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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69)화 (69/74)

069.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주안은 손톱을 깨물며 고민했다. 이런 걸 왜 고민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백은후가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숙여와서 대답이라도 해야 그의 키스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게요. 백은후 씨, 일단 진정하시고요.”

“그래서, 대답은?”

“그러니까…… 일단 비밀로 하고 그 대신 가끔 어, 어제처럼 하자는 말씀이잖아요?”

분명 백은후가 한 말을 반복했을 뿐인데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가끔? 아니, 내 차례가 올 때마다지. 그 부분만 고치면 되겠어.”

“…….”

주안은 입을 벌린 채 백은후를 쳐다봤다. 그가 씩 웃으며 대답을 재촉해왔다.

“대답.”

하아, 피해 갈 수 없겠구나. 가장 최악은 모든 파티원이 이 사실을 아는 것이니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성주안은 크게 한숨을 쉰 뒤 고개만 끄덕했다. 성의 없는 반응이 불만인 것 같았으나 주안에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 * *

모준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분명 백은후와 성주안이 도착해야 할 시간임에도 두 사람 모두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

문득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사이 성주안을 보는 백은후의 눈빛에 서린 탐욕이 떠오른 탓이다. 원하는 것이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야 마는 그의 행동을 생각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데리고 도망쳤구나!

그 생각을 하자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열이 올랐다.

성좌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갑자기 나타난 S급 버퍼의 존재는 파티원들 뿐만 아니라 다른 각성자들마저 흥분시켰다. S급 버퍼가 나왔으니 A급 버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각성자들의 목숨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성좌와 계약하지 않고도 상위 던전 공략이 가능했다.

S급이 아니면 희망이 없었던 각성자들의 분노가 조금씩 잦아들었고, 표정이 바뀌었다. 그 영향으로 각성자들이 일으키는 말썽도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었다.

이게 모두 성주안 버퍼의 긍정적인 효과였다.

그래서 긴장을 풀어버린 것이 실수였을까? 백은후 따위를 믿어선 안 되었는데!

모준영은 벌써 몇 분째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성주안도 백은후도 연락이 안 되었다.

센터 소속 각성자들을 풀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명분이 부족했다. 무슨 사건 사고가 터진 것도 아니고 백은후가 성주안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물적 증거도 없으니…….

혼자라도 추적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재킷을 들었을 때였다. 비서가 센터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센터장님…….”

“왜? 무슨 일이야?”

비서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는 듯 몇 번이나 숨을 삼키다 입을 열었다.

“미등록 상태의 불법 각성자들이 백은후 헌터와 성주안 버퍼를 민간인 구역에서 공격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장소는…….”

비서의 표정은 심각했으나 모준영은 오히려 마음을 놓았다.

미등록 각성자가 S급이라고 해도 성주안을 끼고 있는 백은후에겐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문제는 그곳이 민간인 구역이라는 것뿐……. 그 정도는 성주안이 알아서 조절할 테니 괜찮았다.

“다행이군.”

“네? 센터장님…….”

“아, 민간인 희생이 일어나기 전에 소식이 들어온 게 다행이라고.”

너무나도 태연한 모준영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비서는 아까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여기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사거리입니다.”

“출동해.”

비서에게 명령한 후 모준영은 바로 주지찬과 공세윤에게 연락했다.

센터 소속 각성자들을 대동한 모준영과 주지찬, 그리고 공세윤이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연락을 받은 지 채 10분이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 * *

30분 전, 모준영이 있는 각성자 관리센터로 향하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차를 세웠다. 아스팔트가 터진 모양인지 차 앞은 뿌연 돌가루로 가득했다.

백은후는 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성주안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건너편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헌터들을 보며 말했다.

“A급이겠네.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단 모준영이 사고 소식을 접하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겠어.”

성주안은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백은후의 태도가 기가 막혔다. 그러면서도 백은후는 제 허리를 감은 팔을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 안전이 아니라, 불법 헌터들이 인질로 삼고 있는 민간인이었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안 헌터들은 직접적인 공격을 하는 대신 애꿎은 시설물을 파괴하고, 주변의 차들을 코너로 몰았다. 그 차에 모든 인질이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사람들 구해야죠.”

“그래서? 여기에서 번개라도 소환할까? 그래봐야 다치는 건 민간인이야.”

“세부 공격할 줄 몰라요? 주지찬은 총 쏘는 것처럼 좁은 구역에도 공격할 수 있던데요? 백은후 씨는 못 하나?”

어쭙잖은 도발에 백은후는 실실 웃기만 했다.

아니, 지금이 웃을 상황이냐고요.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사람들을 보고 웃다니.

성주안이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고 있을 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백은후 헌터 아니야?”

“……버퍼도 있어! 우리는 살았다.”

두 사람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미 풀려난 듯 외쳐댄 것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불법 헌터들이 옆구리에 낀 총을 들어 사람들을 위협했다.

사람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백은후의 손을 풀고 뛰쳐나가려 했다. 백은후가 그의 허리를 강하게 잡았다.

“진정해. 살인까진 못할 거야.”

주안은 백은후에게 잡힌 채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미등록자인 것만 해도 중범죄인데 살인죄가 추가되면 죽기 전엔 벗어나지 못할 텐데? 그 보다 애초에 게임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시내 한복판에서 공격을 감행한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 슬슬 몸 좀 풀어볼까?”

백은후가 인벤토리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여러 개로 갈라진 채찍을 도로에 내려치자 황금빛 불꽃이 번쩍였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헌터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곧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설마 지금 공격하실 건 아니죠? 그거로 쳤다간 사람들이 다칠 텐데요.”

“겁만 주려는 거야. 그나저나 어디 가지 말고 옆에 꼭 붙어 있어.”

“왜요?”

“쟤들이 노리는 건 버퍼야. 미등록자가 신분이 노출될 걸 알면서도 공격을 감행했다는 건 숨겨둔 무언가가 있다는 거지.”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라거나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는 놈들일 수도 있죠.”

“저렇게 단순해서야…….”

쯧, 백은후는 혀를 차며 앞을 주시했다. 사람들을 훑는 눈이 부상자를 찾는 듯했다. 그러더니 헌터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한백 길드의 길드장, 백은후다. 센터 소속 아니니 법에 지배를 받지 않고 더불어 면책 특권도 있지. 살고 싶으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어때?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런다고 포기할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다. 예상대로 헌터들은 코웃음을 치며 공중으로 총을 쏘아댔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 것은. 성주안은 바짝 긴장한 채로 백은후를 불렀다.

“배, 백은후 씨.”

“왜 그러지?”

“등 뒤에 기운이 느껴집니다. 분명, 누군가 있어요.”

불법 헌터들이나 외국 헌터들 중에 은신술을 쓰는 헌터가 있다는 것을 안 뒤로 조심하고 있던 터였다. 아까 백은후가 말한 그들이 숨겨놓고 있었던 그 무엇은 아무래도 은신술을 쓰는 사람 같았다.

말을 들은 백은후는 단숨에 주안의 허리를 감싸 안고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에서 뿜어져 나온 번개가 황금빛 물결을 일으키며 두 사람을 공중으로 띄웠다.

은신술을 쓰고 있던 헌터는 제 능력을 너무 쉽게 들킨 것도 놀라운데 생각보다 빠른 동작에 재빨리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아무래도 저 버퍼, 능력이 생각보다 우수한 것 같아. 내 은신술이 들켰어.”

“젠장.”

불법 헌터 조직을 이끄는 대장은 이대로 가다간 버퍼를 납치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고 담합한 성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봐, 전사. 은신술이 통하지 않을 거라곤 말 안 했잖아!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가 자기도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 무책임한 발언을……. 이제 어쩔 거야. 코인이라도 써서 함정을 파야지.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성좌와 담합한 이상 버퍼 따위는 게임이 안 될 것이다.

대장은 지금까지 수차례 성좌와의 계약에 도전했지만 한 번도 뜻을 이룬 적이 없었다. 이번 일을 잘 해내서 성좌와 계약하면 S급들보다 더 빠르게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 거다. 그때 나오는 보상으로 정부에 대항하고 자신들이 권력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성좌, 전차를 타는 전사가 10코인으로 능력치를 올려줍니다.>

<각성자, 이한열의 민첩도가 5증가합니다.>

<각성자, 이한열의 은신술이 5증가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한 대장이 이한열에게 바로 지시했다.

“다시 가, 아까보단 기운을 덜 느낄 거야.”

“……네, 그렇긴 한데요. 쟤들 언제 내려와요? 쟤들이 내려와야 몰래 납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한열이 공중에 떠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무슨 스킬 지속 시간이 저리도 긴지, 그들은 아래로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마음만 먹으면 금세 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저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인질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가. 내려오면 바로 잡아채면 되잖아.”

“넵, 알겠습니다.”

이한열이 다시 스킬을 쓰자 그의 몸이 점점 투명하게 변했다.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성주안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려던 그때, 저기 반대편에서 빨간 스포츠카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연기를 피우며 정차한 스포츠카에서 내린 사람은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공세윤이었다.

“씨발! 우리 형 누가 건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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