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참 잘 먹는다.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스테이크를 먹은 뒤 소스까지 박박 긁어먹고 물을 마시는 중에 모준영 앞에 수북이 쌓인 접시가 보였다. 주지찬은 각성한 이후에 식욕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모준영은 아닌가? 아무튼 잘 먹으니까 보기가 좋았다.
먹을 게 없어서 빤히 본다고 생각했는지 모준영이 입 안에 든 고기를 씹어 삼키고 난 후에 물었다.
“더 시켰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아니, 배불러요.”
“생각보다 위가 작군요.”
말을 끝낸 모준영이 다시 커다란 고기 조각을 입속으로 집어삼켰다. 한 번에 먹는 양도 많고 속도가 빠른데도 불구하고 입가에 소스 하나 묻히지 않았다. 그렇게 두 접시를 더 비운 모준영이 돌연 얼굴을 굳혔다.
“성주안 씨,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저기 입구에서 세 번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수상합니다.”
그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 하자 모준영이 손을 덥석 잡았다.
“고개 돌리지 말고요. 관심 없는 척하세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주안은 모준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목소리를 낮췄다.
“왜 수상하다는 겁니까?”
“각성자 관리센터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오더군요. 지금은 제가 있으니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나키스트와 외국 헌터에 대해 듣긴 했으나 막상 코앞에 위험이 닥치자 덜컥 겁이 났다. 성주안은 제 손등을 덮고 있는 크고 단단한 손을 보며 마음을 쓸어내렸다. 모준영이 같이 있으니 구해주겠지.
“갑시다. 아까부터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데 주지찬 씨인 것 같습니다.”
“……저 사람들 나가고 나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모준영이 그들 쪽을 힐긋거리다가 피식했다.
“수상하다고 했지 위험하다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저런 사람들한테 질 것 같습니까?”
몬스터들의 공격도 맨몸으로 막아내는 모준영이 지다니.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었다. 성주안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모준영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그럴 리가요. 금강불괴 씨가 제일 세요.”
“자꾸 그렇게 부르면 버리고 갈 겁니다.”
흠칫했으나 모준영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성주안은 뻔뻔스레 그의 팔짱을 끼었다.
“든든하고 안심되어 해본 말입니다. 진심이에요.”
모준영이 쑥스러운 감정을 숨기려는 듯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빨갛게 달아오른 목 뒤까진 숨길 수 없었다.
진짜 은근히 귀엽단 말이야. 덩치랑 안 어울리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갑자기 모준영이 어깨를 잡아 제 뒤에 숨겼다. 뒤꿈치를 들고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더니 아까 본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다가와 있었다. 모준영도 긴장했는지 어깨가 바짝 올라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각성자 관리센터 센터장, 모준영 씨 맞지요?”
“……?”
“그리고 저 뒤의 분은 버퍼 성주안 씨고요.”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섰는지, 바짝 올라가 있던 모준영의 어깨가 다시 내려왔다.
“혹시 기자입니까?”
“아뇨, 기자는 아니고…….”
남자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쭉 내밀었다. 모준영 뒤에 숨어 있는 성주안을 보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저기 성주안 버퍼와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겠습니까? 패, 팬입니다.”
“…….”
모준영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됩니다. 지금은 특수 보호 중이라 개인적인 사진 촬영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혹시 뭐가 더 있나? 잠시 경계를 풀고 있던 주안은 다시 경계하며 모준영 뒤에 바짝 붙었다.
“각성자에다 헌터이지 않습니까? 가까이 다가오니 확실히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등급도 꽤 높을 것 같은데…….”
“아…….”
남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이제 포기하고 돌아서려나 했는데 그는 발을 돌리지 않고 한 번 더 부탁했다.
“A급 헌터라고 팬이 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사진 한 장만 찍으면 됩니다.”
A급 헌터라고?
문득 스치는 생각에 성주안은 모준영 뒤에서 빠져나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뒷머리를 쓱쓱 긁었다.
진짜 뭐지? 저 이상한 놈은. 그래도 일단 A급 헌터라고 하니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냥 사진 한 장만 찍죠? 모준영 씨가 옆에 있을 텐데 뭐가 걱정입니까?”
성주안의 말에도 모준영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A급들을 설득해서 성좌와 파티를 맺지 못하게 하는 편이 우리 쪽에 이롭습니다. 그러니까 협조해요.”
그에 대해서는 모준영도 동의하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주안은 웃으며 A급 헌터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냉큼 핸드폰을 꺼내더니 말을 조금 더듬었다.
“서, 성주안 씨. 팔짱을 껴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팔짱을 끼고 다른 손으로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위로 높이 들었다. 모준영한테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줄 것 같은데 인상이 더러워서 부탁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가 여러 번 셔터를 누르는 동안 적당히 반응해 주며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가 만족한 듯 팔을 내리고 끼고 있던 팔짱도 풀었다. 그러곤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주안 씨, 정말 남자가 봐도 잘생긴 데다가 던전 피해자들을 위해 큰돈도 서슴없이 기부하는 인성이라니. 감탄했습니다.”
공세윤이 사랑한다고 할 때보다 잘생겼다는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버퍼가 되면서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생김새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왜 이러나 싶었다. 더구나 A급 이하의 헌터들은 외주 제작으로 만든 캐릭터이기에 개발자를 향한 이끌림도 아닐 텐데…….
“감사합니다.”
“저는 A급 헌터 서정우라고 합니다. 기억해 주세요.”
성주안이 여러모로 이상하다 여기며 대충 웃어줬다. 모준영이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사진 다 찍었으면 갑시다.”
“잠시만요.”
아직 중요한 이야길 하지 못했다. 성주안은 서정우에게 어떻게 말해야 그가 성좌와 계약하지 않을까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뗐다.
“저, 서정우 헌터. 초면에 죄송하지만…….”
서정우가 눈을 크게 뜨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하는 행동을 봐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분위기였다. 호감을 이용해 원하는 걸 부탁하는 상황이 쪽팔리긴 했지만 한 명이라도 성좌들의 반대편에 세울 수만 있다면 창피함 따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말만 하세요.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혹시 성좌와 계약하셨습니까?”
서정우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뭐지? 벌써 계약한 건가?
“성좌와 계약하라는 부탁입니까? 그런 거면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왜요? 성좌에게 뭐 원한이라도 있습니까?”
서정우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반응이 이런 걸 보니 부탁하지 않아도 계약할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말하자면 깁니다. 그래서 부탁이 뭡니까?”
“요즘 성좌들이 A급 헌터 위주로 파티원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버퍼인 저를 눈엣가시로 여겨서 사사건건 방해하더니 먼저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인가 봐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터지겠지요. 저도 웬만한 건 알고 있습니다.”
성주안은 서둘러 말했다.
“저와 다른 편에 서지 않도록…… 성좌와 계약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정우는 왜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잘 통하니 더 욕심이 생겨서 혹시 친하게 지내는 A급 헌터들이 있으면 성좌들과 계약하지 말라고 설득해 주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려는데 모준영이 팔을 당겼다. 힘을 당해낼 수 없어 모준영에게 끌려가는데 뒤에서 서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성주안 버퍼.”
모준영의 힘을 감당하느라 인사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손만 흔들었다. 식당을 나오고 나서도 모준영은 손에 힘을 풀어주지 않았다.
“좀 놓고 갑시다.”
“늦었으니 잔말 말고 따라오세요.”
악수 버프를 쓴 것도 아닌데 걸음이 더럽게 빨랐다. 주차장은 센터 건물 뒤에 있어서 그리 먼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걸어야 했다. 숨이 차서 헐떡이자 그가 허리를 잡고 옆구리에 꼈다. 백은후를 피해 도망 나올 때 당해봤던 바로 그 자세였다. 지금은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었다.
“아니, 모준영 씨, 그냥 천천히 걸어가면 되잖아요.”
모준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가던 길을 갔다. 어쩐지 매우 화가 난 것 같은 모습에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웠다.
차 앞까지 도착한 그는 마치 짐을 옮기듯 주안을 조수석에 집어넣고 저도 운전석에 앉았다.
곧장 차를 출발시키나 했는데 그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감도는 침묵이 불편해서 결국 주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준영 씨, 뭐 기분 나쁜 일 있습니까?”
“하아.”
모준영은 차 안이 가득 찰 정도로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감정이 스미지 않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성주안 씨, 제가 분명 말했습니다.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요.”
언제는 제가 못 이길 것 같냐고 걱정할 것 없다고 했으면서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 모르겠다. 제가 뭘 잘못했냐고 따지려는 찰나 모준영이 먼저 말했다.
“원래 그렇게 가볍습니까?”
어이가 없어서 노려보자 그도 마찬가지로 눈에 힘을 주었다.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아무 팔짱이나 다 끼고, 다 좋다고 웃고 그러냐는 말입니다.”
“아니, 말이 너무 심한데요? 아무나가 아니고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할 A급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