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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49)화 (49/74)

049.

파티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모준영과 함께 거주 시설로 가는 길, 라디오에선 이번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 한 각성자들에 대한 찬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승리를 거머쥔 영웅담의 주인공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버린 모준영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주안은 그런 모준영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다.

왜 게임 캐릭터엔 비극적인 서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야 더 멋있고 개연성 있는 캐릭터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왜 했지? 겪고 보니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성주안이 제가 만든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 내내 죄책감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분위기를 좀 바꿔봐야겠어.

“모준영 씨, 우리 술 한잔 마시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승리를 기념할 겸.”

모준영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술을 꽤 즐긴다고 들었으니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거주 시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후에 말했다.

“사람들 이목이 쏠려 있으니 어딜 가는 건 좀 그렇고 올라가서 마시도록 합시다. 술은 주문을 넣고.”

“그럽시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까지 들어갔다. 소파에 자리를 잡자 잠시 후, 매니저가 소주와 안주를 세팅하고 사라졌다.

술병을 든 모준영이 뚜껑을 돌려 딴 다음 성주안의 잔을 채우고 제 잔에도 따랐다. 그리고 거침없이 술잔을 꺾기 시작했다.

한 잔, 두 잔,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더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었을 때 모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끔 내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한 지는 꽤 됐습니다.”

모준영이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꺾었다. 마시는 속도가 달라서 성주안이 한 잔 마실 때 세 잔씩이나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다만 슬퍼 보였을 뿐.

나 우울해요, 라고 얼굴에 드러내는 공세윤보다 더 했다.

치유의 손길이 마음도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몬스터로 인해 받은 상처가 아니니 스킬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모준영 씨, 우리는 다들 그렇지 않을까요? 각성자라거나 일반인이라도 사는 건 항상 반복되고 우리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누가 더 성실하게 돌리냐 마느냐 그 차이죠.”

“아무리 성실하게 돌려도 바뀌는 게 없으니까요. 지금도 각성자들의 폭주로…….”

해가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 설정을 넣을 때 성주안은 한 번도 상대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게임 캐릭터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게임을 끝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꼭꼭 숨겨두고 내보이지 않는 모준영의 상처를 헤집어 물 위로 끌어 올려야 했다. 지금처럼 상처를 간직한 채로 각성자들을 미워하기만 한다면 최고의 팀워크를 기대할 수 없을 테니까.

“모준영 씨, 각성자가 되는 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창밖 어딘가를 응시하던 모준영의 새카만 눈동자가 성주안을 향했다. 슬픔이 고인 듯한 눈동자가 살짝 일렁였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각성자가 된 것도 그리고 그 각성자 때문에 사람이 다치고 죽는 것도. 내 친구도 결국 나 때문에…….”

모준영이 자신의 상처를 입 밖으로 꺼냈다. 원래 직업이 경찰이었던 모준영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각성하면서 폭주하는 바람에 동료이자 친구를 잃었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얼마만큼인지 성주안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모준영이 각성자를 혐오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야망만을 위해 힘을 사용하고 백은후를 특히 더 싫어하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갑갑함에 술잔만 들이켰다.

모준영이 느리게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이런 세상이 오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선택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모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책임져야 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거죠. 책임지기 위해선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하기보단 이해하고 용서해야 해요.”

“하하,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백은후와 친하게 지내라고?”

모준영의 촌철살인에 뜨끔했지만 성주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천천히 맞은 편에서 일어나 모준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어깨가 움찔했다.

“왜 갑자기 곁에 오는 겁니까?”

“위로는 스킨십으로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스킬명 잊었어요?”

성주안은 킬킬 웃으며 모준영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놀릴 때마다 커다란 덩치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볼을 빨갛게 물들이는 모습이 재밌어서 계속 놀리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붙으면 기함하며 소파 끝으로 도망갈 줄 알았던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모준영이 탁, 소리가 나게 술잔을 놓고는 손목을 잡고 눈을 마주쳐왔다.

“성주안 씨.”

새까만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모준영이 이런 눈빛도 할 수 있구나.

“……네?”

“저도 성주안 씨의 버프를 받는 각성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까 도발하지 마세요.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성주안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하, 왜 정색을 하고 그럽니까? 그냥 장난 좀 쳐 본 걸 가지고.”

손목을 쥐고 있는 모준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뼈가 똑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힘이었다.

“아직 스킬 효과가 남았고, 이 스킬은…….”

모준영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숨에 닿은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열기가 섞여 있었다.

“능력치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도 몇 배로 증폭시키는군요.”

“아, 알겠어요. 떨어지라는 말이죠? 저기 가서 앉으면 되잖아요.”

성주안은 냉큼 일어나 맞은 편에 가서 앉았다.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술을 많이 마셔버린 게 문제였을까?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모준영은 취하지도 않는지 연신 술잔에 술을 채워 목으로 넘겼다. 보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데 모준영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더 함께 있기가 힘들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산책 좀 하고 오겠습니다.”

테이블을 돌아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모준영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산책이라니. 제정신입니까?”

아, 나 납치의 위협을 받고 있었구나. 산책도 제대로 못 하는 삶이라니. 감금이 따로 없네.

“그럼 같이 나가든지요.”

“싫습니다.”

“……?”

성주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모준영을 봤다. 눈이 마주치자 모준영이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갑자기 정말 뜬금없는 걸 물어왔다.

“성주안 씨는 우리 중 단 한 명과 계약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

이미 계약은 모두와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사인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진짜 술에 취해서 미쳐버렸는지 아니면 강아지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하는 애정도 테스트라도 하고 싶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한 상태인데요.”

그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이러는 사람이 다른 파티원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예상을 할 텐데 상대는 모준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고 헛소리를 쉽게 입에 담지 않아 태생이 모범생인 사람. 그래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준영 씨.”

넋이 나간 듯 보이는 그를 작게 불렀다.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주안 씨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어떤 기분인데요?”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힙니다. 참을 수 없이 답답한데 계속 붙어 있고 싶고…… 이런 감정 매우 불쾌해요.”

속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모준영은 지금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제 상태를 말해 주는 것 같아 보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개발자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 아니면 술? 그것도 아니라면 키스 버프 효과?

“불쾌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밤도 늦었으니 이만 자는 게 좋겠어요.”

뭐가 되었든 제일 멀쩡했던 모준영마저 이상해지면 믿을 사람이 없어진다. 그러니 우선 술부터 깨고 볼 일이었다.

“그러는 게 좋겠군요.”

어색하게 술자리가 파한 뒤, 각자 다른 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성주안이 미리 요청한 덕분에 거주 시설의 방 안엔 싱글 침대가 하나 더 들어와 있었다. 덩치가 큰 모준영에게 더블 침대에서 자라고 하고 싱글 침대 위에 누웠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모준영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깊게 내쉬는 숨이 꼭 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렸다.

“……모준영 씨, 자요?”

“안 잡니다.”

“저는 모준영 씨 좋아합니다.”

“…….”

“아마 그 친구분도 그랬을 겁니다. 좋아하면 지켜주고 싶으니까 폭주하는 모준영 씨 곁을 끝까지 지켰을 겁니다. 모준영 씨를 좋아해서 희생한 친구분을 위해서라도 그만 아파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되길 바라며 진심으로 건넨 말이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개발자의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준영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그게 착각이라고 하더라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준영 씨, 진짜 힘내.

성주안은 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잠을 청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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