘겼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게 없었다. 근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맞닥트리게 될 줄이야.

“죄송……합니다.”

아진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석주는 대꾸도 해 주지 않고 아진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아진이 있다는 걸 인지는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의 손이 여자의 등에 닿았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아진이 얼른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여자의 보드라운 화장품 냄새 위로 석주의 담배 냄새가 섞여 들었다. 두 향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저와는 다른 세상의 냄새였다. 부러웠다.

정사. 쾌락.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

아진은 복도를 걸으며 언젠가 종들이 찧던 입방아의 한 단락을 상기했다.

“사장님은 하루도 안 빼놓고 여자를 부른다면서?”

“오늘도 왔다지?”

“나라면 좆이 헐었을 거야. 떡도 아주 오래 친다며. 새벽까지 끊이질 않는데. 여자들이 거의 기어 나온다나.”

“젊어서 그런가?”

“그냥 좋자고 떡 치는 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아까 깡패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사장님이…… 안 좋대.”

“안 좋아? 뭐가 안 좋아? 좆이?”

“아니, 이 사람아. 마음이, 응? 마음이 안 좋대.”

“뭔 소리야.”

“그러니까 잠을 못 잔대. 떡이라도 쳐야 한두 시간 겨우 잔다는 거야.”

“으잉?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서 깡패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가끔 마약이라도 하면 반나절쯤 자긴 하는데, 사장님이 그렇게 자는 걸 싫어한대.”

“왜? 술 진탕 마시고 잔 것처럼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가?”

“그런가 보지. 그 부두목 있잖어. 턱에 이렇-게 흉터 난 깡패. 이름이 뭐더라…….”

“명진. 황명진이.”

“어, 그치가 병원 가자고 가자고, 하는데도 안 듣는다더니만? 병원에 가면 잠자는 약도 주는데 몇 번 타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나 봐.”

“아이고. 잠이 보약인데. 어째 잠을 못 잘꼬.”

“악몽이라도 꾸나?”

“그런 걸 무서워할 사람은 아니지 않아?”

“하긴 저승사자가 와도 발로 뻥 차 버릴 양반이긴 하지.”

“그래도 그 덕에 밤마다 떡 치는 건 좋은 일 아닌가?”

“아, 그런가?”

킬킬 웃는 소리로 대화가 마무리됐었다. 아진이 앞머리가 간질이는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벅벅 긁었다.

저는 매일 밤, 눕기만 하면 기절하듯 잠이 든다. 덕분에 같은 방을 쓰는 사내종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겨를도 없다. 그리고 아침 닭 소리에 깨는데, 밤새 푹 자 놓고도 이불에서 나오는 게 고역이다.

근데 한두 시간 겨우 잔다니. 사장님이. 사장님이면 일도 무지 많을 텐데. 항상 강해 보이는 석주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제 주제에 잘도 그랬다.

그렇게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복도를 걷는 아진의 뒤로, 직선의 시선 하나가 박혔다.

석주였다.

방으로 들어가던 석주가 한 발을 문 뒤로 짚고 멀어지는 아진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 제가 여태 봐 온 건장한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가녀린 몸. 거친 모직 너머로도 드러나는 마른 허리선. 절뚝이는 걸음걸이. 반질반질한 마루를 내딛는 분홍색 뒤꿈치.

석주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집에 저런 게 있었나…….”

* * *

아진은 새벽 늦게 눈을 떴다. 밤벌레도 울지 않을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좁지도 않은 방. 함께 자는 다섯 명의 종들은 아무렇게나 엎어져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었다.

아진은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달빛이 스며 오는 창호지 문을 쳐다봤다. 자신이 왜 깼는지 이유를 찾는 거였다. 천둥 같은 코골이에는 진즉 적응했다. 딱딱한 바닥을 배겨 할 몸뚱이도 아니었다.

“아…….”

오줌이 마렵구나.

아진은 한 박자 늦게 아랫배가 찌릿찌릿한 걸 눈치챘다. 밤에 석주를 만나고 이상하게 열이 나 부엌에서 냉수 한 바가지를 통째로 마셨던 게 그새 방광까지 내려간 모양이었다.

아진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오그렸다. 화장실까지 가기 귀찮았다. 종들이 쓰는 화장실은 창호지 문을 열고 나가 댓돌에 올려진 신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러 장독대 너머 창고 옆까지 가야 한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움직이기는 영 귀찮은 여정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밤늦게. 제 발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이 시간에. 혼자 절뚝절뚝 갔다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코가 깨질 게 분명했다.

참을까. 참을 수 있을까.

아진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다시 잠이 들려 노력했다. 그러나 찌릿찌릿한 방광의 고통은 시시각각 거세지기만 했다. 고환이 탱탱하게 뭉치는 느낌이 났다.

“아우…….”

참다못한 아진이 꾸물꾸물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창호지 문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바깥으로 나갈지, 말지를. 물론 화장실을 가려면 저 문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아진에게는 다른 수가 있었다. 다실 옆의 작은 화장실을 사용하는 거였다. 조직원들이 쓰는 화장실은 집 반대편에 따로 있었다. 석주는 석주의 방에 딸린 개인 욕실을 썼고. 다실 옆의 작은 화장실은 조직원들이 다실에서 술을 마시거나 식사하다가 소피가 마려울 때만 종종 쓰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 새벽. 화장실에서 누군가와 마주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사실 아진은 이전에도 새벽에 몰래 쓴 적이 몇 번 있었다.

“무서운 걸 어떡해.”

이 늦은 밤, 산에서 호랑이라도 내려오면 어쩌려고.

아진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방에서 나왔다. 드문드문 초롱이 켜진 복도는 역시나 조용했다. 화장실은 모퉁이에 붙은 부엌을 돌아, 다실을 지나면 바로 있었다.

아진은 뒤꿈치를 든 채 조심조심 복도를 걸었다. 이따금 잘못 디딘 마루가 끼이익 비명을 질렀는데 그럴 때마다 아진은 흡 숨을 참으며 다리를 모아야 했다.

“놀라서 오줌 싸겠네…….”

이것도 못 할 짓이다. 앞으로는 절대 밤에 물 안 마셔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다실을 지날 무렵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나무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마루가 밟히는 소리였다. 놀란 아진이 우뚝 멈춰 섰다. 자신이 낸 소리인 줄 알고.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끼이익, 끼이익…….

소리가 가까워졌다. 제가 마루를 디딜 때보다 훨씬 묵직한 소리였다.

아진이 눈을 크게 뜨며 복도 끝을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직원인가? 아니면 설마 귀신인가? 뭐가 됐든 눈에 띄면 안 될 듯싶었다. 아진이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와중에도 오줌은 마려웠고, 발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아진은 바로 옆에 있는 다실과 그 옆에 있는 화장실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그냥 화장실로 뛰기로 했다. 누굴 만나든 간에 왜 여기 있냐 문책하면 다실에서 나오는 것보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게 둘러대기 좋을 것 같아서.

마른 다리가 절뚝절뚝 바쁘게 화장실로 향했다. 그사이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아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문을 잡는 순간. 그림자가 아진의 앞에 섰다. 감색 두루마기가 아진의 종아리를 스쳤다.

……두루마기?

아진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초롱 빛이 은은하게 스민 상체가 보였다. 그림자의 주인은 바지만 걸친 맨몸에 두루마기를 두르고 있었다. 오목하게 들어간 가슴골과 멋지게 도드라진 복근, 두툼한 흉곽과 커다란 덩치를 보아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은근히 풍기는 담배 냄새.

아진이 고개를 조금 더 올렸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귀신 같지는 않다만, 그래도 봐야 했다. 혹시 아나. 눈코입이 없을지.

그리고 그렇게 주홍빛 불이 어른거리는 얼굴을 보는 순간.

검은 눈동자와 맞닥트리는 순간.

입을 뻐끔 벌리고야 말았다.

“아…….”

“…….”

“안녕, 안녕하세요, 사장님…….”

석주였다.

세상에. 하루에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그것도 이런 곳에서. 된통 혼날 게 뻔했다. 왜 새벽에 쥐새끼처럼 쏘다니는 거냐고, 종 주제에 어딜 감히 복도를 나도냐고 꾸지람을 들을 터였다.

겁을 집어먹은 아진이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래.”

석주는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대꾸하고는 아진을 지나쳤다. 멀어지는 두루마기에 아진은 겁도 없이 묻고야 말았다.

“어디 가세요?”

아진은 제가 방정맞게 입을 놀리고도 놀라서 헙, 하고 숨을 멈췄다. 석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몸을 반만 돌린 채 아진을 쳐다봤다.

“내가 그걸 너한테 말해 줘야 해?”

“아니요. 아니요.”

아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손도 좌우로 흔들었다. 어찌나 힘차게 흔드는지. 마른 어깨가 덩달아 흔들렸다. 고장 난 인형 같은 아진의 모습에 석주의 눈매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꺾은 그가 아진에게 물었다.

“넌 어디 가는데?”

“오, 오줌 누러요.”

“가, 그럼.”

석주는 너그러웠다. 종 주제에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을 쓰겠다는데. 손을 씻는 것도 아니고 오줌을 누겠다는데.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긴장으로 뻑뻑해졌던 아진의 어깨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방자해졌다. 제가 조금 더 버릇없게 굴어도 석주가 화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랫입술을 슬쩍 핥은 그가 넌지시 물었다.

“사장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물 마시러.”

석주가 손가락에 걸치고 있던 크리스털 유리병을 들어 보였다. 팔뚝만 한 크기의 유리병은 그의 침실에 있는 것으로, 이순이 항상 물을 채워 놓는 것이었다. 근데 오늘 이순이 그것을 깜빡하는 바람에 이렇게 늦은 새벽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 성사된 거였다.

아진이 연신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오줌이 마려워 죽겠는데 입술은 왜 자꾸 바짝바짝 마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진은 조심히 석주에게 한발 다가갔다.

“제가…… 물 떠다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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