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
뒤이어 모준영이 이끈 센터 소속 각성자 부대와 주지찬도 도착했다. 그들은 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며 불법 헌터들을 노려보았다.
이한열의 은신술에만 기대고 있던 불법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S급들의 등장에 대장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 성좌라도 나서서 무언가 해줬으면 좋겠는데 성좌는 더는 코인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씨발, 성좌 따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공중에 떠 있던 백은후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봐, 이제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너희가 불쌍해서 지금껏 봐준 게 아니야. 민간인들 때문에 봐주고 있었던 거지. 은신술이 아무리 강해도 우린 다 눈치챈다고.”
백은후가 혼자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음에도 파티원들을 기다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주안을 보호한 상태로 저들과 싸우면 민간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인질이든 뭐든 성주안만 구하고 저들을 모두 죽였겠지만 그랬다가 주안에게 무슨 원망을 받을지 몰라 몸을 사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질을 보호할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몸을 사릴 이유도 없었다.
백은후가 채찍을 휘두르자 숨어 있던 이한열의 모습이 드러났다. 옷이 찢기고 머리가 반쯤 타들어 간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백은후의 말로 상황을 눈치챈 파티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움직였다.
공세윤이 성주안을 안은 채 얼음기둥을 세워 위로 올라갔고, 주지찬은 주작이 되어 헌터들 사이를 날았다. 그 사이 모준영이 몸을 쇳덩이로 만들어 무차별적으로 쏘아대는 총알을 제게로만 향하게 한 뒤에 인질들을 안전하게 빼돌렸다.
“우와.”
성주안은 공세윤의 어깨에 매달린 채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마디 말도 없이 각자의 역할을 알아서 이행하는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
주지찬의 손에 잡힌 불법 헌터들은 대장과 이한열을 포함하여 총 다섯 명. 겁도 없이 성주안을 노린 것 치고는 오합지졸이었다. 주지찬이 그들을 밧줄로 묶어 센터 소속 각성자들에게 차례로 넘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인질들이 하나같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든 찬사는 성주안에게 돌아갔다.
“성주안 버퍼가 S급을 모았다.”
“성주안 버퍼의 말에 따라 움직였나 봐.”
“대단해.”
성주안은 오해를 고쳐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사고 수습이 먼저라 입을 다물었다.
모준영은 인질 중 다친 사람이 있나 확인을 마친 후, 안전을 위해 미리 불러놓은 구급차에 차례로 실었다.
상황 정리가 끝나는 것을 확인한 공세윤은 그제야 얼음기둥에서 내려왔다. 성주안을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놓자마자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와락 껴안았다.
“형, 다친 데 없어요? 내가 얼마나 놀랐다고요. 불안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어……. 세윤 씨, 저는 진짜 멀쩡한데요.”
상태만 보면 납치당할 뻔한 성주안보다 공세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주안은 그에게 안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무원들의 손에 잡혀가는 불법 헌터들이 파티원들을 향해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내뱉는 사이, 인질들은 타라는 구급차에는 타지 않고 S급 각성자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납치당할 뻔한 소감이 어때?”
잿더미가 돼버린 자신의 차를 무심한 눈으로 훑은 백은후가 성주안을 향해 말했다. 차가 저 지경이 되었는데도 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납치……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일단 그동안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요. 불법 헌터에 은신술을 쓰는 각성자에, 뭐, 사실 확인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말한 것처럼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성주안, 괜찮아?”
주지찬이 옷에 묻은 재를 툭툭 털며 물었다. 주안이 대답할 새도 없이 이번엔 마지막 인질까지 구급차에 강제로 태워 보낸 모준영이 다가왔다.
“성주안 씨도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방어력은 제로에 가까우니 다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한 거 없이 백은후 옆에 있다가 공세윤에게 토스 되었을 뿐이라 멀쩡한데 걱정이 지나쳤다. 성주안은 떨어지지 않으려는 공세윤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다 오신 거예요?”
“도심 한복판에서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센터로 연락이 옵니다. 정리 끝난 것 같은데 각자 하던 일이나 하러 갑시다. ”
마치 볼일 다 끝났으면 꺼지라는 듯 말하는 모준영의 말투에 공세윤이 발끈했다.
“지금 일이나 하러 가자는 말을 할 땐가? S급도 안되는 미등록 헌터들이 겁도 없이 형을 공격했는데. 저들이 뭘 믿고 그랬겠어. 성좌 새끼들이 꼬셨겠지.”
날카로운 지적에 백은후가 편을 들고 나섰다.
“일리 있는 지적이야. 은신술을 쓰는 헌터가 갑자기 힘이 강해진 걸 보면 성좌가 코인을 썼겠지.”
가만히 있던 주지찬도 합세했다.
“성좌 새끼들이 자꾸 선을 넘네? 하급 던전들부터 후딱 해치우자고!”
성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졌다가 다시 또 모이는 것보다 모인 김에 던전 하나라도 더 공략하는 게 낫지.
“그럼 오늘 내로 2스테이지 4스테이지 공략하고 개운하게 쉬러 가면 좋겠어요.”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종일 초조하게 마음을 졸인 모준영 만이 인상을 구겼다.
* * *
한편 길드 채팅창에서는 저번 1스테이지 작전과 이번 불법 헌터와의 연합작전을 동시에 망친 성좌들이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길드] 지혜의 관찰자(비나) : 이게 다 게부라 때문이에요. 너무 섣불렀어요.
[길드] 전차를 타는 전사(게부라) : 시1발. 누가 은신술마저 들킬 줄 알았어? 다들 내 말에 동의해놓고 이제 와서.
[길드] 수단을 입은 왕(헤세드) : 저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길드] 로브를 벗은 마법사(예소드)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모준영이 점점 더 성주안에게 의존하고 있어서 큰일인데.
모두 상황에 대한 분석 없이 남 탓을 하거나 제 이득만 챙기려 하니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A급 각성자를 이용해 6스테이지까지 공략하는 덴 성공했으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상급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은 A급만으로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전에 성주안의 파티를 해체해야 했다.
그러나 당장은 성좌들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앞선 계획을 실행하느라 모아놓았던 코인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공략을 이어가려면 코인부터 벌어야 했다. 그들은 이후로도 얼마간 이야기를 더 나눴지만, 결국 오늘의 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지나갔다.
* * *
“너무 우습게 끝나 버렸는데?”
4스테이지 공략을 끝내고 그 앞에 모인 파티원들 모두 주지찬의 말에 동의했다. 2스테이지는 들어간 지 30분 만에 해결했고 4스테이지 또한 한 시간이 안 되어서 공략을 마쳤다. 난이도가 쉬웠던 만큼 보상도 별 볼 일 없었으나 파티원들은 보상보단 너무 쉽게 끝난 것에 의아해했다.
“성좌의 방해가 없었던 건 처음 아니었나?”
“맞아요. 아마도 코인이 안 남은 게 아닐까요?”
그렇게 말하는 성주안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지금껏 진 적은 없었지만 성좌들이 다음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사이다를 마신 듯 속이 시원해졌다.
주안이 공략이 끝난 던전을 보며 미소 짓는 중에 백은후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약속, 잊지 마.”
주안의 어깨가 움찔하자 백은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러다 소문나겠다.”
소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주안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더는 백은후와 말을 섞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지.
성주안은 서둘러 모준영에게 갔다.
“피곤한데 얼른 갑시다. 설마 또 센터 들리는 건 아니죠?”
“연락해 뒀으니 그냥 가도 될 겁니다.”
“역시 금강불괴 씨!”
엄지를 척 치켜들며 하는 말에 모준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그러면 그럴수록 주안이 더 심하게 놀린다는 걸 알면서도 저 말엔 반응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모준영은 제 앞에 있는 성주안을 바라봤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금강불괴 씨를 외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살살 짓는 눈웃음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홀릴 지경이었다.
정복을 입었을 때도 예쁘더니 전투복을 입어도 마찬가지네.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애써 외면한 채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그 탓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성주안이 웃음을 멈추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그만 놀릴게요. 한 번만 더 놀렸다간 잡아먹히겠네.”
“……갑시다.”
모준영은 자연스레 성주안의 팔짱을 꼈다. 잠시 주춤하던 성주안은 이내 어깨에 힘을 풀고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공세윤이 너무 아쉽다며 다음 차례까지 기다리기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모준영은 성주안을 납치하듯 차에 태워 거주 시설로 향했다. 가는 동안 너무 조용해서 고개를 돌리자 주안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차를 세우고 시트를 뒤로 넘겨 몸을 편하게 만들어 준 다음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시설로 향하는 동안 모준영은 성주안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이 드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성주안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데 그게 언제부터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제 파티에서부터? 아니면 폭주로 친구가 죽은 일을 두고 제 잘못이 아니라고 했을 때부터? 그도 아니라면 처음 센터에 방문했을 때부터 그랬나?
생각해 봐도 그 시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은 친구에 대한 죄를 씻기 위해 계획대로만 살아온 자신의 삶이 갑자기 끼어든 성주안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감정은 모준영에게 있어 갑자기 일어난 폭주만큼 위험한 것이었고, 위험한 것은 제 마음에서 내보내야만 했다.
“이대론 안 돼.”
모준영이 내뱉은 혼잣말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나 제 마음을 다잡아보자고 결심한 보람도 없이 시설에 도착하자마자 이민재로부터 들은 소식에 모준영은 다시 또 흔들리고 말았다.
“저기 쌓인 것 좀 보세요. 저게 다 버퍼 성주안 씨에게 온 팬레터와 선물입니다. 거주 시설 직원들이 택배 받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