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모준영이 말을 막았다.
“A급 헌터가 뭐라고요. 그런 도움 없이도 성좌들 따위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항상 이성적이었던 모준영이 왜 이렇게나 감정적으로 구는 걸까? 성주안은 모준영이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하느라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막 아무한테나 좋다고 웃어주지 마십시오.”
“웃어요? 내가 언제요? 미쳤습니까?”
톡 쏘아주자 모준영이 쯧쯧 혀를 차며 운전대를 잡았다. 굳은 얼굴로 운전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파티원 중에 가장 제정신인 데다 말도 잘 통했던 모준영마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니까 갑자기 외로워졌다.
미쳐 날뛰는 성좌들과 곳곳에 도사린 위협 속에서 주안은 저도 모르게 모준영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준영은 금강불괴라는 별명답게 덩치도 크고 속도 깊어서 든든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도 결국 개발자를 향한 본능적인 이끌림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것은 제 탓인지도 몰랐다.
성좌가 중심이었던 게임.
그 게임 속에서 화신들은 그저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화신의 관점에서 그들에게 던전 공략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던전 공략이 절실한 쪽은 성좌와 이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목적을 가진 성주안뿐이었다.
실제 세계인 이곳에서 던전 공략을 해 봐야 화신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성좌가 되는 것일 뿐이니 당연히 달갑지 않겠지.
그나마 애들이 착해서 성좌들에게 복수하고 멸망을 막아보자는 주안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지 각성자들의 성격이 성좌와 비슷했으면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생각을 이어가는 중에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각성자들을 이용하는 것은 성좌나 저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였다.
성주안은 괜히 미안해져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준영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운전 중이었다.
“저기, 모준영 씨.”
“왜요?”
“제가 쑥스러워서 표현을 잘 못 합니다.”
“허.”
모준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아까 서정우 헌터 앞에선 잘만 표현하던데 무슨 말입니까?”
“아니, 그런 것도 못 하면 사회성 없는 거죠. 저는 소시오패스는 아니라서요.”
“그래서요?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성주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고맙다고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던전을 공략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이득도 없을 텐데…….”
마침 신호에 걸려 모준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잔뜩 굳어 있던 입매가 느슨히 풀려 있었다.
“저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다는 거 압니다.”
신호가 바뀌어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기분은 풀린 것 같았다. 차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성주안은 차 안의 분위기가 쑥스럽기도 하고 침묵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슬쩍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주치찬 씨가 우리 옆집으로 이사 왔답니다.”
“아까 통화내용 들었어요. 참, 유별나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준영 씨는 원래 살던 곳에서 사세요.”
모준영의 턱이 굳어졌다. 왜 그러지? 이사 오지 말라고 해서 삐졌나? 얼마 안 가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전 이사 갈 필요 없습니다. 시간 절약을 위해 원래 거기에 살고 있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럼 결벽증이 있는 백은후 빼곤 전부 한 건물에서 살게 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제가 왜 직접 데려다주겠습니까? 주지찬 씨에게 오라고 했겠죠.”
“그도 그렇네요.”
대충 대꾸해 주고 고개를 돌렸다. 차는 어느새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솜씨 좋게 주차를 마친 모준영이 벨트를 풀자마자 누군가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왜 이렇게 늦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잔뜩 화가 난 주지찬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공세윤도 와 있었다. 이상하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두 분, 저 기다린 겁니까?”
“아니면 내가 왜 여기에 있겠어.”
“맞아요. 형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전화는 왜 끊어버렸어요!”
전화가 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화난 모준영을 달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럴 땐 얼른 말을 돌리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두 분, 좀 친해지신 모양이네요. 함께 기다리는 걸 보니.”
그 말에 주지찬은 얼굴을 왈칵 구겼고, 공세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친해진 게 아니라! 주지찬이 저 억지로 봉사활동 데려갔어요.”
“누가 억지로 데려가? 네 발로 왔잖아.”
이건 좀 의외였다. 주지찬이 공세윤을 봉사활동에 데려간 것이라면 몰라도 공세윤이 제 발로 갔다고? 아무리 활기찬 상태라도 이상하다 싶었다.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그럼 왜 갔어요?”
성주안이 묻자 공세윤이 뺨을 빨갛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주지찬이 봉사활동 가면 한 시간 일찍 형을 양보해 준다고 해서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어차피 이틀이나 같이 있는데 한 시간 더 보려고 봉사활동까지 했다니. 의도가 불순하긴 했으나 기특하기도 해서 웃었더니 주지찬이 어이없는 소릴 해댔다.
“뭐가 좋다고 자꾸 웃어? 그렇다고 네가 귀여운 줄 아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 주지찬은 웃는 주안의 얼굴에서 눈조차 떼지 못했다. 이제 그런 말에 속아주기에는 주지찬에 대해 너무 잘 알았기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말과 행동이 다른 주지찬이 귀여워 놀려주려고 윙크를 해줬더니 그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던 모준영이 혀를 끌끌 차며 거주 시설 안으로 들어가자, 눈치를 보던 공세윤도 나중에 문자에 답장하라는 말을 하곤 모준영의 뒤를 따랐다.
“우리도 가죠?”
주지찬의 팔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꼼짝도 안 했다.
“너 밥은?”
“모준영 씨와 먹고 왔습니다.”
그 말에 주지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울적해졌다.
“왜요? 식사 전이에요? 그럼 드세요. 옆에 있어 드리겠습니다.”
“됐어.”
괜히 성질을 낸 주지찬이 발을 쿵쿵거리며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딱 공세윤 반만이라도 싹싹하면 얼마나 좋을까?
성주안은 주지찬과 공세윤이 게임 속 화신 카드라면 두 개를 적절하게 섞어서 SS급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뒤늦게 식곤증이 오는지 얼른 안으로 들어가 자고 싶었다.
* * *
주지찬이 성주안의 집이 아닌 제집 쪽으로 팔을 끌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친 공간이 드러났다. 이사를 하며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썼는지 주안의 집과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화이트 톤에 원목으로 장식된 거실엔 각종 빈티지 소품들이 놓여 있어 편집샵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헉, 이렇게 인테리어까지 해 놓을 정도면 하루 이틀 만에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성주안은 아무래도 오늘의 이사가 충동적인 게 아니라 계획된 일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지찬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왜?”
성주안은 이사 오려고 미리 계획했냐고 묻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왜 여기로 와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주지찬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집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을 게 뻔한데 거기 가서 굶어 죽을 일 있어?”
어제 모준영과 먹고 남은 것도 있고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 장을 봐놨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주지찬의 냉장고에 맛있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거실에 멀뚱멀뚱 서 있으니 주지찬이 옆을 휙 지나 부엌으로 가며 괜히 툴툴거렸다.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나 밥 먹었는데요?”
물었지만 주지찬은 대답도 하지 않고 부엌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저녁을 미리 하려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피규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진열장을 눈으로 훑으며 주안은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지금까지 공략을 끝낸 던전은 3번과 5번 스테이지다. 성좌들이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1번부터 차근차근 공략해서 10번까지 완성하면 되는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벤트 던전을 미리 처리했으니 지금 전력으로 7번까지 클리어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8번 9번 10번 스테이지였다.
8번 스테이지부터는 3차 업데이트 때 풀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성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클리어할 수 있을까? 아직 1번도 클리어하기 전인데 벌써 머리가 아팠다.
* * *
성주안을 소파에 앉혀놓고 거품기로 열심히 생크림을 만들던 주지찬은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멈췄다.
주지찬에게 요리는 끓어 넘치는 욕망을 해소하고 다스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레시피를 준수한 정확한 양으로 재료를 계량하고, 수양하듯 요리하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졌으니까.
하지만 성주안 옆에선 그것조차 힘들었다.
제멋대로인 버퍼 뭐가 좋다고 자꾸만 아래가 동하는지.
처음 몇 번 신체에 이상한 증상을 겪었을 땐 그게 그저 각성 부작용인 줄 알았지만, 그와 부딪힐 때마다 같은 증상이 반복되는 것을 느끼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각성 부작용이 아니라 성주안을 향한 발정이라는 것을.
도대체 왜.
목소리가 좋아서? 얼굴이 예뻐서? 하는 짓이 귀여워서? 당장 떠오르는 이유만 해도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일 약한 버퍼 주제에 몇 배나 강한 각성자들을 걱정하고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지난 던전에선 제가 죽을 거 같으면 너희라도 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대체 저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기에 기어이 희생을 감당하려는 걸까?
그 생각을 하니 온몸에 불편해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끓어오르는 힘을 달랠 길이 없어 주지찬은 거품기를 들고 빠르게 휘저었다. 스텐 그릇에 구멍이 뚫릴 만큼 힘차고 빠르게 젓다 보니 어느새 새하얀 생크림이 만들어졌다.
띵!
마침 미리 넣어둔 빵도 다 되었음을 알렸다. 오븐에서 빵을 꺼내 정성스레 생크림을 얹었다. 성주안이 빵을 입에 물면 자연스레 크림이 입술에 묻을 것이다.
시발. 또……!
주지찬은 열이 몰리는 자신의 몸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집중하자, 집중. 도 닦는 마음으로.
주지찬은 과도를 꺼내 들고 씻어 놓은 딸기 꼭지를 하나씩 따서 조심스레 빵 위에 올렸다. 힘을 주면 딸기가 뭉그러질 테니 섬세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열기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완성된 빵을 예쁜 접시에 담아 거실로 나갔다. 성주안이 소파에 몸을 길게 뻗고 자고 있었다. 참 어이가 없었다. 누군 들끓는 열기를 잠재우느라 죽어나는데, 누구는 편하게 잠이나 자고.
“겁도 없이, 예쁘게도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