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환이 깨면 따듯하게 데운 음식이라도 좀 주지 그러냐.
방 추울 텐데 보일러도 좀 틀고.
이마에 식은땀도 좀 흘리던데. 열도 있고.
추운데서 못할 짓을 당했으니 앓을 거야. 많이.
그리고 일어나서 혹시 날 찾으면...
"하루만이군."
"...개새끼."
"얼굴하고 안 어울려 입담이. 그건 알아?"
"빠르네. 실력 좋아."
"고마워. 칭찬으로 접수하지."
'연행할까요' 하고 묻는 현곤에게 '자수야 임마' 하고 한 번 씨익 웃어 보이는 태형은 과연 초 엘리트 젊은 검사답게 심플한 맛이 있었다.
돈도 많아 보였고. 답게 학식도 많아 보이는 게.
우시환에게는 저런 놈이 어울리는 걸까.
그럼 널 그냥 둘 걸 그랬나.
"취조 안해?"
"글쎄. 너 콩밥 먹으면 누가 좀 괴로울 것 같아서 말이야."
"...뭐?"
"아, 물론 널 봐주자는 소리는 아니야. 공갈협박이 무슨 죄목인지 알지? 잘 따지고 보면 강간범이기도 한 셈이고. 음. 사기꾼이기도 하나?"
"또 더 없냐? 절도도 있을 텐데."
"이야...너 대단하구나? 혼자서 아주 가지가지 해먹었네."
"고마워. 칭찬으로 접수하지."
여전히 싱글거리며 현곤에게 눈짓으로 재운을 데려갈 것을 지시하는 태형을 주시하는 가슴 속이 시리고 무력해져 왔다.
공갈협박에 강간에 사기에 절도라.
여기서 튀면 또 뭘까.
왜 난 저 자식처럼 살지 못했을까.
왜. 대체 왜.
뻔 했다.
몇 년이 떨어질까. 형을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스스로 이곳을 찾아 들어올 때부터 제대로 선 결심이라서. 번복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일도 없었다.
아. 같은 소리일까. 하지만.
'끼이잉 - 철컹 -'
철문이 닫기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재운의 고개도 풀썩. 유치장 안에 군데군데 자리한 몇몇 놈들이 신참을 흘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재운은 아무 것도 머리 속에 집어넣을 수 없는 상태인 덕에 그저 쓰러지듯 한 귀퉁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푹 묻어 버릴 뿐이었다.
아무 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신경쓸 정신도 없었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사실은 두근거리고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은 괘씸하게도.
시환아...나 어떻게 하지?
왜 널 만났을까?
널 만나지 않았다면 나 계속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고 있었겠다. 그렇지?
'넌 그런짓보다 차라리 여보여보나 지퍼. 그것도 안되면 바나나나 나가 보라니까 차라리 낮지.' 하고 핀잔주던 상혁의 말에 미쳤냐. 그냥 있을란다. 하고 응수하던 그 때로 돌아간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거야.
널 만날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난 시작도 안 했을 거야 정말이야.
그래서 잘 준비하고 있다가.
널 만나 사랑했을 거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우시환.
그런데 신기하다.
그럼 널...
...만날 수 없었겠지. 빌어먹게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수십 수백번의 후회 속여 재운은 눈가가 괜스레 뜨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럼 시환을 그렇게 험하게 대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까지 벌이게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빌어먹게도 넌 그 순간에도 헐떡대며 즐거워 하고 있었쟎아!!!
병신. 인간 쓰레기. 인간 말종 오재운!
아니...인간도 못 되는 버러지같은 더러운 새끼.
그런데...
그런데 왜 나같은 새끼를 사랑하는데 넌!!!
신참을 교육시킨다거나 무료한 일상을 괴롭힘으로 풀려는 행위들은 아직 유치장에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은 빵에 가면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이야. 나 뒤 대 줘야 할지도 몰라 시환아.
겁이 나는데 어떻하지?
성질이 개같아서 쉽게는 못 당해 줄 텐데...
근데 그것조차도...
빌어먹을. 널 위해서라면 백번도 더 먹혀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젠장...!
상혁은 틀림없이 뒤집어 쓰려 하고 있었다.
그 선수를 재운이 쳐 버린 것이지만.
상혁으로서는 그것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것은 이미 재운이 태형을 만난 적이 있다 라는 것과, 태형이 애초부터 재운을 목표로 이 바닥을 건드린 것이다 라는 중대한 사실을 제껴 두었을 때 말이다.
캄캄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 떠 보자. 어둠 뿐인 창살이 달빛에 어슴프레 빛나 보였다.
시환은 무얼 하고 있을까.
우린 왜 만났을까. 나는 왜 널 진작에 버리지 못했을까.
너는 왜 나에게 메달렸을까.
이런 식으로 상혁에게 널 맡겨두고.
난 이렇게 못된 놈인데.
출소할 때까지 날 잊어봐 우시환.
운이 좋아 내가 빨리 나간다면.
그땐 놓지 않을 거니까 말이다.
상혁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재운은 슬슬 시환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닥쳐 봐야 아는 사람이 있었다.
닥쳐 봐야 아는 상황이 있었다.
죽어도 시환을 놓지 않겠다고 상혁에게 짐처럼 맡길 때는 언제고, 그것도 건드리면 죽는다 하는 무언의 압력과 함께. 그런 주제에 이제는 그때까지 둘이 눈맞으면 알아서 돌아서겠다 라니.
그것은 아마도 태형에게 가까이서 느낀 너무도 큰 자격지심과, 그들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인생을 막 살아 버린 것에 대한 허무함과 후회.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거대하게 재운의 폐를 짖찧어 댔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진작 몰랐다는 후회가 막심했다.
진작 몰랐다는 괴로움이 엄습했다.
왜 진작 몰랐던 걸까.
아니면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피했던 걸까.
상혁이라면...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널 죽도록 사랑할거야.
태형이라면...
네 부모를 찾아 줄 거야.
널 죽도록 위해줄거야.
뭣보다 그새낀 너랑 말도 잘 통하쟎아.
난 아직도 못 알아듣는 빌어먹을 일본어.
씨발. 내가 할 수 없다는 거쟎아 그 모든걸.
나도 너 죽도록 사랑할수 있어.
나도 너 행복하게 해 줄수 있어.
나도 널...
그런데 이제 늦었어.
시환아...시환아...시환아...
그렇게 3일이 지났다.
그리고 까실하게 일어난 얼굴로 이태원 훤한 거리를 걷는 재운은 아직도 어리벙벙한 얼굴이었다.
헤밀턴 호텔 길을 지나 번화한 거리를 걷자니.
이태원 역 앞부터는 거리 문화제가 또 한창이다.
이것저것 먹거리를 내어놓고 파는 국적도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밝아 보였다.
이곳이 이렇게 밝고 활기찼던가?
여전히 밤이 되면 더 환해질 그곳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이 좋다.
예전엔 왜 몰랐던 걸까.
얼마든지 밝을 수 있었어 정말로.
신기한 것들의 일색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환을 빨리 보고 싶었다.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어버린 재운은 이제 더이상 한눈팔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러나 그 덕에 그 순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검은 에쿠스와, 그 안에서 창백하게 굳어있는 밀랍인형같은 몰골의 작은 동양인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것은 찰나처럼 순식간에 재운의 곁을 스쳐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바이더 웨이에 들러 이것저것을 뒤적이는 재운의 얼굴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조금은 명랑한 미소가 번져갔다.
시환은 다급한 마음에 입술을 하얗게 깨물고 있었다.
상혁에게서 겨우 들은 자초지종을 믿을 수 없어 방금 태형과 전화 연락까지 마친 후였다.
일전에 마주쳤던 그녀가 재운을 신고한 지 오래였다는 것과, 재운을 조종 - 그렇게 믿고 싶긴 했다. 하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돈으로 조종한 셈이 아니던가 - 한 호연 등의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사람이 바로 태형이라는 사실이 정말이었다 라니.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눈을 뜨자 상혁이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다 나직하고 조용하게 '씨발새끼' 하고 씹어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피식 웃으며 - 아마도 상혁의 그 말을 재운과의 관계에 대한 뜻으로 해석했기에 - 주변을 둘러보자 변함없지만 조금은 더 깔끔해진 방 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운은 여전히 없었고, 시환은 그저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적어도 상혁에게 '형 이틀 동안 기절해 있었어' 라고 시작한 머뭇거리는 말들을 전해듣기 전 까지는.
심호읍을 하며 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는지 '하현곤' 이라고 표시된 명찰을 가진 형사 하나가 시환을 안내했는데, 검사실에 도착할 때 까지. 시환은 용케도 제 심장이 터져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했다.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은 두근두근. 이제는 울렁거릴 정도로 거세게 뛰어대기 시작했고. 시환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어보이며 양 팔을 벌려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태형의 체취를 느끼며 시환은 떨리는 속눈썹을 억지로 잡아내려 눈을 감았다.
아찔하게 감겨오는 세상이 '아, 아직 나는 낮지 않았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어. 조금 당황해할 즈음. 역시나 시환의 몸에 열이 높은 것을 알아챈 태형이 아프냐 물으며 얼굴을 가까이 했을 때.
그제야 시환은 그에게 물을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이유. 오재운에 대해서.
“勝手?E?μ?e。僕?I?C?¤?A?a?¢?¢?ⓒ?c。“
(마음대로 해. 나는 아쉬울 게 없으니.)
"..."
“汚?¢?¾?e?¤? ?A?a僕?ª愛?μ?A?¢?e?Æ?¢?A?½時?I?¨前?I答?|?I?æ?¤?E?E?A?½?¾???¾?æ。汚?¢?a?A?E?E?A?½?¾??。?≫?¤?¶?a?E?¢?“
(추잡하지?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했을 때 네 대답처럼 돼 준 것 뿐이야. 더러운 놈이 된 거지. 안그래?)
"..."
싱긋거리며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 하는 경쾌한 동작.
태형의 앙금은 생각보다 깊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A…?”
(...여...기서...?)
“…?I?W?????q???N?ª?·?²?¢?±?Æ?I?·?²?¢?E。”
(...오재운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군.)
“?I…?a?…終?i?c?¹?e。”
(빨...리...끝내.)
“天下?I?E?????\?N?E自?c?{?^???ð外?³?¹?e?E?n?A。“
(천하의 우시환에게 스스로 단추 끄르는 법을 가르치다니.)
쿡쿡거리며 시환을 끌어당겨 푹신한 가죽 쇼파로 뉘이는 태형의 동작은 너무도 능숙하고 또 역시 경쾌했다.
수치심에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열던 셔츠 단추를 부드럽게 웃으며 대신 열어주는 태형에게 고마워 해야 하는 걸까.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겨 주며 입술을 겹쳐오는 태형에게 스륵. 감아주는 시환의 눈꺼풀에 또륵. 이미 채념한 것에 대한 물방울이 맺혔다 금새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