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으니 적의가 느껴지는 곳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으로 보였다.
“저쪽인 것 같네요.”
백은후가 모준영이 가리킨 방향을 쏘아보았다. 그가 전기를 일으키자 “크르르.”하는 소리가 더 커졌다.
방향을 찾았구나!
키스 스킬을 미리 써놨더라면, 뱀파이어가 나타났을 때 더 수월히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모준영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든 힘이 모준영에게 집중된 듯 그에게서 맹수를 닮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의 별명이 금강불괴인 이유는 몸 전체를 단단한 바위처럼 만들어 엄청난 물리력으로 상대를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공세윤 씨 모준영 씨의 힘이 모이는 지점을 공격해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얼려주세요.”
성주안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자 공세윤이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던전에 있는 모든 수분이 한 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만들었다. 뱀파이어의 모습일 땐 보이지 않던 것이 얼리자 투명한 얼음 속에 가둬진 거대한 박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 지금이에요!”
성주안의 외침에 모준영이 전속력으로 얼음덩이를 향해 뛰기 위해 발을 떼었을 때였다.
크으으! 큭큭!
얼음덩이 뒤에서 남아 있는 박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는 뱀파이어는 움직이진 못했지만 마력은 그대로인지 얼음을 깨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아아!
흡혈박쥐들이 얼음이 된 뱀파이어의 주변을 둘러쌌다. 보스를 가둔 얼음을 깨려는 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얼음을 부수고 있었다. 단번에 돌진하려던 모준영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 사이 백은후가 채찍을 휘둘렀다.
“얼음이 깨질까 봐 자제하려 했지만 안 되겠네. 귀찮은 것들을 먼저 해결해야지.”
번개 채찍을 맞은 흡혈박쥐들은 한 마리씩 튀겨져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성주안은 남은 흡혈박쥐의 숫자를 확인했다.
“500여 마리 남았어요. 주지찬 씨는 후방을 맡으세요.”
남은 흡혈박쥐들이 뱀파이어의 뒤로 끊임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주지찬은 거대한 불꽃을 일으키며 힘을 모았다.
“새는 새로 이겨야지!”
“엄밀히 말하면 박쥐는 포유류지만.”
백은후의 비아냥거림에도 주지찬은 바닥을 탁, 치고 풀썩 날아올랐다. 스킬, 주작의 후계자였다. 한 마리의 거대한 불새가 되어 날아오른 주지찬이 흡혈박쥐들의 가운데를 뚫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박쥐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이제 나만 제대로 하면 되겠네요.”
뱀파이어를 호위하는 박쥐들이 모두 튀겨 죽거나 타 죽은 상황. 모준영이 발을 구르며 얼음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쾅, 콰앙, 쾅!
마치 거대한 바위를 폭파하는 것 같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얼음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그 속에 있던 뱀파이어는 모준영의 무한러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동굴 벽에 가 부딪혔다.
주지찬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칼을 뽑아 들었다.
“와……. 무기 진짜 다채롭네요.”
훗, 하고 웃음을 날린 주지찬이 사방으로 화염을 뿜어내더니 쓰러져 있는 뱀파이어의 심장을 향해 칼을 꽂았다.
“크으으윽!”
새까맣게 타버린 뱀파이어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필살기를 맞고서도 아직 살아있는지 몸을 비틀거리며 모준영에게로 다가갔다.
“어림없지!”
공세윤이 얼음 폭탄을 쏘아 그를 얼렸다. 거기에 다시 모준영이 다가가 몸을 부딪치자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며 뱀파이어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카아아, 크아아…….”
신음성이 동굴 안에 가득 차는 것과 동시에 뱀파이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수백 마리의 흡혈박쥐들도 모두 사라졌다.
“끝난 건가?”
박쥐들이 사라지고 파티원들이 힘을 거두자 거대한 던전이 사라지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습기로 가득 찼던 곳이 다시 드넓은 공터로 바뀐 것이다. 햇빛이 모두의 머리 위를 비췄다.
갑자기 내리쬐는 햇빛에 성주안은 조금 비틀거렸다. 공세윤이 잽싸게 다가와 성주안의 팔을 부축했다. 성주안은 공세윤에게 기댄 채 전투를 막 끝낸 파티원들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번에도 우리가 해냈다는 기쁨이 치솟아 올랐다. 공세윤의 손을 잡아 위로 번쩍 들며 말했다.
“이겼어요!”
성주안은 저를 보는 모두의 시선을 하나하나 맞추며 목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다들 대단해요! 도대체 어떻게 그 위기 속에서 저를 깨운 거예요.”
그 말에 모준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걷히고 당혹감이 서렸다. 백은후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왕자님의 키스가 구하는 법이지.”
공세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왕자님이 네 명이나 되는 게 어딨어요.”
주지찬이 덧붙였다.
“그래도 무사했으니 된 거 아냐?”
그제야 성주안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이 왔다.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뱀파이어의 유혹 스킬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모두 한 명씩 돌아가며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진짜 스킬 이름이 키스가 뭐야, 키스가……. 누가 만든 스킬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너무하다, 너무해. 속으로 불평 중인 성주안에게 백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디어 누가 냈는지 알아?”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인간은 역시 백은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킬 이름이 유혹이니까 날 유혹하려는 것이었을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모두 살았으면 된 거죠.”
모준영이 발끈하고 나섰다. 설마 모준영이 낸 아이디어라고? 성주안은 입술 새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누른 채 모준영을 쳐다봤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금강불괴 씨!”
“왜, 뭐요?”
“금강불괴 씨 맞나봐요? 대답까지 하네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준영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참 독특한 캐릭터란 말이지. 마음도 따뜻하고 누구보다 부지런한 주제에 항상 귀찮다는 표정만 짓고 있는 신기한 사람.
성주안은 모준영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모준영이 헛기침하며 성주안에게서 빠져나왔다. 성주안은 잠시 호흡을 고르다 파티원들을 모두 둘러보며 말을 덧붙였다.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 당신들 이름을 불렀어요. 엄청나게 크게 불렀는데 안 들렸는지 아무도 응답하지 않더라고요. 이제 죽었다 했는데…….”
속에서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에 성주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이렇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인사하자 공세윤은 팔에 매달려서 수줍게 웃었고, 주지찬은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젖혀가며 호탕하게 웃었고, 백은후는 다가와 성주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모준영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먼 산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또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저기 모준영 씨, 오늘 밤은 당신과 함께하게 되겠네요.”
모준영이 성주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왜 그렇게 합니까? 밤을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보호 감시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참 정 없게도 한다. 하긴, 그래서 매력적인 거겠지만.
모준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공세윤이 옆에서 팔을 휘휘 흔들며 저를 좀 봐달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형, 저는 이틀 뒤에요. 이틀 밤이나 함께 있을 수 있다고요.”
눈부시게 웃는 공세윤을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세윤 씨! 우울함이 사라졌나 봐요.”
“그러네요! 형을 구하고 너무 기뻐서 사라졌나 봐요. 기분 좋아요.”
공세윤 상태도 안정되었고 다친 사람 하나 없이 던전을 클리어했으니 남은 건 보상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성주안은 상태창을 켰다.
<보상카드 ― OPEN>
― 버퍼 성주안의 액티브 스킬을 각성합니다.
“액티브 스킬?”
성주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음 줄을 읽었다.
<치유의 손길(S) ― 아군의 상처를 치유>
와아, 치유의 손길이라니. 앞으로 던전의 난이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상황에서 꼭 필요한 스킬이었다.
“지금 다들 파티창 확인해 보세요.”
다들 성주안이 확인한 것을 봤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은후가 가장 기뻐하며 말했다.
“이야, 치유 스킬까지 얻다니.”
“그러게요. 형이 최고예요.”
“너무 사긴데…….”
주지찬이 불안한 듯 말끝을 흐리자 모준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분간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다는 건 비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도 납치해 가려는 조직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공세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 납치라니. 절대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돼! 형을 지키는 데 자신이 없다면 그냥 내가…….”
공세윤이 채 말을 끝맺기 전에 모준영이 나섰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24시간 옆에 붙어서 철벽 방어를 할 테니.”
야무지게 말아쥔 주먹이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였다.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긴 했지만 그 모습이 처연해 보여서 그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준영이 누군가를 지키는데 왜 저렇게까지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채 각성자가 된 것도 모자라 센터장이 되어서도 더러운 일들을 겪어야 했을 테니까. 그의 얼굴에서 세파에 찌든 자의 피곤함이 엿보였다.
성주안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이려다가 말을 삼켰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모준영은 아직 제게 제 사연을 말해 주기 전이었다. 그래서 네 상처를 알고 있노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모준영 씨를 믿습니다.”
모준영의 새카만 눈이 먹처럼 검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