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비어 있을 줄 알았던 대문이 열쇠도 걸지 않았는데 찰칵 하고 열리자, 시환은 실수로 문도 잠그지 않았구나 하고 자신을 책망했다.
피곤해 곧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음식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상하다. 아무도 없을 텐데.
그럼...혹시...!!!
"...아...이제 왔어? 늦었네?"
거짓말. 너 정말 빠르구나 김태형.
사실. 모든 게 그의 농간이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짖궂어. 정말 짖궂어 김태형.
이건 반칙이야.
노란 앞치마를 느슨하게 멘 채 앞머리 몇 가닥을 남기고 긴 머리카락을 질끈 올려 묶은 재운의 웃는 얼굴은 마치 신기루 같아 시환은 그새를 못 참고 또 스멀스멀 차 오르는 두 눈의 뿌연 물기 때문에 잠시 잘 쉬던 숨을 또 멈추어야 했다.
아니, 사실은 숨이 막혀서 눈을 못 뜬 것이다.
아닌가. 눈이 안보여서 숨이 막혔나?
신기루일거야. 자세히 다시 보자.
길게 하늘거리는 묶인 머리카락들 덕에 드러난 희고 긴 목의 선이 역시 예뻤다.
남자답게 잘 다듬어진 몸과는 달리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이 시환을 향해 돌아섰다.
동그란 콧날을 머쓱한 듯 희고 긴 손가락으로 슥 슥 문지르더니, 이내 도톰한 붉은 입술과 활처럼 휘어지는 예쁜 눈으로 작렬하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주는.
넌 오재운이 아닐 거야. 그렇지?
예쁜 건 똑같지만...그는 날 보고 그렇게 웃어주지 않...
"...어...어라...연서...시환아...우...울어...?"
"..."
"아...미안...아우...넌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약해. 응? 울지마..."
"..."
"울면...미안하쟎아 내가. 응? 시환아..."
맛을 보는 듯 하던 국자를 황급히 내려놓고는 어쩔 줄 모르다 성큼성큼. 이내 시환의 앞까지 다가온 재운의 하얀 얼굴이 난감한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무어라 웅얼거린다.
아찔하게 이는 현기증과 함께 또 뿌옇게 변하는 눈 앞의 세상 속으로, 답지 않게 어쩔 줄을 또 몰라하는 예쁘고 밝은 그가 있었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
맙소사. 하느님...
"...보고싶었어..."
상혁에게 베운 대충의 언어로는 재운의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 이 순간 다정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며 눈가로 겹쳐드는 그 사랑스런 입술이 내뱉은 어색한 단어만은.
맙소사. 정말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보고싶었다니. 보고싶었다고. 누가? 내가? 내가. 응? 재운아?
너...너 정말 재운이 맞아?
가슴이 터져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었겠지만. 재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이것저것 찬거리를 잔뜩 보아 들어와 버린 재운은 자신이 거친 경로가 바이더웨이를 거쳐 버거킹을 거쳐 던킨도너츠를 거치다가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리고는 제대로 된 슈퍼마켓을 찾아들어 반찬거리까지 보아 버릴 때 까지 멍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었다.
톡탁거리며 도마에 요리를 하는 동안도, 찌개를 올려놓아 보글거리며 끓어댈 때도. 재운의 머리속에는 그저 시환을 보고 싶다 라는 미친 듯한 열망과 더불어 그를 보면 제일 처음 어떤 말을 해야 할까가 뒤죽박죽 엉켜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들려온 문소리. 신발 벗는 소리. 긴 바지를 끌며 사락사락.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주방을 지나치는 긴 발소리.
곧바로 따라 곧추세워지는 신경. 달아오른 뺨. 떨리는 입술. 진득하니 국자를 쥔 손에 들어차는 땀.
결국 탁 하고 불을 꺼 버린 채 어색하게 간을 보는 척. 시환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기로 낙찰.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다.
나는, 우린 아무렇지도 않다.
제발!
말라 뼈가 드러날것 같은 작은 몸.
노란 후드티 위에 노란 패딩 점퍼를 걸쳐 입은 채 하얗게 언 얼굴로 들어선 창백한 그 녀석은.
짙게 쌍커풀진. 그리 크지 않은 동그란 눈동자에 재운을 한 가득 담아 내더니 이내 글썽.
표독스럽거나 무심한 얼굴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 선이 섬세한 작은 얼굴에 일렁이는 놀라움과 울음을 담고는 재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몇 마디 어색히 말을 건네다가는 이내, 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 하고 자신을 되려 책망하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결국은 다 놓아 버리고 성큼성큼. 그의 눈에 흐르는 물기라도 닦아 주자 하는 마음에 다가섰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 걸까?
나 널 이렇게 원해도 되는 걸까?
너...아직 괜찮니? 아직 날 원하니?
아직도 날 사랑할 수 있겠어?
노란 옷자락 사이로 숨은 손가락들을 일일이 걷어내 입술을 대 보았다.
추운 밖에서 차가워진 길고 마른 손가락들은 창백한 얼굴 만큼이나 하얘서. 입을 맞출 때마다 안스러운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술 끝으로 차갑게.
조금 망설이다 젖어있는 눈가에 입을 맞추자, 떨리는 재운의 입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더 동그랗게 띄이던 눈동자가 울컥. 입술을 깨물며 또 한번 눈물을 흘려 보내며 젖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입술을 닿자, 움찔 하고 떨리며 물러서려는 그를 곧바로 당겨 앞에 제대로 세웠다.
보고싶었어.
네가 미치도록 보고싶었어.
너무 식상한 말인데.
나 너 하나 때문에 20여년만에 처음으로 미칠 뻔 했어.
어떻하냐. 나 네가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죽어도 싫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하냐 나...
응? 어떻하냐. 나 좀 어떻게 해봐. 응?
널 사랑해 버렸어 시환아.
살짝 입술을 미그러 뜨리자. 아기같이 보송한 뺨이 느껴지고, 솜털까지 잡힐 것 처럼 부드러운 그 뺨을 더듬어 희고 고른 잇새에 깨물린 채 바르르 떨리고 있는 입술에 닿았다.
움찔거리며 또 도망가는 그를. 이번에는 양 손으로 그의 작은 얼굴을 감싼 채 도망치지 못하게 고정시키고는 부드럽고 침착하게 떨리는 입술을 교차시켰다.
장난치듯 툭 툭 건드리는 입술에, 처음에는 눈에 띄게 경계하던 시환도 차츰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더불어 재운의 가슴을 밀어내던 두 팔도 어색하게 재운의 셔츠자락을 잡아당긴 채 멈추자. 잘 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재운이 다시 몇 번의 가벼운 베이비 키스를 남긴다.
처음으로 대하는 재운의 부드러운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 재운의 입술이 멀어지면 동그랗게 두 눈을 올려 뜨고, 다시 다가들 때면 어색하게 내리까는 행동을 반복하던 시환의 콧잔등에 장난치듯 부비적. 코끝을 부비대던 재운이 또 음미하듯 시환의 입술을 건드리자, 쿡 하고 웃어버리는 시환이 이제야 안심되었다는 듯. 재운이 그제야 참고 있던 혀를 살짝 내밀어 시환의 얇고 매끄러운 입술 선을 따라 조심히 미끄러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입술을 꼭 닫은 채 쿡쿡거리자, 재운이 '요것 봐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시환의 입술을 조금씩 베어먹듯 깨물기 시작했다.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어 오는 재운의 애교에 이제야 마음이 좀 풀렸는지, 못 이기는 척 재운의 목으로 팔을 감아오며 입술을 열어주는 시환에게, 조심스럽지만 격정적인 재운의 키스가 밀려 들어갔다.
비스듬히 꺾인 고개로 서로의 숨결을 교차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더 깊어져 어느새 들뜬 신음 소리를 이어가는 깊은 deep kiss.
맹렬히 빨아들이는 재운에 힘이 빠져 뒷걸음질치는 시환에 맞춰. 재운은 시환을 곁의 벽으로 밀착시킨 채 천천히 각도를 달리하며 긴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키스 한 번 못 해본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때로는 농염하게. 길고 길게 이어지는 키스 만으로도 뜨겁게 달아오른 방 안의 열기에 부응하듯. 겨우 떨어진 입술 새로 가쁜 숨을 교환하며 또 겹쳐지고 또 겹쳐지고를 반복하며. 데일 것 같이 뜨거워진 손으로 시환의 얇은 후드티 끝을 조심스레 걷어올렸다.
나만 갖고 싶어.
나만 보고 싶어.
누구도 주지 않고 보이지 않고. 나 혼자만.
이렇게 달콤하고 사랑스런 너를 나 혼자만.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널 가둬 두고라도.
왜 진작 몰랐던 걸까?
아냐. 이럴 것 같아 두려워했던 것일 거야.
널 너무 사랑하게 되어 버릴까봐.
애타게 메달리는 시환의 가는 허리를 더듬던 두 팔은, 걷어올린 그의 흰 가슴을 배회하다가 벽에 밀려 붙은 매끄러운 등을 더듬으려다 다시 허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떨어진 입술로 긴 실선을 그리던 재운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시환의 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시환의 오목한 배꼽부터 가슴까지를 정신없이 혀와 입술로 더듬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귓가로 들리는 길고 색스런 시환의 나직한 신음 소리를 짖궂게도 확인해 가며 미끄러뜨리고 빨아들이던 입술과 혀로 벌써 단단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가슴의 작은 돌기를 찾은 재운이 간질이듯 그것을 젖은 혀 끝으로 더듬어대기 시작했고, 한결 가빠진 숨으로 재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아쥔 채 엄습하는 쾌감을 억지로 참고 있던 시환은. 놀리듯 자신을 가지고 놀던 재운이 불현듯 이를 세워 아프게 깨물자 하악 - 하고 벅찬 숨을 뱉으며 튕기듯 고개와 허리를 꺾으며 재운에게 뜨겁게 안기고 말았다.
이미 목 바로 아래까지 말려올라간 옷자락 밑을 다시 더듬기 시작한 입술이 민망한 마찰음과 함께 떨어져 나가고, 정말 더는 안되겠다는 듯이 시환의 옷을 벗기기 위해 밀착된 팔을 들어 길게 말린 옷 끝을 힘있게 잡아 재운이 막 올려내려던 찰나.
안...안돼...!!!...
불현듯 생각난 사실에 화들짝 놀란 시환이 타악 - 소리가 나도록 모질게 재운의 손을 쳐 내고는 황급히 거의 다 벗겨진 상의를 끌어내려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아...미, 미안..."
"...하아..."
"나, 나도 모르게...아...저..."
두근두근. 이제 터질 것 같이 세게 뛰는 심장이 아플 지경인데, 서둘러 재운의 품을 벗어나려는 시환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이리저리 피하는 고개를 따라 시선을 맞춰 오며 애써 사과하는 빨갛게 물든 당황한 재운의 얼굴에 더욱 미안해서...
미안한 건 나야 재운아.
미안할 일이 아니래도. 그래도 미안해.
그러니까...제발 보지 않았기를.
"화...화난거야? 응? 연서..."
"..."
점점 더 새빨개지는 얼굴로 계속해 재운의 시선을 피하자. 이리저리 들이밀던 얼굴을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딱 멈추어 버린 재운이 천천히 시환을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한참을 그대로 멈춰 있었다.
별안간 돌변한 재운의 행동에 불안스레 떨리는 눈을 들어 그의 표정을 살피는데.
멍 하니 뜻을 읽을 수 없던 재운의 얼굴이 조금씩 희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격렬한 키스의 흔적을 가득히 남긴 채 매끈하게 반짝거리던 붉은 입술도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배어불고는.
마지막으로 순식간에 가라앉은 시선을 시환에게 아프게 맞춰온다.
너...봤구나.
"이리와봐."
다음 순간.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태도와는 달리 우악스럽게 시환의 옷을 억지로 올려 벗겨 버리던 재운이. 완강히 저항하다 잠잠해져 버린 시환의 마른 쇄골이며 흰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김...태형이야...?"
"..."
"어...떤 놈이야."
"...종..."
"씨발! 대답해!!! 김태형이야? 그새끼야? 응? 우시환!!!"
마른 어깨를 으스러질듯 벽으로 확 밀어 버리는 재운의 턱끝이 덜 덜 떨리고 있었다.
희게 모아 쥔 주먹이 맹렬한 속도로 겨우 벽에 기대 선 시환에게 달려들었고, 질끈 두 눈을 감아 버린 시환의 귓가로 무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콰앙!!!
분을 이기지 못하고 벽을 박아꽂아 버린 주먹이 부르르 떨려오고.
억눌린 음성으로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야' 를 반복하는 재운의 어깨가 울분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W??、?W?????q???N、?¿?a?A?Æ…”
(...조, 재운아 잠깐만...)
"...죽여버릴거야. 아냐...죽어버릴까?"
“?±…?±?e? 跡?I?I、?I?±?A?½???C…”
(이...이거 자국은 남, 남았지만...)
"어디까지 갔어. 끝까지 갔어? 응? 그새끼랑? 어? 좋았어? 그새끼랑 좋든? 응?"
“?E、何?a?E?ⓒ?A?½?ⓒ?c。本當?¾?æ。?W?????q???N…僕?I?±?Æ信?¶…”
(아, 아무일도 없었어. 정말이야. 재운아...내 말 믿...)
"씨발! 왜 날 자꾸 이렇게 만들어!!!"
콰앙 - 쾅!!
"졸라 사랑해서 미치겠단 말이야! 널 나만 갖고 싶다는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응? 지금껏 갖고 싶은 거 하나 못 가지고 거지같이 살다가 이제 정신 좀 차리겠다는데. 너만 있으면 된다는데! 왜!!! 넌 대체 왜이래!!!"
"...종혀..."
"열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단 말이야...아끼고 소중하게 안고 싶었단 말이야. 상처도 주지 않을거고 지금까지 못해준거...근데...근데...!"
“速過?¬?e。聞?≪取?e?E?¢?æ...”
(너무 빨라. 못알아 듣겠어...)
"아아. 기억난다. 그새끼가 니덕에 풀어주는 거라던데 그럼 그 말이 이거야? 너 그새끼랑 붙어먹어서 나 다시 빛 본 거냐? 응? 열라 고맙네? 졸라 잘해주든? 어?"
"..."
"난 너랑만 웃고 너랑만 울고 너랑만 안고 키스하고 너랑만 섹스하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넌 아니야? 응? 왜. 대체 왜...응? 너...너 나 사랑하는거 아니야? 응?"
어느새 시환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흔들어대는 재운의 핏대 선 고함에 시환은 혼란한 나머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러자 멈칫. 그대로 멈춰 버린 재운이 기가 막히다는 듯 뚫어져라 시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투툭 툭.
한 번도 깜박이지 않던 두 눈에서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더니 고개를 푹 숙여 버린채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고 해 봤자 소용없음을 깨달아 버린 시환이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끌어안자. 이제까지와는 정 반대로 힘이 빠져 버린 재운이 울어서 범벅이 된 얼굴로 시환을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시환의 몸에 남은 다른 이의 키스마크를 슬프게도 바라보더니, 바닥에 던져버린 시환의 옷을 주워 조심스레 입혀 주는 것이었다.
내내 '나 너무 힘들다. 응? 나 너무 힘들어. 벌받나봐. 나 돌아버리겠어. 너때문에 돌아버리겠어. 나 왜이러지?' 하고 속삭이던 재운이 시환을 한번 꼭 끌어안아 주더니,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시환의 머리카락을 한번 부드럽게 헝클어 주고는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콰앙 - 하고 무언가를 박살내는 소리가 문 저편으로 들려온다.
시환은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아서는 서럽게 또 울어야 했다.
오해임은 분명했지만 풀 길이 없었다.
더 변명도 할 새 없이 녀석을 울려버렸다.
그렇게 당당하다 못해 때론 화가 날 정도였던 재운을.
울려버렸다.
울려버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시환에게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한 적 없는 그는. 그럼 시환을 연인으로 생각한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단순히 곁에 둔 사람에 대한 소유욕인 걸까?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돌변한 재운의 부드러운 모습에 희망을 걸었던 시환이었고.
지금 그 행동에 그 희망이 조금 더 짙어지긴 했지만...
그랬지만...
시환의 위에 올라탄 채 쇄골이며 목덜미. 그리고 어깨와 가슴 등에 몇 개의 키스마크를 새긴 태형은 뻣뻣하게 굳은 채 질끈 두 눈을 감아 버린 시환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콩 하고 이마를 세게 때려왔고.
반사적으로 자신을 바라본 시환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채. 벗겼던 시환의 상의를 다시 입혀 주었다.
장난이었다고. 그런데 이런 것까지 허락할 정도라니 우시환이 정말 오재운한테 빠지기는 빠진 모양이다 라고.
애초부터 그 여자는 신고할 생각도 별로 없더라고. 그리고 사실 재운은 그렇게 악질인 놈이 아니더라고.
실제 재운이 저지른 죄는 없다면 거짓이고 적다면 편애겠지만. 그래도 널 봐서 놓아줄 정도는 되더라고.
니가 오는 길에 아마도 녀석은 돌아갔을 거라고. 근본이 못된 놈은 아닌 것 같으니 니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거기다 김상혁인가 뭔가 하는 놈도 그놈 죄 없다면서 아니, 죄는 있지만 너 생각해서 제발 그만하라고.
차라리 자길 붙들어 가라고. 그게 훨씬 나을 거라고. 어떻게 보면 공범이고 방조자인 거라고. 그렇게 찾아와서 애원하더라고. 오재운 정말 대단한 놈이더라고.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태형은 아직도 시환을 좋아했다고. 원망스럽지만 이렇게 더러운 녀석은 아니라며.
당황함에 정신 못 차리는 시환을 향해 속사포처럼 쏟아놓고는 억지로 어깨를 떠밀어 내보내주며 '그래도 이건 편법인거다. 알지?' 하며 눈가를 찡긋 해 주던.
재운아. 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던 건...
...사실...이었어.
시환은 깨달았다.
태형에게도, 상혁에게도. 그리고 재운에게까지도.
자신은 죄를 짓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깜깜해진 밖으로 오늘은 달빛마저 숨어 버렸다.
웅크린 시환의 작은 몸 위로 숨막히는 정적만이 쏱아져 박히고 있었다.
흐느끼는 눈물소리처럼.
"연...석아아아..."
"..."
"미안...응? 시환아 미안해..."
"..."
미안하단 말만을 반복하며 늘어지는 술 취한 재운의 몸을 겨우 침대로 끌어 가 눕혀 놓고는.
하나하나 옷을 벗겨 편하게 갈아입혀 주는 시환의 손길은 의외로 침착했다.
주량 이상을 마셔서인지 고통스럽게 뒤척이며 계속 시환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재운의 취기 섞인 숨을 가만가만 받아주며.
한참이 지나 그가 잠잠해질 즈음 허리를 굽혀 살짝 더운 숨이 쏟아지는 그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도 전처럼 떨지 않았다.
그리고 부시시하게 눈을 뜨는 재운의 귓가로 나직하지만 부드럽게 속삭이는.
"...사랑해..."
또렷하고 슬픈 한국어도 오늘따라 힘이 있었다.
뭐라 더 중얼거리며 허부적거리던 재운의 팔이 툭 떨어지고. 이윽고 깊은 잠에 빠져든 그 애타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불을 목까지 덮어 준 채 툭 툭 가볍게 두들겨 주는 손길도.
"나 조금..."
시환아...시환아...시환아...
너 지금...
"...돌아올게..."
달칵 -
문이 한 번 열리고.
탁 -
문이 한 번 닫겼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안...돼..."
혼자 남은 빈 방 안은 너무나 넓었다.
숨이 막혀 울음이 터질 만큼.
"정신차려 형."
"...형...?"
멍한 얼굴로 상혁을 올려다보며 겨우 초점을 맞추고는 배시시 웃어보이는 재운이었다.
배싯 웃으며 말끔한 얼굴로 상혁이 말했다.
"형. 나 군대가."
"...상혁아?"
한 번도 자신을 형이라 부르지 않던 상혁이.
낯선 얼굴로 재운을 형이라 부르며 그렇게 떠나갔다.
"시환형 믿어. 돌아올거야."
"..."
"형이 시환형을 정말 사랑한다면."
"..."
"이러지 말고 차라리. 다시 왔을때 놓지 않을 준비를 해봐라 인간아."
"..."
"...갈게."
한참을 울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그가 떠난 후였다.
그제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길로 아이러니하게도 재운은 태형을 찾아갔다.
멀끔한 얼굴로 어색한 표정으로.
후에 들었지만 시환은 이미 부모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은 두분 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아무 희망 없이 아무 뜻도 없이 오직 미련만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그리고 만났던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재운을.
아프게도. 그렇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