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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는 로그아웃 하고 싶다 (47)화 (47/74)

047.

이게 뭐지? 설마 뱀파이어?

“누, 누구야?”

“…….”

누군지 물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성주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바짝 움츠렸다. 빨리 파티원들을 부르고 싶은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꼭 안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아아아…….

바람 소리를 닮은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성주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뱀파이어의 유혹술에 당했다는 것을.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여기가 어디인지, 파티원들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혹술에 당한 상태이상의 상황.

성주안은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을 때 상태이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파티원들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백은후! 모준영! 주지찬! 공세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커녕 진짜 소리를 쳤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끝일까? 정말로?

흐린 시야 안에 네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 * *

“성주안, 아직 안 깼어?”

백은후의 말에 그를 업고 있던 모준영이 대답했다.

“아직 안 깼습니다. 옆에서 공세윤 씨가 계속 몸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어요.”

“이거 큰일인데?”

백은후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적이 가까이 있다면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며 파티원들은 모두 성주안을 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준영은 몇 번이나 함성 스킬을 썼고 나머지 파티원들이 보이지 않는 뱀파이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랬는데도 성주안은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형, 일어나요. 제발요. 흐읍…….”

한참 훌쩍거리던 공세윤이 자세를 잡았다. 힘이 없으면 물약을 까서 마시며 벌써 몇 번째 허공에 대고 얼음 칼날을 쏟아냈다. 주지찬이 공세윤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거 같으니까.”

“놔! 뭐든 어떻게든 할 거야. 나는 절대 형 이렇게 못 놔두니까 너 혼자 나가든가!”

“누가 나가재?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지. 허공에 스킬만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모준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이상한 방법이긴 한데…….”

백은후는 모준영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얼굴이 이유 없이 붉어져 있었다. 저런 모습의 모준영은 처음이라 흥미가 돋았다.

“뭔데 그래? 지금 이 방법 저 방법 가리게 생겼어? 생각나는 건 뭐든 해봐야지.”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유혹술인가 뭔가 하는 스킬은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니만큼 물리나 마법 계열의 공격으론 깨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고, 그래서 본론은?”

모준영이 입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을 꺼내기가 힘든 것 같았다. 공세윤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뭔데요! 그냥 좀 말해요! 답답해 죽겠네.”

“그, 그게…….”

모준영이 드물게 말을 더듬다가 흠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유혹엔 유혹으로 맞서자는 겁니다. 이상한 말이긴 한데 아주 가능성이 없지도 않아요. 미남 뱀파이어가 완벽한 외모로 상대를 유혹해 피를 빨아먹었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모준영의 말을 듣고 있던 세 사람의 입이 떡 벌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모준영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예 허무맹랑한 말도 아닌 데다가 할 수 있는 걸 이미 다 해 봤으니 남은 수는 저것뿐이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공세윤이었다.

“주안이 형은요……. 아닌 척하면서 되게 예쁜 거 좋아해요. 저 웃을 때마다 예쁘다고 좋아했어요.”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백은후도 말을 보탰다.

“일리 있는 말이야.”

백은후의 시선이 나머지 파티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지나갔다. 그러곤 모준영의 얼굴에 멈췄다. 단정한 이마와 각이 진 눈썹, 오뚝한 콧날과 일자로 그어진 입술을 보면서 성주안이 어떻게 미소 지었는지 기억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땐 그냥 평범한 표정으로 쳐다봤으면서 저 얼굴을 볼 땐 유독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개구쟁이처럼. 백은후는 성주안이 그랬던 것처럼 모준영을 불러보았다.

“금강불괴 씨.”

모준영이 질색하며 백은후를 노려봤다.

“그렇게 좀 부르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백은후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

“성주안이 널 볼 때 유독 표정이 밝아졌어. 너 같은 얼굴이 취향인가 봐.”

그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이 모준영에게 닿았다. 공세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가며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주지찬은 눈에서 불꽃이 튈 것처럼 강렬한 눈빛을 쏘고 있었다.

모준영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서요? 뭐 어쩌란 말씀입니까?”

“그러고 보면 함성 스킬도 몬스터들을 유혹해서 제 쪽으로 붙이는 거잖아?”

모준영의 표정은 점점 썩어가는데 공세윤과 주지찬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했다.

“지금 함성이라도 쓰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봐야 사라졌던 흡혈박쥐들이나 붙을 텐데요.”

백은후가 모준영에게로 조금씩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키스 버프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때?”

모준영은 눈을 크게 뜨고 백은후를 봤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표정은 진지했으나 목소리엔 웃음기가 묻어나 있었다.

“저더러 성주안 씨에게 키스하라는 말입니까?”

공세윤이 불쑥 끼어들었다.

“뭘 물어! 그 말이잖아. 주안이 형 얼른 깨워서 나가야지!”

“…….”

“얼른 키스해. 주안이 형이 백은후 말처럼 그쪽 좋아하면 키스에 깨어날 수도 있잖아!”

모준영은 상황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당황스럽기만 한데 공세윤은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성주안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혀엉……. 조금만 참아요. 형이 좋아하는 모준영이 왕자님처럼 키스해 줄 거예요. 그럼 형은 공주님처럼 일어나세요. 키스 양보하기 싫지만 형이 깨어난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

“빨리, 빨리하라고요.”

공세윤이 모준영의 등에 업혀 있는 성주안을 조심히 끌어내려 안았다. 모준영은 천천히 성주안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힘없이 감긴 눈 아래 속눈썹이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자는커녕 여자와도 사소한 입맞춤 한번 해 본 적 없었던 모준영은 지금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건 응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인공호흡 같은 것이다.’

모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조금씩 내렸다.

“……!”

말캉한 살덩이를 입에 붙이자마자 몸을 덮고 있는 근육이 모두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어 있던 힘이 혈관을 타고 흘러 피부 밖으로 빠져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 순간 모준영의 가슴 한구석에 있던 단단한 끈이 탁, 하고 끊어졌다.

“하아…….”

입술을 뗀 모준영은 실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발 눈을 떴으면 좋겠는데……. 성주안이 저와 똑같은 감각을 느낀 거라면 벌써 눈을 떠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모준영은 그를 보고 쓰게 웃으며 저 하나의 힘만으로는 깨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안 일어나는 거야. 형.”

공세윤이 울먹거렸고, 백은후는 인상을 썼으며 주지찬은 동굴 벽만 퍽퍽 치고 있었다.

모준영이 부드럽게 제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저 혼자만의 힘으론 무리인 것 같습니다. 다들 하시죠?”

세 사람은 반색하며 성주안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입술을 댄 것은 공세윤이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주안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세윤의 모습은 너무 조심스럽고 간절해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형, 꼭 일어나줘요. 제발요.”

공세윤이 주안의 귀에 속삭인 후에 물러나자 주지찬이 다가왔다. 그는 양손으로 주안의 뺨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새가 부리를 쪼는 듯 입술을 무는데 버프를 받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주지찬은 한 손으로 가슴을 잡고 물러났다.

마지막은 백은후였다.

“……정신이 있을 때 하는 편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성적인 의미가 많이 들어가 있는 질척한 키스가 이어졌다. 백은후가 성주안의 입술을 물고 빠는 동안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이 그들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 습기로 축축했던 동굴 속이 열기로 말라갔다.

키스가 끝나갈 때쯤 주안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확인한 백은후의 움직임이 점점 더 격해졌다.

사실 주안의 정신은 처음 모준영이 입술을 대었을 때부터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몸을 감싸는 온기, 입술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 진심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긴 말들.

유혹은 유혹으로 이겨야 한다는 모준영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가슴에 따뜻한 물이 차오르고 세포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깃드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백은후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성주안이 눈을 떴다.

“누, 눈 떴다!”

공세윤이 외치자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성주안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주안은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가, 이내 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공세윤을 보고는 상황을 알아차린 듯 작게 미소 지었다.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뱀파이어의 유혹 스킬이 아무리 세다고 한들 파티원들이 더 강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깨운 거지?

유혹 스킬에 당하면 성좌의 도움 없이 전투만으로는 절대 깨어날 수 없었을 텐데…….

성주안이 조금 혼란에 빠져 있는데 공세윤이 훌쩍였다. 차가운 눈물이 뺨 위에 툭툭 떨어졌다.

“형이 못 일어나는 줄 알고 너무너무 놀랐어요. 그래도 일어나서 다행이에요.”

팔을 뻗어 공세윤의 뺨을 만져주려고 했을 때였다.

크르르…… 치익 칙.

저쪽 편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준영이 몸을 부풀렸다. 모준영의 모든 능력치가 올라가 있었다. 설마, 버프를 받기 위해 의식을 잃은 나와 키스했나? 그렇다면 공세윤이 양보했다는 소리일까. 똑똑한 선택이었다.

뱀파이어의 주 스킬은 유혹. 환각 스킬을 쓰는 만큼 모준영의 물리적 방어력과 공격력에는 한없이 약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모준영 역시 물리 공격을 쓰는 만큼 환각 스킬엔 약하므로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하지만 현재 모준영은 모든 능력치가 올라간 상태니까 뱀파이어가 모습만 드러낸다면 다른 파티원들과의 협공으로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었다.

“모준영 씨, 우선 위치부터 파악해야 해요.”

“압니다.”

모준영은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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