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백은후가 모준영을 향해 말했다.
“오늘의 특혜는 어떻게 갚을 생각이지?”
특혜라니? 백은후가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깜빡이자 모준영이 대놓고 비웃었다.
“제게 빚진 쪽은 백은후 씨 아닙니까? 오늘 아침에 간절하게 부탁한 사람은 누구였더라?”
아까는 백은후가 그럴 줄 몰랐다며 편을 들더니 정작 당사자 앞에서는 당장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날카롭게 굴었다. 10대 청소년도 아니고 왜 만나기만 하면 싸워. 진짜 미치겠네.
“하, 은수정에게 가서 거래는 없었던 거로 해야겠네. 내가 누굴 위해서 이런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당장이라도 은수정과의 협상을 취소해 버릴 것만 같은 백은후의 태도에 주안은 어깨를 움찔했다. 이번 거래로 이득을 얻는 건 파티원 전체이니 그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취소해 버리면 모두가 손해를 보니까 막아야 했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편을 들던 모준영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희생이라……. 성주안 씨와의 반나절을 포기하는 게 희생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거창한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꼭 공세윤 씨 같네요.”
백은후가 한 방 먹은 표정으로 모준영을 노려봤다. 이번엔 여러모로 모준영이 우세했다. 누구 한 명 폭발하기 전에 제발 이쯤에서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둘을 떼어놓는 게 낫겠지?
성주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은수정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주안은 몰래 손가락을 들어 백은후를 가리켰다. 그러자 눈치 빠른 은수정이 이쪽으로 다가와 백은후의 팔짱을 꼈다.
“길드장님, 나 혼자 두고 여기서 뭐 해?”
“……하.”
“이러면 나 서운해.”
백은후는 모준영에게 받아치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은수정의 손에 끌려갔다. 그를 보는 모준영의 얼굴에 활짝 꽃이 핀 듯했다.
“모준영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못된 취미가 있네요.”
“재밌지 않습니까? 빌런이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 거요.”
“……네, 참 재밌기도 하네요. 금강불괴 씨.”
웃고 있던 모준영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이제 그 놀림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금강불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발작버튼이 눌린 것처럼 굴었다. 솔직히 조금 웃겼다.
“언제까지 그 이름으로 부를 겁니까? 진심으로 싫습니다.”
모준영이 들고 있던 잔을 기울이곤 마침 지나가는 직원의 트레이에 올렸다.
“그러는 모준영 씨는 백은후 씨와 언제 친해질 생각입니까?”
지지 않고 맞받아쳤더니 모준영이 조소했다.
“그거 꼭 백은후 씨와 친해질 때까지 계속 놀리겠다는 협박으로 들립니다만?”
“맞아요. 놀림받기 싫으면 그만하라는 뜻입니다. 애들도 아니고 적당히 좀 합시다. 유치하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면 실랑이를 이어갈 생각인 모양인데 마침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에 모준영의 얼굴이 풀어졌다.
“……성주안 버퍼님 맞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은수정과 비슷한 복장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성주안은 올림머리 아래에 목선을 타고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여자가 먼저 손을 뻗어서 악수하려는데 모준영이 대신 잡아챘다.
“안녕하세요. 김성희 의원님, 저는 각성자 관리센터의 센터장, 모준영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모준영의 손을 맞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성주안 버퍼님과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지난번 레스토랑에선 단칼에 거절하던 모준영이 김 의원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국회의원이라 거절하기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국회의원이 이렇게 젊고 아름다울까?
성주안은 약간 설레는 기분으로 그녀와 함께 서서 사진을 찍었다. 상기된 얼굴이 그대로 비췄을 것이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봐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싸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모준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또 이상한 말 할 거면 하지 마세요.”
“제가 뭐랬다고 그럽니까?”
그나저나 이 파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건지 궁금해졌다. 몸에 맞는 정복이라도 오래 입고 있으니 불편하기도 했고 이따금 이쪽을 노려보는 백은후의 시선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마치 제가 오늘 희생했으니 나중에 대가를 치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 건 해가 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동안 성주안은 모준영과 식사를 하고 가끔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끝나겠거니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은수정이 뒤풀이를 제안했다. 다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것 같아 보였으나 권력자의 제안을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잔, 두 잔 술을 마시다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은 양이었다. 그 와중에 모준영과 백은후는 누가 더 술이 세나 내기라도 하듯 잔을 기울였다.
주안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은수정이 약간 격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참 이상하단 말이에요.”
“뭐가요?”
“내가 백은후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저러는 거 처음 봐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주안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백은후와 모준영은 자신 앞에서 항상 저래왔으니까.
“뭐랄까, 조금 유치해졌다고 할까요? 평소 은후 씨였다면 저렇게 술을 계속 마시는 대신 능글거리거나 자리를 떠야 정상인데…….”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통화할 때부터 느꼈는데 확실히 달라졌어요. 이제 조금 사람 같아 보이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줄곧 백은후를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것도 같고 뿌듯해하는 것도 같았다. 한참 백은후를 바라보던 은수정이 주안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에잇, 두 사람 놔두고 술이나 마시죠.”
“아, 네!”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마시다 보니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백은후가 모준영과 저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정복을 입고 올 걸 그랬어. 두 사람 꼭 커플룩 같아서 거슬리네.”
은수정이 킥킥거렸다.
“그렇게 좋아?”
“……뭐가?”
은수정이 백은후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그를 바라보는 눈엔 장난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자기, 주안 씨 볼 때 어떻게 보는지 모르지?”
“…….”
“틈만 나면 잡아먹고 싶은데 참는 표정으로 봐. 눈을 매섭게 뜨고 입술을 핥으면서. 저기, 준영 씨랑 싸우는 것도 그래서잖아? 서로 차지하려고.”
백은후가 발끈했다.
“헛소리는. 무슨 오해를 하나 모르겠는데 성주안 버퍼와 나는 비즈니스 관계야. 서로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백은후가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게 도와주는 건 고마웠으나 막상 서로의 목숨을 맡긴 당사자를 앞에 두고 차갑고 딱딱한 비즈니스 관계라고 말하니 괜히 서운했다.
참나, 나도 너랑 우정 같은 거 쌓을 생각 없거든요? 비즈니스 합시다. 해.
성주안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온 모준영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훗.”
은수정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 쳤다. 사실 수정은 성주안 버퍼를 빌려달라는 말에 백은후가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백은후를 오래 봐온 만큼 그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에 오늘 성주안을 보는 백은후의 표정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저건, 분명 연애하고 싶은 감정이지. 자긴 모르는 것 같지만.
수정은 속말을 삼키며 백은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곤 백은후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은후 씨, 긴장되겠어.”
“자꾸 뭐라는 거야.”
곧 죽어도 아닌 척하는 반응이 우스웠다. 평생 절대 놀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드디어 건수가 생긴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은수정이 아니었다.
“아까 사람들 반응 못 봤어? 김성희 의원은 완전히 대놓고 유혹하던데? 주안 씨도 그리 싫어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면 생각이 없는 것 같지도 않고.”
“자꾸 헛소리 지껄이면 뒤풀이고 뭐고 가버리는 수가 있어.”
“진짜 생각 없어?”
백은후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옆을 보니 어느새 자리를 옮긴 모준영이 성주안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백은후도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그쪽을 흘긋거렸다.
이럴 거면서 아닌 척은, 웃겨 죽겠네.
은수정은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자기, 주안 씨한테 생각 없으면 내가 가져도 돼?”
“말이 되는 소릴 좀 해라.”
“아니, 그쪽 파티는 유지해. 버퍼로 갖겠다는 말이 아니고 남자 여자로 사귀어 보겠단 말이야. 관심 있는 게 아니면 건드려도 되겠네?”
탕!
은수정의 도발에 백은후는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놀란 건 맞은 편에서 술을 마시던 모준영과 성주안일 뿐, 은수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힘내라는 듯 백은후의 어깨를 툭툭 칠 뿐이었다.
백은후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 들키고 싶었는데 결국 들키고 만 것이다. 저 백년 묵은 여우에게.
누구나 탐낼 만하다고? 과연 성주안이 버퍼가 아니라도 그럴까?
백은후의 시선이 자연스레 성주안을 향했다.
잘 매어준 넥타이는 또 언제 풀었는지 느슨하게 내려와 있고 가장 위쪽의 단추가 풀려 새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풀어져 놓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준영을 보고 웃는 게 자꾸 거슬렸다.
“은수정, 뒤풀이는 여기까지 해.”
“그래, 오늘 계약 이행하느라 고생했어.”
백은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성주안에게로 갔다. 그의 팔을 낚아채듯 잡아 일으킨 다음 모준영에게 인사도 없이 문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성주안은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채로 백은후에게 끌려갔다.
“자, 잠시만요. 저는 인사도 제대로 안 했…….”
“내가 했어. 밤이 되면 보안이 약해지니까 빨리 가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