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희생의 창조자의 코인이 탐나서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닙니까?”
백은후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주안의 눈꺼풀을 쓱 훑었다.
“글쎄,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나라고 욕심만 내라는 법은 없지 않나?”
“…….”
“순수한 이끌림이나 정의감일 수도 있지 않아?”
제가 말하고도 낯이 뜨거웠는지 백은후가 헛웃음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다.
“이해 안 되면 이렇게 생각해. 욕심의 종류가 조금 달라졌다고.”
그래, 순수 어쩌고 하는 거보다 그편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백은후의 욕심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정복만 아니라면 안심이었다.
“그래도 긴장을 늦추진 말고.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잘해.”
“네네, 앞으로도 버프 잘 드릴 테니까 돌변하지 마세요.”
정복이 불편해서 그런가? 괜히 목이 조이는 기분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어 내렸더니 성큼 다가선 백은후가 손목을 잡아 제지했다.
“풀지 마. 지금 바로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으니까.”
“응? 어디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오늘 약속을 위해 투자한 게 많으니까 잘해야 할 거야.”
예상대로 백은후는 혼자 또 무슨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문득 스치는 예감에 성주안이 바로 되물었다.
“그거 지난번 사건과 관련이 있는 거죠?”
백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가 지나쳤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누굴 상대로 그런 짓을 벌여.”
천하의 백은후가 얼음 동굴에 갇히기까지 했으니 열이 받는 것도 당연했다. 계획한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백은후가 성좌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들은 이제 죽은 셈이었다.
적이라고 생각했을 땐 무섭기만 한 존재가 같은 편이 되자 이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그럼 가지.”
주안이 백은후와 함께 로비로 나가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길드원들이 하던 말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비의 정중앙을 가르며 거침없이 걷는 걸음에서 S급 특유의 카리스마와 여유가 느껴졌다.
“길드장님이야 원래 그랬지만 저 버퍼는…….”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안 저랬는데.”
“확실히 강해진 것 같아. ……그리고 분위기가 조금 섹시해진 거 같지 않아?”
각자 한마디씩 말을 보탠 길드원들은 그들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건물을 나오니 비서가 차를 대기시켜두 고 있었다. 백은후와 나란히 뒷좌석에 앉은 성주안은 알림음에 핸드폰을 꺼냈다. 파티원들 모두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주안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마음으로 각자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모준영 : 정복은 잘 받으셨습니까? 사이즈는요?>
<성주안 : 잘 받았어요. 사이즈 잘 맞던데요?>
<모준영 : 다행입니다. 백은후 조심하세요.>
모준영에게 고맙다고 답장하고 주지찬의 문자를 확인했다.
<주지찬 :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놔.>
<성주안 : 주지찬 씨가 한 건 다 맛있잖아요.>
<주지찬 : ……바보냐? 웬 동문서답임? 너 맛있으라고 주는 거 아니니까 메뉴나 말해.>
<성주안 : 짬뽕, 돈까스, 초밥, 그때 먹은 딸기 케이크요.>
<주지찬 : ㅇㅇ>
마지막 문자를 확인하고 성주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 확인하기도 전인데 벌써 기가 질렸다. 공세윤의 이름 옆엔 2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혼자 뭘 이렇게 많이 보내놓은 거야.
<공세윤 : 형이 덮었던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있는데 그래도 추워요.>
<공세윤 : 형, 다음에 우리 또 영화 보러 가요.>
<공세윤 : 백은후랑 너무 재밌게 놀면 안 돼요. 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우울함이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네. 죽고 싶다는 말도 안 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말하고.
<성주안 : 세윤 씨, 밥 챙겨 먹고 산책해요.>
<공세윤 : 밥이요? 산책…….>
<성주안 : 안 하려고요?>
<공세윤 : 할게요. 지금 해요!>
잠시 후, 세윤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솥을 찍은 사진이 왔다. 나중에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사진을 보내라고 답장해 주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저를 빤히 보고 있는 백은후와 눈이 보였다. 푸른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어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보모가 따로 없네.”
태블릿을 보는 것 같기에 문자를 가리지 않았더니 옆에서 다 보고 있었나 보다. 누가 음흉한 놈 아니랄까 봐.
“왜 남의 문자는 엿보고 그럽니까?”
“하도 옆에서 바보처럼 웃고 있기에 그랬지. 근데 원래 이렇게 자주 문자를 주고받나?”
백은후의 질문에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오늘따라 이상하긴 했다. 공세윤은 몰라도 주지찬과 모준영까지 연락이 와 있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백은후가 신경 쓰여서 그런가?
“백은후 씨가 하도 미심쩍게 구니까 다들 걱정되는 마음에 보낸 거지, 원랜 자주 연락 안 합니다.”
“이거, 다들 너무 하네. 생사를 함께 한 파티원끼리 말이야.”
“그러니까 평소에 잘했어야죠.”
서로 의미 없는 딜을 주고받는 동안 차가 화려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성주안은 백은후의 뒤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한 눈으로 봐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파티라도 열리는지 곳곳에 설치된 장식물이 화려했다. 1층과 2층을 터서 나선형의 계단으로 연결해 놓아 천장은 높았다. 스테인드글라스 창 앞에 설치된 바에는 고급술들과 정장을 차려입은 바텐더들이 서 있었고, 거리를 두고 배치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영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 화려한 외향을 자랑하고 있었다.
백은후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없는 성주안의 어깨를 감싸며 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두리번거리지 말고 똑바로 걸어.”
성주안은 그제야 제게 달라붙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곤 다리에 힘을 주고 걸었다.
“그나저나 여긴 대체 누굴 보러 온 겁니까?”
“있어. 우리한테 도움이 될 사람.”
대충 대답한 백은후의 걸음이 빨라졌다. 노란빛 조명이 버건디 슈트를 입은 백은후의 뒷모습을 따뜻하게 감싸자, 주안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에 닿았다. 조명과 백은후가 마치 한 몸처럼 어울리는 느낌에 홀린 듯 그를 보다가 안 오고 뭐 하냐는 말을 듣고서야 발을 움직였다.
테이블이 있는 로비를 지나 기다란 복도 끝까지 걸어가자 커다란 문이 나왔다. 그 앞에서 백은후는 최종 점검을 하듯 성주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잘 매어져 있는 넥타이를 다시 조이더니 괜히 어깨도 툭툭 쳤다.
“이 정도면 됐어.”
간단히 감상평을 끝낸 백은후가 아무 정보도 주지 않고 손잡이를 잡아서 주안은 분위기만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저렇게나 긴장하는 걸 보면 만날 사람이 예사 인물은 아니겠다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길고 치렁치렁한 흰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백은후가 다가가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백은후를 안았다.
“오랜만이야, 은후 씨.”
“이사님도 잘 지냈어?”
여자가 높은 톤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사님은 못 지냈고, 은수정은 잘 지냈고.”
여자의 농담에 백은후가 특유의 야살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 만날 상대가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성주안은 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아, 성주안 버퍼시군요.”
“……네, 그쪽은.”
“아, 저는 보안국 이사 은수정이라고 합니다.”
보안국? 보안국이라…….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언제 들었더라?
기억을 헤집는 주안의 머릿속에 센터에 갔을 때 모준영이 상부에 보고한다고 했었던 게 생각났다. 주안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버퍼 성주안이라고 합니다.”
딱딱한 주안의 인사에 수정이 조금 웃으며 화려한 팔찌를 낀 손을 내밀었다. 주안은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닦고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있네요.”
“과, 과찬입니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있는데 백은후가 그녀의 팔을 끌고 맞은 편으로 가서 의자를 꺼냈다. 버건디 슈트와 흰색 실크 원피스를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이 꼭 연예인 같았다.
은수정이 자리를 잡고 앉자 백은후가 테이블을 돌아 주안이 있는 곳으로 왔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몰라 멀뚱하게 서 있자 백은후가 씩 웃으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뭐야? 의자라도 꺼내줘?”
“아닙니다. 됐어요.”
주안은 치를 떨며 제 손으로 의자를 꺼내고 자리에 앉았다. 은수정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성주안 버퍼까지 모셔 온 거면 보통 부탁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급해? 우선 한잔하고 말해도 되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타이를 맨 직원이 들어와 테이블 위를 세팅했다. 하얀색 천이 덧씌워진 테이블 위에 화려하게 플레이팅 된 접시들이 줄지어 놓이고 각자 앞에 샴페인 잔도 하나씩 놓였다. 은수정이 직원에게 눈인사하며 샴페인을 들자 백은후와 성주안도 잔을 들었다. 세 개의 잔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당이 가미된 샴페인은 적당히 상큼하고 시원해서 식욕을 돋았다.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은 은수정이 성주안을 향해 말했다.
“제가 주안 씨 만나고 싶어서 그동안 은후 씨한테 얼마나 부탁했는지.”
주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아, 그러셨어요?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찌나 꼭꼭 숨겨놓고 안 보여주던지, 오늘 보여준다고 해서 신경 좀 썼어요. 저 어떤가요?”
“……그, 아, 아름다우십니다.”
주안의 말에 백은후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성주안, 속지 마. 저 여자 숨겨진 S급이야.”
“네에?”
S급이 파티원들 말고 또 있었다고?
충격에 주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