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시, 싫어요! 안 나간다고요.”
이렇게 혼자 나갈 순 없었다. 나간다고 해도 성좌들과 접속할 수도 없는 자신이 이들을 구할 정보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자신이 나간 사이 여기 있는 파티원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혼자만 빠져나간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들을 말려야 했다. 하지만 이 미친놈들은 죽어도 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형,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말 들으세요. 왜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그래요.”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말 들으라고 했다!”
주지찬과 공세윤의 협공에 제압당한 성주안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백은후를 노려보았다.
“그, 그럼 스킬이라도 쓰게 해주세요.”
“지금 우리 전부 너와 붙어 있잖아. 자동으로 됐겠지.”
스킬을 쓰는 틈에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눈치 빠른 백은후에게 들킨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도 스킬은 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몬스터가 없어도 포옹 스킬을 쓰면 방어막이 생겨 더 안전할 텐데…….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주안의 어깨를 백은후가 꽉 눌렀다. 그 사이 주지찬이 코를 잡아 입을 벌리게 했고 벌어진 입안으로 모준영이 포털스톤을 넣어 코와 입을 동시에 막았다.
“웁, 우욱!”
헛동작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플레이에 성주안은 억지로 포털스톤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입에 들어온 포털스톤은 혀에 닿자마자 물처럼 녹아내려 금세 몸에 흡수되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났다.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백은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스르륵 눈이 감겼다.
* * *
눈을 떴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천장이 보였다.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시간 의식을 잃었던 모양이다.
성주안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습니까?”
그렇게 물어 본 사람은 거주 시설에 처음 왔을 때 봤던 이민재였다. 방 안엔 그 말고도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이민재 옆에 있는 사람은 백은후와 비슷한 옷을 입은 거로 보아 한백 길드 사람인 것 같았고, 그들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거만한 얼굴로 앉아 있는 걸로 보아 꽤 높은 직책의 사람인 것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심각했다. S급들이 모두 던전 안에 갇힌 것도 모자라, 성주안 혼자 빠져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미칠 것 같은 사람은 성주안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나마 안면이 있는 이민재가 대답했다.
“모준영 씨가 센터에 전화해서 긴급구조 요청을 했고, 병원으로 옮기려다가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어디에 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성주안이 기막힌 표정을 짓자 뜻을 다르게 이해한 이민재가 말을 덧붙였다.
“S급들이 모두 던전에 갇혔다는 소식이 민간에 퍼지면 국민이 동요하는 것은 물론, 이 기회만 노리던 아나키스트들이 소동을 벌일까 봐요. 역시 병원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을까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센터장님이 구조요청을 했다면 어떻게든 그들을 구해야지 왜 다 여기 계신 겁니까?”
성주안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자 가장 뒤쪽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각성자 출신의 정치인인 것 같았다.
“모준영 센터장이 구조요청을 한 건 자네야.”
“그럼 갇힌 사람들은 어떡하고요?”
“센터장이 그러더군. 자기들은 알아서 나갈 테니 버퍼만 잘 구하라고.”
알아서 나오겠다고? 아니, 대체 무슨 수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덜 깼는지 생각이 엉망으로 꼬여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 저만 구하라고 한 파티원들도, 위급한 상황임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래선 안 되지. 내 새끼들 목숨이 달렸는데!
성주안은 이 한심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침대에서 일어서 거실로 나와버렸다.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 뒤에서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바로 그중 가장 이성적인 백은후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다음은 공세윤, 주지찬에게 차례로 연결해 봤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들려왔다. 초조한 마음에 손이 떨려서 액정을 누르는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졌다.
심호흡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랜 후에 마지막으로 모준영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네, 성주안 씨, 깼습니까?
연결되었다는 안도감에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를 듣자 괜히 울컥했다. 성주안은 울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침착하게 말했다.
“왜 다들 전화기를 꺼둔 겁니까?”
―여기에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니 배터리를 아끼는 겁니다. 우선 제가 켜놓고 차례로 켤 예정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동시에 다 꺼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연결이 안 될 테니.
“춥지는 않아요? 아니, 그보다 배가 고프거나 어디 아픈 곳은요?”
스피커폰으로 해놨는지 파티원들이 동시에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그런 걸 걱정하느냐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지금이 웃을 땝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형, 지금 어디예요?
공세윤의 목소리였다.
“저는 지금 집이죠.”
―그럼 푹 쉬세요.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요.
걱정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얘들은 뭘 믿고 이렇게 여유로운 걸까?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핸드폰만 들고 있겠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일단 네 사람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전화를 끊었다.
분명히 해결의 열쇠는 개발자인 제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이 세계에 와서 황당한 일을 많이 겪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스템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니까.
성주안은 혼자 방법을 찾기 위해 우선 제 방에서 쓸데없는 의견을 주고받는 사람들부터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치료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도 무시하고 방 안에 틀어박혔다.
물도 마시지 않고 밥도 먹지 않은 채, 현실 세계에서 갑자기 생긴 시스템 오류를 수정하는 개발자의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튜토리얼이라고 생각했지만 튜토리얼이 아니었으니 이건 분명 던전 시스템에 생긴 오류였다. 물론 이 세계에선 성좌들이 힘을 사용해 옮겨놓은 거겠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성주안이 방법을 찾으려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수밖엔 없었다.
“오류 수정이라…….”
성주안은 바로 컴퓨터를 켜고 기억나는 대로 던전과 관련된 수식을 적어나갔다. 적은 지 얼마 안 되어 화면 가득 수식이 들어찼다. 바로 어제 본 듯 프로그램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수식을 다 완성하고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화면을 보며 성주안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저기 갇힌 이들은 제가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고.
수식 따위에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란 말이다.
“하아…….”
하면 할수록 해답이 보이기는커녕 절망적인 상황만 반복되었다.
“결국, 성좌들과 계약을 하라고 하는 수밖엔 없나?”
이렇게 포기하자고?
성주안은 제 머리를 거칠게 흩뜨렸다. 저 하나 살리자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얼음 던전 안에 갇힌 사람들을 성좌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희생시키기 싫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좌들 도움 없이 그들을 던전에서 구해와야 했다. 성주안은 주먹을 꽉 쥐고 책상을 한 번 내려친 다음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해결의 열쇠는 언제나 현장에 있는 법,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다.
* * *
던전 주위엔 기다란 폴리스 줄이 처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센터 소속 A급 공무원들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성주안이 안으로 들어가자, 신분을 밝히기도 전에 얼굴을 알아본 공무원들이 길을 터주었다.
던전과 조금 떨어진 곳이 부산한 반면, 던전 바로 앞은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S급들을 모두 가둘 정도로 센 기운이 나오는 던전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성주안은 아무도 없는 던전 앞을 홀로 서성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 안에 있는 물을 전부 얼렸으니 던전의 상태가 달라졌나 싶어 문에 손을 대고 정보를 확인해 보는 것부터 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다른 곳을 살피려고 돌아 나오려는데 문득 여기 처음 왔던 때가 떠올랐다.
발밑이 쑥 꺼지는 기분.
현기증이 난 것도 아니었고 힘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는 것은…….
설마…… 이게 색다른 요소인 건가? 힌트……?
던전 바로 앞에서 발을 쿵쿵 굴러보고 조금 물러나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 보았다.
“다, 다르다!”
발에 닿는 땅의 느낌이 완전 달랐다. 던전과 멀리 떨어진 곳은 딱딱하지만 바로 앞은 마치 텅 빈 벽을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주안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성좌들이라고 하더라도 던전을 통째로 없애는 것은 불가할 것이다.
저번 게릴라 던전 때도 원래 있던 던전을 옮겼을 뿐이지 통째로 없애진 못했다. 지금 이 던전은 몬스터를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는 이상한 던전이고, 튜토리얼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던전은……!
스테이지 1 던전이 맞는 것이다.
힘이 부족한 성좌들이 던전을 없애거나 막은 것이 아니라, 어설프게 지하로 숨긴 거다. 그렇다면 던전 안에서 핸드폰이 연결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진짜 던전이라면 연결이 안 되어야 정상인데 임시로 만든 가상 던전이었으니 전파가 통한 거였다. 그걸 인제야 깨닫다니. 무능한 성좌들이 머리를 썼을 리가 없는데…….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아무것도 결정 나지 않은 상황에서 저 하나 살리자고 기꺼이 갇히길 원했던 사람들을.
이들에게 스테이지 1은 물 마시는 것보다 쉬운 일일 테니 지하로 가는 입구만 찾으면 된다.
성주안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모준영에게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