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던전 정보
― STAGE 5>
다행히 공세윤에게 정보를 전한 성좌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예정대로 도마뱀들이 튀어나와 주기만 하면 다행인데…….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전력으로 힘들긴 하겠지만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성주안은 상태창을 열었다.
<던전 정보
― STAGE 5
― 파티 추천 LV. A급 10인 이상
― 몬스터 LV
*알 수 없음>
“하아, 내 이럴 줄 알았다. 미친 성좌 놈들!”
몬스터 정보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이 던전에도 트릭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전략도 세울 수 없었다.
하, 어떡하지? 성주안이 고민하는 사이 분위기를 파악한 백은후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지난번처럼 이놈들이 또 트릭을 심어 놓았어요! 나쁜 새끼들.”
그 말에 공세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래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제가 조금 더 추궁해야 했는데.”
공세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하, 그러고 보니 쟤 우울함 상태였지. 성주안은 침착하게 공세윤을 위로했다.
“성좌가 아무리 멍청해도 계약도 안 한 각성자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정보를 주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도 시간과 장소 던전 레벨까지 미리 안 게 어디예요. 민간인이 다치지 않았잖아요.”
웬일로 주지찬이 나섰다.
“그건 맞아. 대단한 일 한 거지. 저 규모의 던전이 갑자기 터졌으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해.”
공세윤이 슬쩍 손을 잡아 왔다. 손바닥이 촉촉한 게 자기 탓을 할까 봐 긴장했나 보다. 그런 공세윤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잘 들으세요. 지난번엔 몬스터의 특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이 쉬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상황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 말에 모준영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성주안 씨, 다시 성좌 능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겁니까?”
“…….”
갑작스러운 모준영의 성좌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성주안에게로 옮겨졌다. 성주안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에게 자신이 성좌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희생의 창조자와 둘만 아는 비밀로 힌트를 줬으니 여기서 더 숨겨봐야 자기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성좌의 능력은 진작에 없어진 상태입니다. 던전 정보나 몬스터 등급을 볼 수 있는 것은 버퍼의 능력입니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쓸데없이 똑똑한 공세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태창으로 등급을 볼 수 있다고 해도 공략법까지 아는 건 좀 수상해요. 그런 특수 스킬이라도 있는 거예요?”
난감했다. 이 게임을 만든 개발자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고 특수 스킬이라고 하면 성좌의 능력 뺨치는 특수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나왔다고 세상이 시끄러워질 것이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아닙니다. 처음 성좌가 됐을 때 그 능력으로 공부를 해뒀습니다. 각성자와 계약했을 때 도움이 됐으면 하고요.”
정확하게는 개발자일 때 동서양의 괴물이나 유령 혹은 신비한 동물들에 관한 연구이긴 했지만 성좌나 이 세계 사람이나 이들이 모르는 존재일 테니 상관없을 거다.
“아아, 그래서였구나. 역시 형은 대단해요.”
공세윤의 말에 모준영이 맞장구쳤다.
“확실히 성좌일 때부터 남다르긴 했었죠. 민간인 구제에 돈을 써달라고 했으니.”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하지 않는 주지찬도 거들었다.
“내가 애 업고 뛸 때 유일하게 아이 걱정을 먼저 한 성좌이기도 했어.”
눈앞에서 바로 칭찬을 들으려니까 얼굴이 간지럽고 손이 오글거리긴 했지만 은근히 기대되기도 했다. 백은후는 뭐라고 할까?
“거지새끼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코인이 많긴 했지.”
역시 백은후. 성격이 아니라 돈이 많아서 좋았다는 거잖아. 그럼 지금은 거지가 되었으니까 싫겠네?
“뭐, 성좌가 아니면 어때? 성좌보다 똑똑하고 예쁘면 된 거지.”
아니 똑똑하다는 말까진 알겠는데 거기 예쁘다는 말이 왜 들어가냐고요. 참나.
성주안이 기가 막혀 하는 와중에 다들 맞는 말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 S급 5인 파티가 흔한 것도 아니고 상황에 맞게 움직이면 되는 거지. 솔플할 때 하드모드 던전을 돌고서도 다들 잘만 살아남았어.”
백은후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고.
“다들 이번에도 살아남자고요. 그리고 혹시나 위험한 상황이 되면…….”
성주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 게임을 만들 땐 미처 몰랐다. 자신이 직접 화신이 되어 난관을 헤쳐 나가게 될 줄은. 하지만 그 상황이 되자 던전 안에 들어갈 때면 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죽음이 정말로 끝일 수도 있겠지만 본래의 세계에서 다시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여기서 죽으면 정말 끝이었다.
“각자 계약을 요청한 성좌에게 접속 요청을 하시고 도와달라고 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주지찬이 발끈하자 나머지 파티원들도 말을 보탰다.
“말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게이트나 엽시다. 시간은 금인 거 모릅니까?”
“내가 형을 너무 좋아하니까 심한 말 못 하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가 안 괜찮아. 거지 놈들과 손을 잡을 바엔 너 살리고 말지.”
뭔가 굉장히 감동스러울 만한 말인데 어딘지 모르게 잔뜩 비틀려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살아 나오는 수밖에.
성주안은 힘을 주어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땐 방어가 가장 중요합니다. 모준영 씨와 백은후 씨가 앞에 서고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게 좋겠어요.”
백은후와 모준영이 앞, 공세윤과 주지찬이 왼쪽과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던전 공략에 자신감이 붙었다.
할 수 있다!
성좌들이 아무리 트릭을 써 봐야 고작 5번째 난이도일 뿐이니 어려울 것 없다.
성주안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았다.
“준비됐으면 게이트 열겠습니다.”
모준영이 몸으로 밀어 게이트를 열었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빛이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사방이 깜깜해졌다. 파티는 조심스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되게 스산하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 주안은 두 사람의 팔을 잡고 조심스레 발을 뗐다.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고 난 이후 주안은 주변을 살폈다. 게임을 개발할 때 만든 5번 스테이지의 던전 속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몬스터의 정보는 없느냔 말이다! 제발 도마뱀 나와라. 도마뱀.
성주안은 마음속으로 빌며 새카만 던전 안을 둘러보았다.
츠츠츠츠!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를 둥둥 울렸다. 불안한 예감에 걸음을 멈추고 외쳤다.
“자, 잠시만요. 멈춰요!”
푸드득.
저기 멀리서 어둠을 가르며 박쥐들이 날아다녔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밖으로 드러내고 날개엔 독침을 단체 천장에 매달려 있었던 것들이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것이다.
사람의 피를 빨아 양식으로 삼는 흡혈귀의 전신 흡혈박쥐 군단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 왜 하필이면 흡혈박쥐야.”
도마뱀도 좋고 원숭이 무리도 괜찮고 하다못해 뱀 소굴도 괜찮은데 하필이면 흡혈박쥐가 걸려버렸다. 진정하자. 진정. 지금은 게임 중이 아니라 실전이니까 불평할 시간도 아깝다. 성주안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게이트 앞에선 보이지 않던 정보가 안에서는 보였다.
<몬스터 LV
*뱀파이어(??) : 1마리
*흡혈박쥐(A) : 3,504마리>
이번에도 역시 보스 몬스터인 뱀파이어의 등급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 게임은 보스 몬스터의 등급보단 그가 가진 특수 스킬이 문제였으니까.
뱀파이어는 늑대인간처럼 인간의 외형에 거대한 날개가 달린 보스였다. 주 스킬은 모준영이 쓰는 ‘함성’처럼 강력한 유혹술로 적을 제 몸에 붙이는 스킬이었다. 등급으로만 따지자면 모준영이 더 높지만 유혹술에 당하지 않아야만 이길 수 있었다.
푸드덕, 푸드드드…….
벽에 붙어 있던 수천 마리의 박쥐들이 일제히 떨어져 나왔다. 어둠에 몸을 숨기고 하얀 송곳니와 금빛 눈동자만 번쩍이는 모습이 기괴했다.
“뭐냐. 이 못생긴 박쥐새끼들은?”
박쥐들이 점점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게이트 앞에서 버프를 주고 들어왔어야 했는데!
“어서요. 포옹 버프 줄 테니까 둘 다 이리 와서 안겨요.”
성주안은 두 사람을 안기 위해 팔을 벌렸다. 백은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하나도 제대로 못 안겠는데?”
“그럼 어쩌자고요. 빨리, 급해요.”
“젠장.”
낮게 욕을 짓씹은 백은후가 성주안을 가운데에 끼운 채 모준영에게 다가갔다. 모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백은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준영과 백은후가 안는데 성주안이 가운데 낀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조금 갑갑하고 민망하긴 했지만 코앞에 박쥐가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드드!
설상가상으로 박쥐의 날개에서 독침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품에서 나온 성주안이 크게 외쳤다.
“모준영 씨, 함성이요! 쟤들 보스가 함성과 비슷한 스킬 쓰니까 그 스킬에 유독 약해요. 모준영 씨만 보게 만든 다음…….”
“내가 벼락을 치면 되겠지.”
백은후의 말이 맞았다. 둘은 곧장 공격 모션을 취했다.
모준영이 까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몸을 부풀렸다.
“아아아!”
함성을 지르자, 박쥐들이 일제히 모준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준영은 즉시 무한러쉬를 써서 방어력 최강 상태를 만든 후 제 몸을 둘러싼 박쥐들의 공격을 감당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