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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73)화 (73/74)

073.

“……어젯밤 일을요?”

그 물음에 백은후는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성주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그가 뭐라고 말하든 홀릴 것 같은 기분이라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목을 긁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후회해.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전화를 걸어버린 일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주안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백은후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서 말하는 걸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인데도 그와 참 어울리지 않았다.

“네 신음 소리에 눈이 돌아 여기까지 와버린 내 꼴이 우스워서, 그래서 후회해.”

“…….”

“쪽팔리게.”

거친 숨과 함께 내뱉은 짧은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갔다.

오해를 푸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미 볼 일은 다 끝난 셈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걸까? 다 말하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왜 그러셨습니까? 어울리지 않게.”

“……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주안을 쏘아보았다. 거리가 멀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멱살을 틀어쥘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살짝 겁이 나긴 했으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네 명의 에스퍼와 한 명의 버퍼가 보호를 목적으로 계약을 맺은 것 아니었습니까? 신음 소리에……. 네, 뭐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화가 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냥 하룻밤 실수였고, 백은후 씨도 인정한 부분이잖아요.”

“…….”

“왜 오신 겁니까?”

백은후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자괴감을 느끼는지 연신 거칠게 숨을 내뱉기도 했다. 그러곤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주안을 쳐다봤다.

격해진 감정이 무엇을 말해 주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가버린 거다. 너처럼 계산적인 녀석이 왜 감정적으로 구는지 너도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그런데 그 질문이 실수였다는 것을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깨달아 버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도를 넘었다는 거네. 연인 사이도 아닌데. 하……. 알겠어.”

백은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모준영. 시설 앞 공원이야. 성주안 데려가.”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은 백은후는 여전히 사이를 둔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를 탓하지도 않았고 모준영에게 날을 세우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가로등 불빛에 백은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주안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림자만 보며 앉아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이게 무엇일까? 혼란스러웠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혼란을 풀기 위해 질문하면 더 혼란스러워질 것을 아니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성주안 씨.”

모준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백은후의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모준영이 서 있었다.

혼란스러운 저만큼이나 묻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벤치에서 일어선 주안은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기를 바라며 팔짱을 꼈다. 놀라서 어깨를 떠는 모준영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백은후와 걸었던 길을 되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워서도 백은후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자기 위해 눈을 감아도 그의 쓸쓸한 표정이 떠올라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아무래도 예전처럼 자연스러운 관계는 안 되겠지.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가? 만약 둘 사이의 은밀한 계약을 없던 일로 하면 파티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혼란스러운데 아무것도 정리되는 건 없었다.

모로 누운 채 한숨을 쉬는데 커다란 팔이 몸을 감싸왔다.

“백은후 때문에 고민하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주안 씨.”

“…….”

“내 침대에 누워서 다른 남자 문제로 고민하는 건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제야 성주안은 백은후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복잡해서 잠시 밀어놓았던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개발자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캐릭터들, 아니 남자들. 그리고 던전을 공략하려면 그들이 모두 필요하기에 어느 하나 고를 수 없는 자신의 처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이끌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 마치 맨몸으로 바다 위를 떠다니는 듯한 막막한 기분이었다.

“복잡하겠죠. 저조차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주안은 대답 없이 자는 척했다. 제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모준영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선택의 과정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땐 선택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운명에 몸을 맡기든,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든, 섣불리 선택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이상하게 그 말이 위로되었다.

모준영, 당신도 그랬어? 선택하기 어려운 문제가 놓였을 때 무책임하게 도망갔어?

아니겠지.

자기에겐 엄격하고 남에겐 관대한 모준영이 그랬을 리가 없을 것이다. 모준영은 무엇이든 선택했을 것이고 어른스럽게 책임도 졌을 것이다.

그런 걸 아니까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계속 자는 척하는 게 좋겠다.

* * *

다음 날, 남은 하급 스테이지를 공략하기 위해 파티원들은 센터에 있는 회의실에 모였다. 다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주지찬이 싸 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주안은 조금도 먹을 수 없었다.

확 달라진 백은후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셔츠에 구김 하나 없는 검은색 전투복을 챙겨 입은 모습은 평소와 비슷했으나, 표정이나 말투가 지나치게 정중한 것이 모준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백은후에게 되지도 않는 시비를 걸며 건드리는 쪽은 오히려 모준영이었다.

“음식 앞에 놓고 일하는 거 아닙니다. 누군 안 바쁜 줄 압니까?”

그런 도발에도 백은후는 조용히 태블릿을 놓았다.

“아, 미안해. 잠시 계획 좀 세우느라.”

“…….”

“그래서 다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는 최대한 빨리 공략을 끝냈으면 하는데. 지금 남은 스테이지는 총 다섯 개, 6번부터 10번까지야. 8번부터 난이도가 올라간다고 했으니 오늘 내로 6번 7번은 끝냈으면 좋겠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백은후의 질문에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백은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라졌다는 것을 다들 느낀 모양이었다.

“보호를 명목으로 돌아가며 성주안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사실 성주안이 가장 안전한 건 우리 모두와 함께 있을 때 아닌가?”

그 말엔 공세윤이 동의했다.

“사실 저는 형과 둘이서만 있고 싶지만 그 말엔 동의해요. 여럿이 있든 둘이 있든 옆에 없으면 너무너무 불안하니까요. 납치 문제도 있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납치를 당할 뻔한 거지, 당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럼 오늘부터 매일 하나씩 공략하는 거로 해.”

6번 7번까진 가능하겠지만 8번부턴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물론 앞에 던전에서 나오는 보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던 성주안은 잠시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백은후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가 뭡니까?”

“……성좌 새끼들 재수 없어서. 그건 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저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서였다. 다른 파티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백은후의 말에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주안은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백은후가 언제부터 특유의 능글거림 없이 순수하게 공략에만 열정적이었나? 신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성주안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백은후를 쳐다보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성좌도 성좌인데, 궁금해졌어. 던전 공략이 끝나고 우리가 어떻게 될지. 무엇으로든 결론이 났으면 좋겠으니까.”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에 성주안은 더 물을 수 없었다. 더 물어봐야 제가 더 손해일 것 같았다.

“그러니, 시간 낭비 그만하고 밥 다 먹었으면 일어서. 사냥 가게.”

“아무 대비 없이요? 이번엔 성좌들에게 정보도 얻지 못한 상황이에요. 무슨 트릭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백은후가 조소하며 말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정보. 그냥 가서 부딪히는 게 나아.”

그저 담담하게 말을 하는 것뿐인데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당장이라도 모든 던전을 다 부술 것 같은 기세였다.

설마 던전 공략을 끝내고 마지막 소원으로 세계 정복 같은 걸 빌 생각은 아니겠지?

성주안은 불안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떨며 백은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본래 캐릭터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백은후가 보여준 그 같지 않은 행동들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그의 편을 들었다.

성주안은 결국 백은후를 따라나섰다. 파티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백은후 왜 저래요? 미친 것 같아요.”

공세윤은 성주안에게 말했지만 대답을 한 건 주지찬이었다.

“그러게, 내 도시락을 먹었으니 뭘 잘못 먹은 것도 아닐 텐데? 너한테 우울함이 옮은 거 아냐?”

“씨……. 뭔 헛소리야?”

백은후에 대한 감상평을 주고받던 공세윤과 주지찬은 보호막을 만들어 성주안을 그 안에 집어넣곤 폭주하듯 번개를 쏘아대는 백은후를 구경했다. 백은후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미친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성좌 놈들이 트릭을 심을 시간이 없었던 건지 던전의 난이도는 6 스테이지에 걸맞은 정도여서 크게 위험한 건 아니었지만 백은후가 저토록 미쳐 날뛰는 걸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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