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일반 신발을 신고 빙판길을 걸어 발이 꽁꽁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백은후가 덮어 준 재킷이 아니었다면 온몸이 꽁꽁 얼었겠지. 파티원들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모준영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계속 걷는데 발끝에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 동상에 걸려서 발을 잘라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끔찍한 생각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모준영이 허리를 굽혔다. 넓고 단단한 등이 주안의 무릎 앞에 있었다.
“……갑자기 왜요?”
“업히세요. 아까부터 걸음걸이가 이상했습니다. 맨발은 아니지만 털신을 신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다 알고 있었구나.
성주안은 더 거부하지 않고 모준영의 등을 빌렸다. 이동할 때마다 옆구리나 어깨나 등에 매달려갔으니까 별로 어색하지도 않았다.
모준영은 주안을 업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 던전을 채운 것은 어둠 속에 새어 들어오는 약간의 빛과 지독한 한기, 그리고 물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습기뿐이었다. 얼어 있는 빙판 위에 습기가 가득하니 모준영에게 업힌 상태에서도 체온이 내려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지찬 씨, 저 불 좀 피워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될 거야 없지.”
주지찬이 곧장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난로를 튼 것처럼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모준영의 등에 기댄 채 주지찬이 주는 온기를 느끼며 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제일 앞에 가던 백은후가 걸음을 멈추고 팔을 길게 뻗었다. 모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예감이 안 좋아.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꽤 길게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나?”
모두 말이 없었다. 다들 내심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성주안도 입을 다물었다. 튜토리얼 던전이라는 것을 가정해도 이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이상했다. 스테이지 번호가 없어서 당연히 튜토리얼 던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세계에서 겪은 변수가 많았던 만큼 쉽게 단정 지어버려서는 안 되었다. 제가 경솔했다.
아무래도 여긴 튜토리얼이 아닌 것 같다.
그럼 대체 뭐지?
“게다가 던전이 이렇게 일자로 쭉 이어지는 것도 이상하잖아. 공세윤이 아무리 강한 데다 키스 버프까지 받았다 하더라도 이만큼 넓은 공간을 한 번에 다 얼렸다고? 말이 돼?”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상황판단을 끝낸 주지찬이 갑자기 불을 일으켜 빙판을 녹였다. 다섯 사람이 앉고도 남을 공간이 만들어졌다. 모두 약속한 것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준영에게 업혀 있던 성주안도 등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으려 했다. 그 순간 네 사람이 손이 동시에 주안의 몸 곳곳에 달라붙었다. 어깨, 허리, 팔, 다리를 동시에 붙잡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다들 뭐예요?”
“얼었던 땅이라 차가워. 맨바닥에 앉히긴 좀 그렇잖아? 위험 상황일수록 버퍼를 잘 챙겨야 하는 법이지.”
백은후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치유 스킬까지 각성한 버퍼를 잘 챙겨야 하는 건 맞지만 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충분히 성좌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계약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서 숨을 들이마시자 이번엔 공세윤이 말했다.
“진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엔 너희가 양보해. 매번 나만 양보했잖아.”
대체 뭘 양보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세윤의 말에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손들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파티원들의 손이 다 떨어지자마자 공세윤이 잽싸게 주안의 허리를 휘감고 제 무릎에 앉혔다.
이러려고 다들 제 몸에 손을 댔구나.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애 무릎에 앉는 게 모양 빠지긴 했으나 발이 꽁꽁 언 상태에서 엉덩이까지 얼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공세윤은 저를 무릎에 앉히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주안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고는 어깨에 턱을 댔다. 입술이 귓불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귀에 닿는 뜨거운 숨이 간지러워서 손을 올려 귓불을 긁는 중에 백은후가 말했다.
“우리 아무래도 얼음동굴에 갇힌 거 같은데?”
누가 들으면 오늘 날씨 좋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그래서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사실 여기에 갇혔다고 하더라도 무서울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성주안에게 개발자 나름의 확신이 있어서였다. 어차피 시스템상 모든 던전은 공략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 안에 공략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튕겨 나간다.
이들은 S급 헌터로서 솔플 던전 시에도 항상 넉넉하게 공략하고 나왔을 테니 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잊어버렸을 거다. 자기들과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시간 지나면 알아서 열릴 겁니다. 어차피 모든 던전은 주기가 정해져 있을 테니까요. 공략할 것도 없으니까 그냥 열리면 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성주안의 안일한 말에 주지찬이 피식했다.
“성좌만큼 멍청한 놈이 여기 또 있었네.”
“뭐요? 갑자기 왜 시빈데요.”
“야, 성주안. 성좌랑 싸우려면 걔들 머리 위에서 놀아야지. 걔들 손에 놀아나면 어쩌냐? 이거 보면 볼수록 더 하네?”
그런 멍청이 입술에 키스 못 해서 안달 낸 건 어디에 사는 누구시더라? 진짜 웃기고 있네.
톡 쏘아주고 싶었지만 괜한 말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자, 목을 쪽쪽 빨고 있던 공세윤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형, 성좌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게 쉽게 탈출하게 두진 않았을 거예요. 이번에도 봐요. 제가 던전 안 호수를 얼릴 줄 알고 일부러 물 채워둔 거. 이번엔 성좌들이 머리 좀 썼어요. 그냥은 열리지 않을 거 같아요.”
공세윤까지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튜토리얼이라 난이도가 높아 공략할 수 없을 줄로만 알았지, 몬스터가 아예 없어서 공략이 불가할 줄은 정말 생각조차 못 했다.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들어왔어야 했는데. 후회되었으나 일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모준영이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공략도 불가하고 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는다면…….”
혼잣말이라도 헛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 모두가 모준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괜찮겠지만 성주안 씨는 견디기 힘들 겁니다. 여기 기온도 낮은데다 발에 동상도 걸린 것 같으니.”
지금은 공세윤이 꽉 끌어안고 있어서 추운 줄 모르고 있지만 계속 이대로 있으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백은후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여기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말을 하려면 해결 방법을 내놓든지.”
모준영이 백은후를 노려본 뒤 성주안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각성자들을 관리하다 보면 부득이하게 언제 어디에 갇힐지 몰라 포털스톤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헉, 포털스톤이라니…….
포털스톤은 난이도 높은 스테이지에서도 얻을까 말까 한 레어템이었다. 그걸 가지고 있다면 여기서 탈출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자 모준영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워낙 귀한 아이템이라 제게도 하나밖에 없다는 겁니다.”
파티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성주안을 바라보았다. 포털스톤이 하나라면 네가 나가는 게 맞지 않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성주안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이 던전엔 몬스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좌들이 무슨 수를 어떻게 쓸 줄 알고 이들만 두고 나간단 말인가. 죽으라고 두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성좌들의 입으로 던져 넣든가.
성주안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던 백은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거 아니야.”
“네?”
“너, 나가라고. 우리는 여기에 오래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너라도 나가야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오겠지.”
공세윤이 말을 이었다.
“맞아요. 형. 형이 나가서 우리 구할 방법을 찾아와요.”
“아니,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여기 던전 안인데 나가서 방법을 찾는다고 한들 제가 무슨 수로 연락을 합니까? 여기 핸드폰이 되는 것도 아닌데…….”
성주안의 말에 주지찬이 보란 듯 핸드폰으로 버튼을 누르니까, 잠시 후 주안의 핸드폰이 울렸다. ……던전에서도 핸드폰이 터지는구나. 통신망이 되게 좋네.
“알겠으니까 일단 핸드폰 끄세요. 그리고 핸드폰이 된다면 제가 나가지 않고도 전화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잖아요?”
주지찬이 눈을 치켜떴다.
“성주안, 우리나라 S급들은 다 여기에 있는데 누가 누굴 돕는다는 거야?”
생각하고 보니 그랬다. 자꾸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니까 당황스러워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게 문제였다.
“하, 잔말 말고 나가서 우리 빼낼 방법이나 연구해.”
백은후는 그렇게 말하며 시무룩해진 성주안을 보다가 나머지 파티원들과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사실 나가서 방법을 찾아오라는 것은 구실일 뿐 모두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이 음산한 얼음 던전에서 성주안을 내 보내는 것.
잘 따라줄진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는 수밖에.
백은후가 모준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하자, 단번에 의미를 알아챈 모준영이 인벤토리에서 포털스톤을 꺼냈다. 눈치 빠른 공세윤은 성주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사지를 단단히 결박 중이었다. 어차피 꼭 안고 있었으니 동작의 어색함은 없었다.
백은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성주안이 공세윤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