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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72)화 (72/74)

072.

“그럼 왜…….”

주안으로부터 몇 걸음 뒤로 떨어진 모준영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와 보세요.”

주안은 별 의심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고 보니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허리 부분이 저릿했다. 아무래도 어제의 여파가 지금까지 남은 것 같았다. 젠장, 백은후…….

주안이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모준영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그가 거의 힘을 주지 않은 채로 어깨를 살짝 당겼다. 예상치 못한 터치에 주안의 몸이 기우뚱하며 쓰러지듯 모준영의 품에 안겼다. 단단한 가슴팍이 뺨에 닿는 느낌에 얼굴을 떼려 하자 그가 어깨를 감쌌다.

“근육을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이대로 주지찬 씨를 만나면 바로 알아챌 겁니다. 공세윤에게도 그런 걸 들켜서 좋을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성적인 뉘앙스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터치와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복장으로 마사지라니, 꺼려지는 게 당연했다. 주안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

하하, 어색하게 웃는 웃음에도 모준영은 따라 웃어주지 않았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난 그런 쪽으로는 담백한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겁니다. 불처럼 뜨거운 감정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받아도 괜찮은 건 아니에요.”

항상 머리로 생각했던 모준영의 말이었는데 이번엔 가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솔직해서 그런가? 아니면 무시당한다는 말 때문일까? 괜히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주안은 그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 좀 하겠습니다.”

“그래요. 침대에 누우세요. 이래 봬도 특공대 출신이라 근육 풀어주는 덴 자신 있습니다.”

괜한 허세가 아니었는지 모준영의 손길은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침대에 누워 그의 손에 몸을 맡긴 지 채 5분이 안 되어 뭉친 근육들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 났다.

그는 막무가내로 아픈 자리를 눌러 고통을 유발하지도 않았고, 누구처럼 일부러 야하게 만져서 자극하지도 않았다. 정말 근육만 풀겠다는 듯 깔끔한 터치가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손이 주는 느낌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어깨와 등을 마사지하던 손이 허리까지 내려갔을 때였다.

기립근과 둔근 사이에 손이 닿는 그 짧은 순간 강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온몸이 다 저릿했다.

“흐읏. 거, 거기는 좀.”

“여기가 가장 많이 뭉쳤습니다.”

야하게 만진다거나 맨살에 닿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저릿했다. 모준영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성주안, 저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 같아서 민망했다. 그때,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안은 우울한 상태의 공세윤의 전화면 받아야 할 것 같아서 핸드폰을 쥔 채로 모준영을 돌아보았다. 모준영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세요?”

―성주안, 저녁은 먹었나? 오늘 나간 기사들이 아주 화려하더군.

예상과는 다르게 전화를 건 사람은 백은후였다. 기사에 대한 말에 뭐라 반응하긴 해야겠는데 허리를 누르는 악력 때문에 말이 나가지 않았다.

“으흣, 거, 거기 그만하세…….”

“좀 참으세요. 안 풀면 주안 씨만 손햅니다.”

―성주안?

저를 부르는 백은후의 목소리에 주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오해를 사기 충분한 대화 내용이었다.

“아, 네네. 백은후 씨.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까 제가 지금 자세가 좀 이상……. 흐읏. 해서 모준영 씨가 푸, 풀어……. 아, 좀!”

―…….

상대 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해를 풀겠다고 한 말이 오히려 오해를 더 부추긴 것 같았다.

“백은후 씨? 저기요.”

모준영의 손에 고문을 당하며 백은후의 이름을 세 번쯤 불렀나?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 액정을 확인해 봤더니 전화는 이미 끊어진 후였다.

“젠장. 백은후 씨 아무래도 오해한 것 같은데요.”

“잘됐네요. 혼자만 당하기 억울했는데.”

“그렇게 안 봤는데 유치한 구석이 있네요.”

“인정합니다.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으니까요.”

모준영의 손이 둔부를 타고 쭉 내려갔다. 허벅지와 무릎 뒤쪽, 종아리와 발목까지 빠짐없이 누르고 발바닥까지 간지럽혔다. 이제 그만하라고 하고 싶은데 손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근육이 풀리고 편안해져서 주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백은후의 오해 따위,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근육 케어를 끝낸 모준영이 뿌듯한 표정으로 주안의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걸어 보세요.”

주안은 어색하게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디뎠다. 서 있기조차 힘들었던 몸이 가뿐해져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침실을 한 바퀴 빙 돌아보니 확실히 아까보다 걸음도 자연스러워지고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결 나아졌군요. 자고 나면 더 괜찮아질 겁니다.”

주안은 문득 아까 모준영이 했던 말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불처럼 뜨겁지 않아도…… 좋네요. 고맙습니다.”

“네, 뭐……. 그럼 쉬어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돌린 모준영이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침대를 양보하고 바닥에서 잘 생각인 것 같았다. 이런 행동마저도 너무 모준영다워서 웃음이 났다.

“침대도 넓은데 그냥 올라와서 자지 그래요?”

“……됐습니다. 이게 편해요.”

모준영이 이불에 막 누우려고 했을 때였다.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설마가 또 사람을 잡지 않아야 할 텐데…….

“이거, 계약 위반입니다. 백은후 씨. 상대의 영역은 존중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는 항상 사람을 잡는다. 백은후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화기를 다 숨기지 못한 채 현관에 기대 서 있었다. 그의 주변에 푸른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영역이라니. 나는 보안국 은수정 이사의 요청을 전달하러 왔을 뿐이야. 극비사항이라 나를 통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은 없어.”

누가 들어도 거짓말임을 한 번에 알아차릴 만큼 어설픈 핑계였다. 보안국 이사의 전달 사항을 왜 공무원도 아닌 백은후가 전달한단 말인가? 모준영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코웃음 쳤다.

“이 밤에 은수정 이사가 요청한 사안이면 엄청난 일이겠군요. 한번 들어나 봅시다.”

비아냥거리는 모준영의 말에 백은후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더니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준영과 주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뜨거웠나 봐?”

“우리가 뜨겁든 차갑든 무슨 상관입니까? 백은후 씨 차례도 아닌데요. 전달 사항 없으면 이만 돌아가 주시죠?”

실랑이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모준영의 말대로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백은후는 여전히 매서운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이대로 두면 누구 하나 먼저 주먹을 날려도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였다.

성주안은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해결하는 것도 자신이어야 한다고.

주안은 천천히 걸어 두 사람 사이에 섰다. 그리고 백은후를 향해 말했다.

“백은후 씨, 우리 사이의 일은 둘이서 풀죠. 괜히 모준영 씨 괴롭히지 마시고.”

백은후가 눈을 치켜뜨는 사이 주안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엔 모준영을 향해 말했다.

“모준영 씨는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나가서 대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싫다면 어쩔 겁니까?”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주안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대응했다.

“제가 아는 모준영 씨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요. 30분이면 됩니다. 만약 30분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찾으러 오세요.”

모준영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젠장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실수로 밤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어제 관계를 한 사람이 다음날 다른 사람과 관계를 했다고 오해하는 건 누구라도 달갑지 않을 테니, 백은후의 오해를 푸는 게 먼저였다.

주안은 모준영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고는 백은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각성자들끼리 모여 사는 건물 주변, 그것도 늦은 밤이라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조용한 거리를 두 사람은 꽤 오래 말없이 걸었다. 모준영과 약속한 시간은 30분, 그 안에 말을 끝내야 하는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골목을 돌아 공원 안에 들어갔을 때, 백은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저기 앉자.”

백은후가 가로등 밑 벤치에 가서 앉았다. 주안은 말없이 다가가 그의 옆에 자리 잡았다. 주안은 제 옆얼굴을 훑는 시선을 느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모준영 씨랑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근육 마사지를 했을 뿐이에요.”

“…….”

백은후가 눈에 띄게 안도하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며 주안은 한숨을 쉬었다. 죄책감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떠들어대는군.”

“좀 솔직해지시죠? 그런다고 이미 여기까지 온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백은후의 입에서도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준영과 잤다고 오해하고 여기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것도 모자라 오해를 푸는 말엔 안도감까지 느꼈으면서 왜 한숨을 쉬는 걸까.

혹시나 그는…….

“후회합니까?”

“어, 후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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