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네? 저를 왜…….”
백은후가 안전띠를 풀며 상체를 숙였다. 그냥 말하면 되는데 꼭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말해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
“계속 말해도 왜 모르지? 내가 네 마음 얻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대놓고 말했잖아.”
“그럼 저랑 데이트……. 아니지, 그냥 산책하러 나오신 거군요. 하하하.”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연히 연인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줄 알았지 그게 제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백은후가 차 문을 열자 향긋한 나무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풀이 우거진 공원이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산책할 시간이 없었고 이곳에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공원은 정말 오랜만에 오는 듯했다.
성주안은 냉큼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공원은 생각보다 넓었다. 긴 산책로를 따라 풍성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공원 한가운데엔 넓은 호수도 있었다.
풀 냄새와 물 냄새를 맡자 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좋은가 보네.”
백은후의 말에 돌아보니 그가 싱긋 웃으며 주안을 따라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오니 좋긴 하네요.”
“좋으면 좋은 거지. 좋긴 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갑자기 이런 곳에 데려오니까 그렇죠. 뜬금없이.”
“너를 보호할 생각뿐이지, 감금할 생각은 없으니까.”
백은후가 지금 당장 감금시킬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살짝 소름이 돋아 어깨를 으쓱하고 가던 길을 갔다. 그가 은근히 옆에 붙어왔다. 아직 키스 스킬이 남아서 그런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좀 떨어져서 걸으면 안 됩니까?”
“왜?”
뜨겁다는 말을 하기가 좀 그래서 적당히 말을 돌렸다.
“답답해서 그렇지요.”
그러나 백은후는 떨어지긴커녕 오히려 주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뻔뻔스레 말했다.
“명색이 데이트인데 그럴싸해야지.”
“……이상한 말 좀 하지 마세요. 누가 보면 진짠 줄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주안에게 백은후가 낮게 속삭였다.
“데이트가 싫으면 진실게임은 어때?”
“……진실게임이요?”
“우리 할 말이 있잖아. 희생의 창조자 씨.”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다니.
성주안은 잠시 굳은 채로 눈을 깜빡이다가 저기 멀리 보이는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에 가서 앉읍시다.”
생각할 시간을 벌고 싶었다. 그러자 백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이미 밝힌 거나 마찬가지인데 더 숨기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전부 솔직하게 말하자니 백은후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불안하고…….
어차피 처음부터 숨기고 싶어서 숨겼던 것도 아니니까 이쯤에서 말할까?
성주안은 벤치에 앉을 때까지 고민하다가 백은후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벤치에 앉은 백은후가 멀리 있는 호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희생의 창조자가 없어지고 네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의심 많은 백은후가 충분히 할 만한 생각이었다.
“성주안. 내가 왜 돈과 권력을 탐하는지 알아?”
그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안은 모르는 척했다.
“모르죠.”
백은후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좌들이 싫어서야. 가진 것도 없으면서 성좌랍시고 오만한 데다가 모두 제 욕심 차리기에만 급급하지. 그리고 나는 좀…….”
백은후의 시선이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그러잖아도 깊고 푸른 눈동자가 제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으니 자꾸 눈을 피하고 싶었다. 성주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백은후가 말을 이었다.
“튕기는 스타일을 좋아해서 말이지. 꼭 누구처럼.”
이 녀석이 우리가 지금 진짜 데이트를 하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건가? 왜 자꾸 헛소리를…….
“성좌랑 연애라도 한답니까? 스타일이 무슨 상관입니까? 계약해서 던전만 클리어하면 되는 것을. 어차피 백은후 씨도 마지막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하고 성좌가 되는 게 목적 아니에요?”
백은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아무 성좌와 계약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이쯤에서 성주안은 궁금해졌다. 백은후가 처음 희생의 창조자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무한대의 코인이 가진 매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백은후는…….
“만약 희생의 창조자가 무한대의 코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별 관심 없었겠지?”
그럴 줄 알았다. 참 한결같단 말이야.
성주안이 피식 웃자 백은후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코인 따위 별로 관심도 없어. 까칠하긴 하지만 나름 매력적인 S급 버퍼가 옆에 있으니까 말이야.”
백은후가 끈적한 시선을 보내며 주안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제가 희생의 창조자라는 걸 알고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백은후의 속이야 뻔하지 뭐.
“저한테 그런 말 하셔도 코인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성좌가 아니니까요. 버퍼가 되면서 코인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실 사라진 게 아니라 그림의 떡이 된 상황이긴 했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백은후가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눈가를 휘었다. 코인이 없다고 하면 바로 본색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성좌였다가 다시 각성자가 되는 일이 가능했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요. 이게 전부 못된 성좌놈들 때문입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고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백은후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주안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마음고생 많았어.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야. 그러니까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
백은후에게 이런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네. 성주안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나도 네 도움이 필요해서 하는 말이야.”
그건 말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스킬이 다 개방된 S급 각성자가 네 명이나 있으니 예정했던 대로 던전을 클리어해 나간다면 마지막 스테이지까지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좌들이 계속 방해해서 저번과 같은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이 문제였다. 던전과 몬스터의 등급이나 속성이 계속 다르게 나타난다면……. 생각만 해도 열이 뻗치고 한숨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은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숨 쉴 거 없어. 그래 봐야 욕심에 잠식된 성좌들은 항상 우리보다 어리석었지. 오죽하면 제일 어린 공세윤과도 계약하지 못했겠어.”
이 말은 확실히 위로되었다. 그의 말처럼 성좌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 중에서도 자신과 계약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성좌도 있었으니까.
이건 필시 내부 분열의 조짐이었다. 단합이 안 되는 파티치고 길게 가는 꼴을 못 봤으니 크게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깨지기 전까지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니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성주안은 백은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백은후 씨,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절대 파티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백은후가 고민스레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분위기를 봐선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역시 꿍꿍이가 있었던 걸까? 한참 생각하던 백은후의 시선이 다시 주안을 향했다.
“그럼 너는 뭘 해줄 거지?”
그 질문엔 이미 대답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백은후의 성격적 특성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백은후 씨가 성좌가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던전을 클리어하겠습니다.”
백은후는 별 반응이 없었다. 감동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대답은 해줄 줄 알았는데. 역시, 벌써 딜을 하긴 무리였던 걸까?
“만약 내가 배신한다면?”
“계약은 파기되는 거죠.”
그 말에 백은후가 씩 웃더니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주안에게 건넸다. 받아보니 은색 링에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게임 아이템처럼 화려하지만 투박하게 생긴 건 아니었고 꼭 무슨 예물 반지처럼 생긴 것이었다.
“갑자기 이걸 왜…….”
백은후가 덥석 손목을 잡더니 자기 멋대로 성주안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아니, 이 아저씨가 진짜. 무슨 결혼반지도 아니고 왼손 약지는 너무하잖아요.
“원래는 던전에서도 위치를 찾을 수 있게 하려고 특수 제작한 반지였는데…….”
아, 위치추적기라고 생각하면 되는구나.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약속의 정표라고 해두지.”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요. 연인도 아니고 정표라니.”
“정 껄끄러우면 우정 반지라고 생각해.”
원래 이렇게 낯 뜨거운 말을 막 내뱉는 캐릭터가 아닌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의아했다. 어쨌든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니까 좋아하는 척해줘야겠다.
“고, 고맙습니다. 잘 낄게요.”
“그래, 배신할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거야. 어차피 이 세계에 S급 버퍼는 너 하나뿐이니까.”
“……그, 그래요.”
성주안은 대충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 * *
백은후가 준 반지를 끼고 길드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세윤 : 형, 사흘 후에 던전 가는 거면요. 던전 클리어하고 나서 제 차례인 거죠?>
오늘 백은후, 내일 모준영, 모레 주지찬. 그다음 날 던전 공략을 예정하고 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성주안 : 네.>
<공세윤 : 그럼 네 밤만 자면 되는 거네요!>
꼭 아이 같은 말에 웃음이 나왔다.
<성주안 : 세윤 씨 밥은 챙겨 먹었어요?>
곧바로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한참 지나고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제 안 올 건가 보다 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려는 찰나, 그제야 토끼가 배를 두드리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이 왔다.