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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63)화 (63/74)

063.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길 내려다보는 세윤의 얼굴을 보며 주안은 조금 웃었다. 호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심각한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왜요? 왜 그냥 웃기만 해요? 갑자기 그러니까 무서워요.”

“무서울 건 또 뭐가 있어요?”

“가버린다는 말을 할 것 같아서요.”

공세윤이 그렇게 말하며 주안의 손을 꽉 잡았다. 분위기만으로도 불안감을 느꼈나 보다. 이렇게 된 이상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안은 조금 고민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부모님과는 아예 연락을 안 하는 거예요?”

주안의 질문에 공세윤은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안은 세윤이 입을 열 때까지 끈질기게 입을 다물었다. 세윤은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다 뒤늦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했었어요. 자주는 아니고 제 생일날에 한 번요. 재작년 생일에도 전화가 왔었는데……. 그때 우울함 상태라 제가 말실수를 해버렸어요.”

“뭐라고 했는데요?”

시무룩해진 공세윤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 고였다. 그 얼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가 우울함 때문에 막말을 뱉어놓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괜한 말을 꺼내서 애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때론 드러내야 빨리 아무는 상처도 있는 법이었다.

“음…… 저한테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동안 버려뒀으면서 왜 유명해지니까 전화하냐고. 다 싫다고 죽어버릴 거라고 했어요.”

“…….”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충격과 함께 할 말을 잃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 뒤로는 전화 안 오더라고요. 날 무서워하면서도 진짜 죽길 바란 건 아니었나 봐요.”

연락도 안 했다고? 진짜 너무하네.

정상적인 부모였다면 죽는다고 난리 치는 자식에게 연락을 끊는 대신 당장 달려와 병원에 데려가는 게 맞지. 공세윤은 부모가 저를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드니까 나름 이해할 수 있게 합리화했나 보다.

성주안은 제때 치료하지 못해 덧난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심정으로 공세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내가 진짜 부모는 아니지만 내가 널 만들었으니까 책임질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진 못했지만 손을 잡고 쓰다듬는 행동만으로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주안은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위로가 효과가 있었는지 다행히 공세윤과 함께 있는 이틀 동안 우울함이 찾아오진 않았다. 대신 주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세윤이 짜놓은 촘촘한 계획에 다 동참해야 했다.

산책하기, 영화 보기, 공연 보기, 맛집 탐방하기, 유원지에서 토끼 머리띠 쓰기 등 전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모두 끝냈다. 비록 조금 민망하고 힘들었지만 뭔가 할 때마다 이런 건 처음 해 본다며 좋아하는 공세윤을 보니 뿌듯했다.

이윽고 시간이 다 되어 백은후의 차례가 왔다. 한백 길드 앞까지 주안을 데려다 준 세윤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요.”

성주안은 작별을 고하며 떠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 끝까지 달라붙어서 마음이 쓰였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뒤에서 손을 흔드는 공세윤을 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백 길드는 어느 대기업보다 큰 규모의 길드답게 아침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데스크에 신원을 밝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낯익은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백은후였다.

“…….”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그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진짜 시상식이라도 가나? 아님 공식행사?

오늘 백은후의 패션은 그런 오해를 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했다.

아래위로 맞춰 입은 버건디 수트는 떡 벌어진 어깨에 맞춘 듯 완벽한 핏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속에 새하얀 셔츠와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색의 실버 넥타이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붙지도 헐렁하지도 않은 바지는 구김 하나 없었고 잘 빠진 다리를 더 도드라지게 했다.

착장만 보면 날티가 나야 정상인데 특유의 표정 때문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우아해 보였다. 저를 아래위로 관찰하는 성주안을 보는 백은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낮부터 너무 뜨거운데…….”

“뭐예요? 오늘 어디 가요?”

“왔잖아. 너 데리러.”

백은후가 그렇게 말하며 성주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그에게 폭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단단한 가슴이 뺨에 닿자 몸이 굳었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이건 확실히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고 보니 슈트에서 나는 냄새도 평소와 좀 달랐다. 지난번엔 비즈니스 슈트와 잘 어울리는 우드 향을 풍겼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가볍고 산뜻한 향이 풍겼다.

데이트라도 하나? 아니면 주기적으로 만나는 상대가 있다든가.

성주안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백은후가 눈을 접어 사르르 웃었다.

“좀 참아. 엘리베이터 안에선 좀 그렇잖아.”

“뭐가요?”

물었지만 백은후는 아무 말이 없이 웃기만 했다. 뭐가 저렇게 재밌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가장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내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백은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을 들은 백은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길드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혼자 또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서 있는 자리가 불편했다.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올 생각으로 몸을 돌리자 백은후가 왼쪽 어깨를 덥석 잡았다.

“기다려.”

무슨 강아지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성주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섰다. 그사이에 할 말이 끝났는지 비서가 밖으로 나갔다. 등에 가슴이 붙을 만큼 가까이 서 있던 백은후가 어깨를 놓으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곤 성주안의 몸을 아래위로 훑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좀 챙겨입을 걸 그랬나? 편한 게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입은 V넥 니트와 후드 점퍼가 신경 쓰였다. 아침에 공세윤이 멋있다고 하긴 했지만 걔 눈엔 누더기를 입어도 멋있어 보일 테니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으, 신경 쓰여. 너무 비교되잖아.

“뭐, 어디 공식적인 행사라도 갑니까?”

“그건 아니고.”

백은후가 한쪽 벽에 걸린 옷걸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침에 모준영이 주고 갔어. 아무래도 지난번 기자회견이 신경 쓰였는지 정복을 신청했다더군.”

옷걸이에서 정복을 꺼내든 백은후가 이리 오라는 듯 턱짓했다. 성주안은 그에게 다가가자마자 뺐듯이 옷걸이를 낚아챘다. 애도 아니고 그의 손에 옷이 입혀지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주안은 소파에 정복을 늘어놓고 백은후를 흘깃거렸다.

“뭐? 나가라고? 그건 안되지.”

아, 은신술.

“그럼 좀 돌아 있든가요.”

“남자끼리 내외하긴.”

백은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사이에 주안은 빠르게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재킷을 걸쳤다. 사이즈를 어떻게 알았는지 하얀색에 금테가 들어간 재킷은 맞춘 듯 몸에 꼭 맞았다.

책상 옆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보자 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잖아도 화려한 슈트를 멀끔하게 차려입은 백은후 옆에서 너무 추레한 것 같아 신경 쓰였는데 잘됐다.

“됐어요!”

뿌듯하게 말하자 몸을 돌린 백은후가 성주안의 아래위를 훑고는 픽 웃었다. 저와는 핏이 비교도 안 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백은후가 다가와 어깨선을 맞추더니 잘 매어놓은 넥타이를 풀었다. 타이의 길이를 맞춰 서로 교차시킨 후 고리에 넣어 매듭을 짓는 동안 슬쩍 목을 스치는 손가락 때문에 턱이 파르르 떨렸다. 티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 턱에 힘을 줬다.

백은후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고 코를 간지럽히는 향이 진해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을 때쯤 끈을 당겨 목을 조인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훨씬 보기 좋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고 잠깐 잊고 있었던 걸 물었다.

“아까 비서님 심각해 보이던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백은후가 말했다.

“심각한 건 아니고, 길드 내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여서.”

“수상한 움직임이요?”

“성좌들이 없는 코인을 긁어모아 헌터 몇 명을 매수했나 본데……. 그래 봐야 뭘 할 수 있겠어. 일단 내가 성좌 놈들과 계약할 생각이 없고, 네게 해코지를 할 수도 없을 텐데.”

안 그래? 그렇게 물으며 고개를 숙이는 표정이 지나치게 야했다. 상황을 알리자는 건지 매력을 어필하겠다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뭐, 또 모르죠. 우리 힘이 약해지면 백은후 씨가 먼저 배신할지도.”

자꾸 도발하는 게 얄미워서 일부러 모나게 대답했지만 백은후에게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는 듯했다.

“그래, 확실히 내 이미지가 조금 그렇긴 하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은후가 손을 들어 주안의 뺨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안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내가 배신하고 싶지 않게 잘해.”

“…….”

“지금은 네가 재밌거든?”

“재밌어서 있는 거 아니잖아요. 성좌들 실력이 성에 못 미쳐서 버퍼가 낫다고 판단한 거 아닙니까? 아니지, 사실은…….”

성주안이 판도라의 상자를 쉽게 열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백은후가 씁쓸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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