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화르륵.
주지찬이 불을 피웠다.
아무리 S급이라고 하더라도 영하인 기온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겉옷이라도 입고 있지, 백은후는 재킷을 성주안에게 덮어준 후라 더 추울 것이다.
일부러 제 주변에서 불을 피운 주지찬을 보며 백은후가 씩 웃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전뢰계라 기본 체온이 높다.”
“너 입술 파란 거 다 보이니까 잘난 척 그만하시지?”
그 말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있던 공세윤이 어깨를 흔들며 킥킥 웃었다.
다들 이럴 때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누구 하나 심각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모두 속으로는 나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불길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준영이 생명의 물약을 꺼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갑자기 그건 왜 꺼내 마시지?”
“그냥 목이 말랐을 뿐입니다. 물약을 마시면 갈증도 해소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에너지도 올라가니까 미리 마셔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주지찬이 고개를 끄덕했다.
“좋은 생각이야. 다들 많이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네.”
그 말에 또 모두가 웃자 공세윤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주안이 형이 먼저 나갈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추워했겠어요. 저는 주안이 형만 괜찮으면 괜찮거든요.”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준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모준영이 스피커폰으로 돌리자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스피커에서 성주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괜찮아요?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에 모두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다행이네요. 저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뭐? 방법을 찾았다고? 네가 어떻게?”
주지찬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사람을 무시하고 그럽니까? 나가서 방법을 찾으라고 해 놓고. 나 믿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주지찬은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백은후는 킬킬 웃기만 했고 공세윤은 핸드폰이 성주안이라도 되는 듯 몸을 바짝 붙였다. 모준영이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맞습니다. 성주안 버퍼의 실력을 믿고 내보낸 겁니다. 그래서 방법은요?”
―다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제가 휘청거렸던 걸 봤을 겁니다. 그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던전 입구 근처를 살펴보니 지반이 다른 게 느껴졌어요. 아무리 성좌들이라 해도 있던 던전을 없앨 수 없으니 어설프게 막아둔 것 같아요.
웃기만 하던 백은후가 바로 끼어들었다.
“막았다고? 지반이 약하다는 거면 지하에 숨겼다는 뜻인가?”
―맞습니다. 그걸 티 내지 않으려고 물을 채운 거죠. 그러니까 주지찬 씨가 주작의 후계자 스킬로 물을 증발시키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반드시 지하로 가는 입구가 나올 겁니다.
“그 후엔?”
―그 후엔 식은 죽 먹는 거보다 쉬울 거예요. 스테이지 1 던전이 지하에 있을 테니까 간단히 공략 끝내고 나오면 됩니다. 뭐, 좀 다치셔도 치유 스킬 쓰는 버퍼가 대기하고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와……. 형 진짜 대단해요. 똑똑하고 멋있고 형이 최고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주지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들 무사히 나오세요. 그런 다음 우리도 전략 세워서 성좌들한테 복수합시다. 그리고…….
성주안이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다들 무사히 있어주셔서.
툭, 전화가 끊겼다.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보고 있던 네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장 신이 난 건 성주안에게 특수 지령을 받은 주지찬이었다.
주지찬은 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안 그래도 일을 이렇게 만든 성좌들을 향해 분노가 들끓던 차였다.
순식간에 주지찬의 몸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였다. 치솟는 불기둥과 함께 몸이 치솟은 주지찬의 어깨에 불 날개가 돋기 시작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주지찬을 향해 공세윤이 소리쳤다.
“얼음을 녹이는 건 내가 할 테니 넌 그냥 증발이나 시켜.”
“좋아.”
“얼음을 쪼개는 건 내가 해주지!”
착, 차르륵!
백은후가 채찍을 꺼내 휘두르자 불꽃이 튀고 얼음이 갈라졌다. 그때, 공중에 뜬 공세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산산이 조각난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 물이 되었다. 그러나 주작의 후계자를 쓰는 주지찬 때문에 물은 흐를 새도 없이 모두 날아갔다.
천둥·번개가 치고, 물보라가 일고, 불꽃이 일렁였다.
성주안에게 포털스톤을 먹일 때처럼 완벽한 협공에 물과 얼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다시금 물이 생겨나며 얼어갔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준영은 입구를 찾기 위해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뒤따르며 던전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그들이 던전의 가장 안쪽에 도착했을 때, 네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저기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 것이다.
함성 스킬을 쓸 모준영이 가장 앞장서고 그 뒤를 나머지 세 사람이 따랐다. 가장 아래층까지 내려가니 보이는 광경이 기가 막혔다.
“아무리 스테이지 1이라도 그렇지.”
“그러게요. 이건 너무 이상하네요.”
“뭐 할 것도 없잖아.”
“바보들.”
스테이지 1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황에 모두 한마디씩 입을 뗐다. 아무래도 위에서 일어나는 S급의 스킬로 인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한 모양이었다.
얼음을 녹여 입구를 찾는 것으로 허무하게 공략이 끝나버린 탓에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모준영이 그들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아직 보스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백은후가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것은 멧돼지의 몸에 새의 머리를 가진 잔챙이들뿐 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세윤이 그들이 있는 반대쪽 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문이 있는데?”
무언가 기운을 감지한 모준영이 모두를 물러나게 한 후에 단숨에 문을 깨부수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용이 몸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보였다.
스테이지 1에, 보스가 용이라고? 말도 안 된다. 그들은 순간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귀찮은 듯한 자태로 앉아서 고개만 슥 돌린 용을 보니, 부수고 들어간 쪽이 민망할 정도였다.
“이건 또 뭐야?”
주지찬의 물음에 용이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왔군.”
“……뭐,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주지찬이 기겁하자 모준영이 나섰다.
“사람 말을 하는 몬스터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실제로 본 건 저도 처음이에요.”
신기한 듯 용을 쳐다보는 모준영과는 다르게 백은후의 눈은 잔뜩 가늘어져 있었다. 용의 크기나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로는 절대 낮은 등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공격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공격이라도 한다면 누구 하나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얼굴만큼 커다란 용의 눈동자가 백은후를 향했다.
“걱정하지 마시게. 애들과 싸울 만큼 심심하지는 않으니.”
용의 주변을 감싸는 상서로운 빛 때문일까? 용의 자태가 한 만 년은 거뜬히 산 신화 속 동물처럼 느껴졌다. 백은후가 자세를 똑바로 한 뒤 공손한 말투로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스테이지 1의 보스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만…….”
“확실히 내가 몬스터는 아니지.”
그렇게 말한 용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주변이 흔들릴 정도였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방 중앙 단상에 자리를 잡은 용은 앞에 선 네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사람 하나쯤은 거뜬히 삼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입 크기에 놀란 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툭, 입에서 떨어진 붉은 구슬이 네 사람 앞에 또르르 굴러왔다. 모두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주지찬이 구슬을 주웠다.
그 모습을 보고 용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불의 기운이 강한 것이니 자네가 가지는 것이 맞을 거야. 내가 벌인 일이지만 귀찮아서 말이지. 안 그랬던 인간들이 성좌가 되자마자 바벨탑을 세워 하늘에 도전할 줄은 몰랐어.”
아무래도 성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용의 존재는 성좌를 만든 인물이란 말인가? 백은후의 푸른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스테이지 1 공략은 끝났네. 나를 죽여야 끝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날 세울 것 없네.”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파티원들은 그 말에 안심하며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분위기를 느꼈는지 용이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좌들을 저대로 놔두고 싶진 않지만 귀찮아서 말이지.”
백은후가 지금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존재를 성좌들도 압니까?”
“아마 모를 걸세. 나의 존재를 아는 것은 너희가 유일하다.”
“지금 우리를 부른 이유는 성좌들 때문이고요?”
용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능해 보이는 존재, 어쩌면 그는 던전 브레이크 이후의 혼란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던져진 존재가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위에서 걱정하고 있을 때 미리 모습을 나타내지.
백은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용이 쯧쯧 혀를 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원래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네. 모든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일 뿐. 괜히 오지랖을 부리는 바람에 자네들이 각성하고 성좌라는 것도 생기지 않았나.”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모준영이 끼어들었다.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인류는 멸망했겠지요.”
용이 끌끌 웃었다.
“인류가 멸망하면 또 다른 존재로 채워질 것을…….”
결국 참지 못하고 도와준 주제에 말이 많았다. 다들 생각이 비슷했는지 주지찬은 분노를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듯 구슬을 강하게 움켜쥐었고, 공세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성주안 생각이나 했고, 모준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용을 보고 있었다.
백은후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더는 힌트를 주기 싫으시다는 의미군요. 그렇다면 저 구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