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사람을 홀리는 미소에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던 성주안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세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삭막한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세윤 씨,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이렇게까지 인터리어를 했어요?”
“형 마음에 들어요?”
주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테리어 자체가 멋지기도 했지만 공세윤이 시간과 품을 들여 집을 이렇게 꾸밀 정도로 삶에 애착이 생겼다는 것이 더 기뻤다.
주안이 엄지를 척 치켜들며 정말 최고라고 칭찬해 주자, 세윤이 주안의 손을 잡고 집 안 곳곳을 데리고 다녔다.
서재와 부엌 그리고 화장실까지 모두 비슷한 풍으로 꾸며져 있어서 그런가? 이국적인 느낌이 나서 마치 외국에 온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형이 그랬잖아요. 환경을 바꾸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거라고요. 그 말이 맞았어요.”
“그랬어요? 진짜 잘했네요.”
주안은 진심으로 말하며 세윤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제가 한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실행했을 뿐만 아니라, 해보니 좋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왜 그렇게나 힘들게 살아야 했을까?
왜긴 왜야. 캐릭터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서 그렇지.
눈을 휘며 웃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 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연스레 손이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머리를 맡기고 있던 세윤이 가운과 속옷을 챙기더니 다시 주안의 팔을 끌었다.
“씻으러 가게요?”
“네?”
공세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씻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같이 갈 건데요.”
“저랑요?”
“그럼 여기에 형 말고 누가 있어요. 같이 씻을 거예요.”
왜 그걸 당연하다고 여기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짜 한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욕실이 두 갠데 왜 같이 씻어요?”
“참 나, 형. 은신술 쓰는 헌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형을 지키는 게 제 의무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성주안은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공세윤의 눈을 바라봤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붉어져 있었다. 우울할 때 항상 축 늘어져 있던 눈꼬리는 날카롭게 올라가 있었고, 오늘따라 입술이 새빨개서 평소보다 더 야한 분위기를 풍겼다.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요? 아까 봤잖아요. 욕실 넓은 거.”
해맑게 말하는 세윤에게 같이 씻는 건 좀 그렇다고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괜히 말했다가 갑자기 우울함이 올 것 같아 두려워서였다. 성주안은 못 이기는 척 그의 뒤를 따랐다.
* * *
“형, 등 밀어줄까요?”
좋아, 여기까진 일단 성공했다.
공세윤은 입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능력을 써서 욕조의 물을 사람이 가장 기분이 좋아지는 온도로 맞추고 아로마 오일을 톡 떨어뜨렸더니, 처음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성주안이 제 손으로 옷을 벗었다. 그러곤 샤워기로 몸을 대충 씻은 다음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세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에 들어가 있는 성주안을 잠시 바라보았다. 뿌옇게 서린 김 때문에 선이 고운 몸이 더 야해 보였다.
요즘 전투를 자주 해서 그런지 처음 봤을 때보다 근육도 늘었고, 턱은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눈매엔 색기가 넘쳤는데, 웃을 땐 꼭 소년 같아서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괜찮아요. 세윤 씨도 들어와요. 따뜻하고 좋네!”
“그럼 근육 뭉친 거 풀어줄게요.”
또 괜찮다고 할까 봐 세윤은 냉큼 그의 몸을 돌려 어깨를 잡았다. 그러느라 가운에 물이 튀었지만 어차피 씻을 거니까 괜찮았다. 주안은 별 반항 없이 어깨를 내주었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피부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촉감에 손이 제멋대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한 번 만지고 났더니 마사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당장 저 어깨에 이를 박아넣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안 돼!
공세윤은 눈을 부릅뜨고 손에 힘을 줬다. 매일 밤 성주안을 생각하며 곰 인형의 어깨를 얼마나 주물렀는데 실전에서 망칠 순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성주안의 마음을 얻어서 다른 놈은 생각도 안 나게 해줘야 했다.
그동안 다른 놈들이 성주안에게 수작을 부리는 걸 꾹 참고 있었다고 해서 세윤이 진짜 괜찮은 건 아니었다. 활기찬 상태라고 해도 성주안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처음엔 별 관심도 보이지 않던 S급들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성주안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점점 불안해졌다.
진짜 모준영은 너무 의외였어. 안 그럴 것처럼 생겨서…….
모준영이 그 정도로 집착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생각해 보고 말 것도 없었다.
공세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쁜 상상을 했다.예를 들면 제 힘으로 다른 S급들을 모두 따돌리고 성주안과 함께 도망친다거나 하는 종류의 상상이었다. 만약 싸우는 중에 우울함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성주안 덕분에 우울한 상태에서도 디버프를 이길 수 있는 패시브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미움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 했다. 마음부터 얻어야 해. 나하고 도망가고 싶도록!
“형, 긴장하지 말고요. 어깨를 한 번 올렸다가 축 늘어뜨려 봐요. 기분 좋을 거예요.”
둥근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손끝으로 정수리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쓱 긁어내리자 귓바퀴가 붉어진 게 보였다.
반응이 있다! 너무 기뻐서 헉, 하는 신음이 새어 나올 뻔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어 참았다. 형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나는 담백하게.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손의 움직임에만 집중하자.
공세윤은 의지를 다지며 혈 자리를 누르는 척 귓불을 건드린 다음, 목과 어깨까지 이어지는 곳에 손을 대고 쭉 미끄러뜨렸다. 그럴 때마다 손에 착 감기는 근육의 느낌도 좋았지만, 더 좋은 것은 역시 제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주안의 반응이었다.
은근슬쩍 어깨를 타고 넘어가 손을 앞으로 내렸을 때였다. 주안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세윤 씨, 근육 풀어준다면서요.”
괜찮아, 자연스럽게.
“맞아요!”
“그런데 손이 왜 앞으로 오는 건데요?”
“그, 혈 자리가 쇄골 밑에도 있거든요.”
성주안은 잠시 공세윤을 보다가 그냥 고개를 돌렸다. 사실 공세윤이 근육을 풀어준다는 핑계로 몸 여기저기를 간지럽힐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하라고 할 수 없었다. 손을 벌벌 떨면서도 집중하려는 듯 꾹꾹 누르는 섬세한 손길이 좋기도 하고, 그의 친절을 거부했을 때 상처받을 마음이 걱정돼서였다. 지금까지 거절만 당해왔을 테니 해줄 수 있는 건, 해주자.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솔직히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공세윤의 손이 다시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어깨선을 따라 미끄러뜨리고 목 아래를 꾹꾹 누르다가 다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정성스러웠다.
그 손길이 몇 번 정도 반복됐을까. 정작 흑심을 품고 저를 만지는 공세윤의 손길은 담백한데 이것도 계속 당하다 보니 몸에 이상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런 건, 기분 좋은 온도와 향 때문일까? 아니면 남녀를 불문하고 혹하게 만드는 공세윤의 매력 때문일까?
진짜 미치겠네.
은근슬쩍 옆구리를 쓸고 가슴을 툭 건드리고 아닌 척 손을 떼는 통에 자꾸 몸이 움찔거렸다. 이러다 신음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아 주안은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아직 멀었어요?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은데…….”
척추를 따라 쓸어내리길 반복하던 공세윤이 손을 딱 멈췄다. 그만하라고 해도 계속할 줄 알았는데 바로 멈추다니. 좀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상쾌한 향이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공세윤이 샤워 퍼프에 보디샴푸를 쭉 짜서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설마 저걸 내 몸에 바르겠다고? 전신에?
손이 옆구리를 쓸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전신에 매끄러운 손길이 닿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만은 안 된다.
성주안은 몸을 돌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에서 퍼프를 뺏었다.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상처받을 것 같았기에 주안은 그의 손을 잡아 욕조 안으로 이끌었다. 세윤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면서도 순순히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거품 칠은 내가 해줄게요.”
“……으으.”
아직 몸에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세윤이 팔로 몸을 감싸며 부르르 떨었다. 부끄러워하기는…….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세윤의 몸을 돌려놓고 어깨부터 종아리까지 정성스레 거품을 칠했다.
세윤의 몸에 퍼프를 대고 미끄러뜨리는데 그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몸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하기엔 심하다 싶을 정도여서 주안은 거품 칠을 멈추고 세윤의 몸을 돌렸다.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다.
“가, 갑자기 왜?”
“형…….”
말을 걸자 세윤이 더욱 서럽게 울며 와락 안겨들었다. 성적인 뉘앙스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포옹이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모양새가 조금 이상했지만, 마치 버려진 강아지가 착한 사람을 발견하고 뛰어와 안기는 듯한 느낌에 세윤을 순순히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주안은 미끈거리는 거품이 가득 칠해진 세윤의 등을 차분히 쓸어내렸다. 뭐 때문에 우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가 지금 얼마나 서러워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참 안겨 울던 세윤이 고개를 들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형, 있잖아요. 나는…….”
주안은 숨 쉬는 것도 잊고 세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